[하간·소리 공동기획-포토파일] ④ 제주공립南소학교와 제국의 소년 동상

3.1운동 100주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올해 2019년이 우리에게 주는 특별한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공동기획 <하간+소리: 포토파일>을 마련했다. 과거 일본은 메이지유신(1868년)을 계기로 다른 모든 아시아 나라보다 앞장서서 서구의 제도와 학문을 도입하며, 세계를 향한 정복의 야욕을 품게 된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일본의 시선은 자신과 다른 문화를 가진 민족들에게 향한다. 그 세력들 중 일부 일본인 학자들은 다양한 민족들이 사는 나라 및 지역으로 가서 그들이 원하는 학문이론(지리학, 인류학, 고고학, 민족학, 민속학, 언어학 등) 정립과 유포에 공을 들이기도 했다. 당시 이들 분야에 뛰어든 일본인 학자들은 군사력까지 동원하며 현지 조사를 단행했고, 필요에 따라서는 탈맥락적·탈역사적인 연출·분장을 요구하며 해당 민족의 지리, 관습, 민속, 제도, 일상생활 등을 조사·촬영했다. 이처럼 20세기 전후 일본의 아시아 침략·수탈 정책은 한반도를 포함한 아시아 민족 현지 학술조사를 토대로 그 수법이 날로 고도화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의 조사 대상지에는 제주도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제주기록문화연구소-하간(대표 고영자) + 제주의소리 공동기획 <하간+소리: 포토파일>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조사·촬영된 당시 제주도 사진들 중 시사성이 짙고, 기록적 가치가 있는 것들을 추려 당대 제주도를 다각적으로 접근, 재조명할 목적으로 마련됐다. [필자·편집자 공동 주] 

사진 한 장으로 과거의 ‘그때 그곳’을 접하고 그것을 재구성하다 보면 의외의 반전을 종종 경험한다. 사진 속 장소가 정확히 어디였을까 하는 궁금증으로 시작하여,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때로는 기존의 통설적 견해와 다른 새로운 의미의 지평이 열림과 동시에 미처 깨닫지 못한 의문과 질문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진다.

문자(글)로 된 기록(묘사)은 철저히 의도적으로 선택된 의미의 세계이지만, 사진은 의도적인 것과 비의도적인 것의 경계를 허물어 버리는 특성도 있어서, 단순한 ‘그때 그곳’이라는 사실 확인 기능을 넘어서 시선(視線)의 확장, 나아가 예기치 않은 혼란과 더불어 탐구욕마저 부추긴다. 이번[포토파일④]의 무대, 이앗골(지금의 제주중앙성당에서 인천문화당으로 이어지는 일대)의 옛 사진들을 추리고 원고를 준비하면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1) 20세기 초반 ‘남문한질’로 이어지는 ‘이앗골’

20세기에 접어들어 일제강점기를 목전에 두고 제주성내 ‘남문한질’로 이어지는 ‘이앗골’ 만큼 국제적 또는 제국적으로 급부상한 곳도 드물 것이다. 일찍이 영국인 선장 에드워드 벨쳐(1845년 7월), 프랑스계 미국공사 서기관 샤를르·샤이에·롱(1888년 9월), 대한제국 궁내부 마지막 미국인 고문관 윌리엄 샌즈(1901년 5월), 한말의 프랑스인 선교사이자 1909년 신성여학원 설립자 마르셀 라쿠르(구마슬)신부, 거기다 한말 조선인 유배인들, 일본인 상인, 관료, 의사, 순사, 교원 등. 그야말로 다종다양, 각계각층 사람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당시 이 일대를 장·단기적으로 방문·체류하였다. 이곳에 큰 변화의 바람을 예고하는 움직임들이었다.

찰미헌, 총물당, 역학당, 대변청 등 이 일대 조선시대 관청은 차차 용도폐기 되어 잊혀져갔다. 대신에 일본인 학교, 성당, 사제관, 병원, 약방, 잡화상, 대서소, 서적상, 문구점, 지업사, 미국씽거미싱회사 제주분점 등 낯선 서구문명의 산물들이 이 일대를 장악한 새 주인들의 필요에 따라 탄생하였다.

(2) 1906년 제주성안엔 이미 일본인 학교도 등장

일본인들의 한반도 진출과 거주는 러일전쟁(1904년∼1905년) 이후부터 본격화된다. 통치, 치안, 행정공무, 시찰, 사업, 상공업 등의 명목으로 수많은 일본인들이 조선 땅을 밟기 시작했다. 조선 주재 일본인은 1905년에 4만 명이었던 것이, 1910년에는 17만 명으로 급증하고, 1944년에는 71만 명에 달했었다(군인 병력 제외). 

이 중 1905년 당시 ‘제주성내’ 재류 일본인은 총 32명(총 7가구, 남 23명, 여 7명)이었다는 기록이 있다(《조선의 보고:제주도 안내》, 1905년 발행). 이 수치는 처음엔 미미해보이지만 이후 제주성안 칠성통 주변으로 일본인 거류지를 형성할 정도로 그 수는 점차 증가한다.

1905년 당시 ‘제주성내’ 재류 일본인 총 32명 중 직업인은 총 16명으로, 직업별로 보면 관리(2명), 잡화상(2명), 해산물 중매(2명), 과자상(1명), 우편취급소(1명), 여인숙(1명), 약국(2명), 뱃사람(4명), 목수(1명)가 있었다. 그 외 16명은 여성 배우자와 자녀들에 속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제주성안 거주 일본인들은 ‘제주도(일본인) 재류민회’를 결성하여 자신들 자제들이 공부할 일본인 학교를 1906년 11월 3일에 개설한다. 당시 취학 대상 일본인 아동은 4명이었다. 이후 본 학교는 제주일본인회립소학교(1908년 1월), 제주학교조합립소학교(1911년)에 이어 제주공립심상소학교(1912년 4월), 제주공립심상고등소학교(1912년 7월)를 거처 제주공립南(미나미)국민학교(1941년 4월)로 변경되며 그 역사가 이어지다가 1945년 해방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일제강점기 본교 출신 학생들은 보통 자신들의 모교를 ‘제주南(미나미)소학교’라고 불렀다. 교명이 여러 번 바뀌면서 부르기 좋게 그들 사이에 조합한 명칭이다.

[사진1]은 1927년경 제주南소학교, 정식 명칭으로는 제주공립심상고등소학교(濟州公立尋常高等小學校) 전경이다. 현재 제주시 중앙성당 서쪽 인천문화당에서 재밋섬 건물로 이어지는 곳에 있었다. 1924년 돌담으로 학교 울타리를 치고 2개 교실 및 부속 건물을 신축하고 운동장을 확보한 당시거나 2~3년 후 촬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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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조선총독부 발행 ≪생활상태조사(其二): 제주도≫ (1929년).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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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제주南소학교 터. 해방이후 제주남초등학교, 제주신성여중고등학교로 쓰이다가 현재에 이른다. (2019년 7월 촬영 ⓒ고영자) ⓒ제주의소리

[사진1] ‘제주南소학교’는 옛 조선시대 관청인 총물당(摠物堂) 건물 터로 알려졌다. 그런데 초창기 이 일본인 학교가 처음부터 이 부지를 교사로 썼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왜냐하면 당시 제주성안엔 위 일본인 학교와 쌍벽을 이루는 조선인 학교, 즉 제주관립보통학교(공립보통→공립심상소학교→북공립국민학교, 현 제주북교)가 1907년 5월 19일에 총물당 부지에 개교, 동년 12월 화재로 교사(약30칸)가 소실되어(황성신문 1907.12.25.), 이듬해 1908년 초 객사(영주관)를 수리하여 학교 부지를 현 제주북교로 옮겼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통설에는 위 2곳 학교의 첫 교지가 총물당 터라 전하고 있으나, 그 장소 쓰임의 전후 관계나 위치 비정 또한 명확하지 않다. 거기다 1907년 12월에 총물당 건물이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하는데, 화재 이후 일본인 자제를 위한 南소학교는 어느 시점에 이곳을 교사로 신축·확장했는지 확실하지 않다.

또 한 가지 의문점은 제주북교 ‘학교연혁지원본철’에 따르면 총물당 부지 주소가 ‘삼도리 930번지’로 적혀있다. 이 주소로 보면 총물당 건물터는 현재의 인천문화당 부근이 아닌 향사당 쪽에 더 가깝다. 이에 따르면 현재 인천문화당 부근 옛 南소학교는 어쩌면 옛 총물당 자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러한 점들은 원도심의 역사 이해 차원에서 향후 더 세심하게 조사·규명할 필요가 있다.

(3) 1930년대~1945년까지 제주南소학교

위 [사진1] 제주南소학교는 1930년대 후반에 들어서 교정이 더욱 정비되었다. 교문을 통과하면 운동장 오른쪽 중간 벽에 ‘봉안전’이 있었다. 모든 학생들이 학교 등하교시엔 우선 그 앞을 가서 배례하고 입실 또는 하교하는 풍경이 펼쳐졌다. 운동장에는 체력단련을 위한 각종 운동기구들이 설치되었다. 전시체제에 대비한 기초군사훈련이나 다름없었다. 

한편 [사진2] 단층 일자(一字)형 교실 건물 동쪽에는 제국의 소년 니노미야 긴지로(二宮金次郞) 동상도 서 있었다([사진2] 빨간색 원). 등에 땔감을 잔뜩 잰 지게를 지고 손에서는 책이 떠날 줄 모르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인물은 에도시대 막말(幕末)에 실재로 존재했던 인물로 근면하고 순량한 황민의 모델로 각색되어 일본제국의 국정교과서인 수신교과서에 소개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동상’까지 세워져 황민의 표상으로 받들어졌다. ‘긴지로’ 노래도 있었다. 학생들 사이에선 '우리들의 롤모델(手本)은 니노미야 긴지로'라는 소절이 무심코 흘러나올 정도로 그는 제국의 아들, 딸들의 뇌리에 각인된 인물이었다.

ⓒ제주의소리
[사진2]1941년 제주남소학교 교정, 다케노 신이치 심상과 5년 당시. 니노미야 긴지로 동상을 배경으로 한 기념사진(ⓒ일본 오카야마현 거주 다케노 신이치 소장). ⓒ제주의소리

[사진2] 제공자는 현 오카야마현 거주 다케노 신이치(竹野新一, 1930년생, 파란색 원)氏다. 그는 1937년 4월 본교 심상과에 입학, 1942년 10월(심상과 6학년 당시)에 본국으로 귀국했다. 신이치(新一)의 조부모, 부모는 1912년에 내도하여 30여년 제주에 살았다. 그의 아버지 세이기치(1902년생)도 제주공립심상고등소학교 제6회 졸업생(1914년)으로, 성인이 되어 (주)제주통운-자동차회사에 근무하였다. 한편, 남소학교에 남은 신이치의 동기들은 1943년 3월 졸업에 졸업을 하는데 걔 중에는 조선5303부대 伊井통신부대 군속으로 들어가 종전까지 활동한 소년도 있었다. 조선인 학생들도 기초훈련을 받아 전쟁에 동원되고 전쟁터에 끌려가던 때였다.

제주南소학교는 1941년에 명칭이 제주공립南(미나미)국민학교로 바뀐다. 태평양전쟁이 본격화되던 시기였다. 학생들은 풍금 소리로 ‘B29 폭격기’ 소리를 귀에 익혔다. 만일 그 소리가 나면 방공호에 일제히 대피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다. 일본은 1941년 12월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한 뒤에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1942년 초에는 싱가포르를 함락시켰다. 이런 승전보들이(늘 일본이 이겼다는 소식) 학교 교정에 와 닿을 때마다, 교사며 학생들은 기쁨에 만세를 부르고 전율했다 한다. 그들의 환희와 희망은 1945년 8월 15일 정오 당시 일왕의 항복방송 때까지 이어졌다. 당시는 일부 조선인들조차 일본의 패망 소식에 귀를 의심할 정도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구지배 신화는 막강했다.

미군에 의한 일본 총공격이 거세질 무렵, 제주도 역시 군사작전 지역으로 변했다. 제58군 사령부(사령관 永津佐比)가 들어 온 것이다. 당시 제주도 상주인구는 약 23만 명. 갑자기 군사작전 지역으로 변하면서 7만5000명의 군인들이 제주에 투입. 생활에 문제가 생기고, 전투가 벌어졌을 때 작전 수행에 도민들이 장애가 되었다. 군부는 조선총독부와 누차 교섭하여 우선 노약자와 부녀자, 어린이들을 육지로 내보내는 소개(疏開)작전을 펼쳤다. 1945년 5월 이후 목포에서 제주로 군수물자를 실은 수송선이 육지로 돌아갈 때 이들을 태우고 간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맨 처음 소개 선박인 황화환(晃和丸)이 1945년 5월6일 횡간도 부근에서 미국기의 공격을 받아 침몰하고 수백 명이 사망하였다. 또 제주도에 소개령이 떨어진지 2개월 만인 1945년 6월 30일에는 풍영환(豊榮丸)이 조선인 및 일본인을 태우고 가다가 7월 3일 한밤중 해남 난바다에서 미군 잠수함의 공격으로 침몰하여 수백 명이 사망했다. 이 배에는 당시 제주南소학교 학동 14명과 인솔교사 1명, 가족들도 타고 있었다. 이 사건으로 100여명이 구조되고 그 중 2명의 南소학교 학동이 포함됐다. 

당시 이들을 풍영환에 싣고 보낸 제주南소학교 교장 고마쓰·고토마루(小松虎兎丸)에게는 청천벽력의 소식이었다. 사건의 경위나 희생자 수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던 오리무중의 대참사였다. 이들을 위해 학교장을 치르러했으나 곧 종전이 되었고, 제주도에 있던 일본인들도 귀국길을 서둘다 보니 제대로 된 장례식도 못 치렀다는 것이 고마쓰(小松) 교장의 후일담으로 전해진다.

1945년 일본의 패망직후 제주도 수비부대였던 제58군은 제주도청에 있던 과거 36년간의 문서를 전부 소각하고 만다. 풍영환 피해자 고마쓰 교장도 당시 군부의 지시로 南소학교 관련서류 및 학적부를 모두 소각했던 사실을 후일 그의 수기에 남기기도 했다. 이로써 제주성안 일본인 학교 제주南소학교의 역사는 말 그대로 소각되고 없어졌다. 다만, 본교 출신 귀국한 일본인들이 어른이 되어 ‘제주도회’를 결성(1977년~2001년까지 활동)하여, 일제강점기 제주도 체험과 그들의 모교인 南소학교 대한 기억의 파편을 사진, 글, 그림 등으로 남겨 단편적이나마 南소학교의 역사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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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해방 이후 1946년 1월부터 제주南소학교 학교부지는 (현)제주남초등학교 교정으로 쓰이다가 1960년 현재의 남교 부지(삼도2동 811-1)로 이전하게 된다. 이후 중앙성당 부지를 쓰던 신성여자중고등학교가 남교 부지를 매입하여 학교 규모를 확장, 1979년까지 쓰다가 도남동 교지로 이전, 과거 이앗골 총물당 주변 교학의 터전도 이로써 마감하게 되었다. / 제주기록문화연구소-하간 고영자(미학자·번역가)

“일제강점기 전쟁통에 다닌 남초등학교 고등과, 일본은 ‘공격정신’ 강조”
[인터뷰] 평생 초등교사 재직한 91세 제주교육계 원로 김순여 선생

제주에서 오랜 역사를 지닌 학교 가운데 하나인 제주 남초등학교. 이 학교의 공식 연혁에는 1946년 1월 개교한 남국민학교(현 초등학교)를 시작으로 명시했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강점기 제주시 삼도2동(현재 인천문화당) 일대에 자리 잡았던 제주공립심상소학교(濟州公立尋常小學校) 부지를 모태로 한다.

1929년생, 올해로 91세인 김순여 선생은 20대부터 평생을 제주에서 초등교사로 재직하다 정년퇴직한 교육계 원로다. 아흔을 넘기면서 거동은 부쩍 불편해졌지만 지금도 독서와 서예로 하루를 소일할 만큼 연로한 나이에도 총기를 잃지 않고 있다.  

그는 70~80년이나 지난 까마득한 시절의 남초등학교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김 선생은 당시 북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약 2년간 남국민학교 고등과를 다녔다. 일제강점기에는 소학교(국민학교) 6년을 졸업하면 중학교를 진학하거나, 아니면 국민학교의 ‘고등과’라는 별도의 교육 과정이 있었다.

누구나 궁핍했던 당시로선 중학교에 진학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특히 여학생이라면 더욱 그랬다.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에 진학할 여건이 되지 않는 학생들은 주로 이 '고등과'로 진학했다.

ⓒ제주의소리
1929년생으로 일제강점기 시절 남초등학교 고등과를 다닌 김순여 선생. ⓒ제주의소리

지금으로부터 70년도 훌쩍 지난 오랜 기억이지만, 그는 남국민학교 고등과 시절을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기억했다. 일제강점기 태평양전쟁 중 학생들을 의식화 시켰던 음악수업 시간, 소풍날 담임 선생님의 지시로 교장 선생의 옷을 지었던 기억, 그리고 일본 학생과 다른 한국 학생들에 대한 차별까지. 그래도 어린시절에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기억은 대체로 행복했다고 회고했다.  

Q. 남국민학교 고등과에 대한 기억은?
A. 당시만 해도 중학교 못가는 형편이면 고등과를 가곤 했다. 2년 동안 남국민학교 고등과를 다녔고 1945년 4월 졸업했다. 그리고 몇 달 지나지 않아 8월 해방을 맞았다. 당시 남국민학교는 고등과를 포함해 전교생이 80명 정도였다. 고등과 동기는 여자 8명, 남자 6명이다. 일본인 여자 1명을 제외하면 전부 한국인이었다. 선생은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학교에 등교하면 가장 먼저 교정 동쪽에 있는 봉안대 앞에 먼저 절하고 교실로 들어갔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갈 때도 마찬가지. 고등과 교실은 직원실 옆에 있었다. 학교에는 일본식 다다미방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예절 교육과 재봉틀 교육을 받았다. 장롱 안에는 2m쯤 되는 무기가 보관돼 있다. ‘나기나다(なぎなた, 왜장도)’로 기억한다. 긴 봉 끝에 칼이 달려있다. 체육시간이면 여자 선생이 나와서 우리를 가르쳤다. ‘허리!’, ‘머리!’, ‘얍!’하고 소리를 내면서 배웠다. 재봉틀로 옷 만드는 방법도 배웠다.

Q. 학교에서 꽤 다양한 것을 배운 것 같다.
A. 그렇다. 고등과는 완성교육으로 보면 된다. 농사, 가사, 심지어 육아교육까지 받았다. 당시만 해도 무슨 내용인지 몰랐지만 일단 배웠다. 기억나는 사연이 하나 있다. 요즘 같아서는 안 될 일이지만 고등과 여학생들 중 2명씩 선정해 수업과 수업 사이 쉬는 시간마다 교무실에서 교사들 차(茶) 시중을 들었다. 하루는 내가 당번인 날이 하필 가을 소풍날이었다. 그런데 여자 선생님이 와서 하얀 광목을 주며 와이셔츠, 블라우스를 만들라고 시켰다. 교장이 전근 가는데 마땅히 입을 옷이 없다면서 교장 사모가 요청한 것 같았다. 여자 선생이 광목천에 먼저 본은 떠놨지만, 우리는 고작 한두 번 배웠을 뿐이고 나이도 어려서 솜씨가 어땠겠느냐. 소풍도 못가고 당번인 친구랑 나랑 하루 종일 앉아서 옷을 만들었던 기억이 있다. 산수 시간에는 주산을 배웠다. 1부터 9까지 주판을 누가 가장 빨리 다루는지 순서대로 순위를 매겼다. 농사, 육아, 재봉 등등 돌이켜보면 몸으로 체득하는 기술을 많이 배웠다. 그래서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것 같다.

Q. 학교 안에 세워져 있던 니노미야 긴지로 소년 동상을 기억하나?
A. 그럼, 기억이 난다. 내 기억으로는 '면학(勉學)'을 강조하던 상징물로 학교 교사 건물 앞에 있었다. 니노미야 긴지로를 주제로 한 노래도 따라 불렀던 기억이 난다.(일부분 노래 들려줌). 아무튼 한 손에 책을 들고, 그 시절 학생들에게 열심히 학업에 임할 것을 상징하는 동상으로 기억한다. 

Q.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일제강점기에 전쟁 중이었는데, 이와 관련된 기억은 있는지?
A. 물론 있다. 북국민학교 다닐 때는 ‘대동아전쟁’이라고 강조했었다. 용담동 정뜨르 비행장(현 제주국제공항) 활주로를 만들기 위해 가로 세로 30cm 잔디를 몇 장씩 캐오라고 숙제를 시켰다. 이후 고등과에서도 전쟁 분위기를 계속 들려줬다. 일본 선생들이 ‘지금은 전시(戰時)라 건강해야 한다. 체력이 중요하다’면서 마른 수건으로 2시간 동안 몸을 문질렀다.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피부를 단련한다는 이유다. 여름방학이면 햇빛을 많이 받아 까맣게 타면 상을 주겠다고 말했다. 같은 이유다. 언젠가는 학급마다 하얀 고무공이 몇 개 씩 주어졌다. 일본군이 남쪽 나라를 함락·점령했고 그 나라들에 고무가 많아서 고무공을 선물해준다는 식이었다. 전쟁 노래도 여러 가지 배웠다. 그 노래마다 일본의 침략정신과 공격정신을 강조했다. 그런데 선생들은 “우리나라(일본)가 이긴다”는 말만 하고 자세한 전황은 들려주지 않았다. 불리한 이야기는 절대 안했다. 음악 시간에는 선생이 풍금으로 화음을 누르며 특정한 소리를 익히라고 강조한다. 왜냐면 그 소리가 미군 B-29(폭격기) 비행 소리와 같으니 하늘에서 들리면 방공호로 피신하라고 말했다. 전시 때라 그런지 체력 단련도 상당히 강조했다. 체육시간이면 운동장을 돌면서 각종 기구를 오르내렸다. 3m 기둥에 올라가고 정글짐 같은 기구들을 타면서 민첩하게 움직이도록 훈련시켰다. 철봉은 발을 올려서 거꾸로 올라갔다. (그림을 그리며 과정마다 설명.) 입학시험에는 턱걸이도 있었다. 
 
Q. 일본인과의 마찰이나, 차별은 있었나?
A. 당시만 해도 제주시 칠성통(칠성로)에 일본인들이 많이 살면서 장사를 했다. 학교 있을 때는 일본인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았고 크게 상관도 하지 않았다. 다만, 돌이켜봐도 지금이나 예전이나 일본인이 한국 사람을 차별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등과 시절에도 일본인 교사가 한국인 급사를 부를 땐 친절한 목소리 없이 굉장히 사납게 우리말로 치면 ‘야, 급사!’라고 외쳤다. 오사카에서 공부하다 온 친구에게 들은 일도 있다. 일본 현지에서 학생들이 신사참배를 가기 위해 행진을 하는데, 아이들 발걸음이 느리자 선생이 ‘조센징 같이 걸음 상태가 이상하다’고 욕을 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에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어떻게 여기는지 미뤄 짐작할 수 있었다. 남국민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제주여자중학교, 교원양성소를 거쳐 1948년 8월 애월국민학교 교사로 첫 발령을 받았다. 4.3이 막 발발한 해였다. 당시에는 미군정청이 발령을 냈다. 그 뒤로 평생을 초등학교 교사로 살아왔다. 동창인 어린 시절 친구들과 소식을 나누고 싶어도 이제는 상당수가 세상을 떠났다. 어린 시절, 남국민학교가 있던 지금의 천주교 중앙성당 주변의 제주 원도심 거리 풍경이 또렷이 기억나는데 옛 친구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나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 내 사연이 도움이 됐는지 모르겠다. / 인터뷰 = 한형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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