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섬 숨, 쉼] 예쁜 엄마와 딸의 뒷모습을 보며

두 달여 전부터 일을 마치면 별도봉과 사라봉을 걷고 있다. 별도봉을 내려와 사라봉을 오를 때면 양 옆으로 늘어선 나무들 사이로 조용히 어둠이 내려온다. 길게 늘어지기 시작하는 그림자에 기척 없이 한 점 한 점 어둠이 입혀지면서 한낮의 땡볕을 견딘 바람이 날아다니기 시작한다. 숨차고 땀으로 범벅된 몸이 한결 편안해지는 순간이다. 별도봉 오르막 계단을 잘 오르고 온 내게는 그 한줄기 바람이 선물이다.

그날도 바람 선물을 만끽하며 사라봉을 오르고 있는데 한 여자아이가 눈에 띄었다. 많이 어두워져서 주변 사위 분간이 어려웠지만 앳된 꼬마아이 같았다. 손으로 바짝 감싸 안은 무릎 사이로 머리를 떨어뜨리어 주저앉아 있었다. 왜 저러지 궁금할 틈도 없이 장면은 다음으로 전환.

“언니는 좀 생각을 해야 해. 이 세상은 혼자 아니라 같이 사는 거야. 물을 나눠 마실 수도 있지.”

난 주저앉은 아이의 엄마가 하는 그 말이 너무 좋았다. 세상이 각박해지면서 언제부턴가 많은 엄마들이 아이들에게 우선 ‘너부터 챙겨’라고 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물론 상황이 다르기에 어떤 것이 옳다 그르다 할 일은 아니다. 어찌되었건 난 그 엄마 입에서 나온 ‘물을 나눠 마실 수도 있지’라는 말이 참 듣기 좋았다.

사라봉을 내려와 지압 길을 걷는데 아까 그 자매와 엄마를 다시 만났다. 이번에는 동생이 엄마에게 조르고 있었다. 

“엄마, 나 저기 걸을래.” 엄마가 잠깐 멈칫했다가 “그래, 걸어”한다. 신나게 신발을 벗고 자박자박 지압 길을 걷는 동생의 뒷모습을 조용조용 따라가며 난 갑자기 눈물이 났다.

나는 왜 저러지 못했을까, 우리 아이들이 저 언니와 동생처럼 어렸을 때 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애들이 자꾸 멈춰서고 쳐다볼 때마다 한결같이 이렇게 말했다. 

“다음에.”

‘다음에, 다음에’라고 말했지만 즉시 못한 일을 다음에 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동생이 엄마에게 지압 길을 걷자고 했을 때 엄마가 잠깐 멈칫한 순간을 나는 너무나 이해한다. 아마도 그때 그 엄마의 머릿속은 지금 집에 돌아가서 해야 할 일로 가득했을 것이다. 그 일을 빨리 마무리해야 엄마는 비로소 잠자리에 들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그랬으니까. 그래서 당시 나는 조금이라도 빨리 일을 마칠 생각으로 ‘다음에, 다음에’라고 말했던 것이다. 

별도봉을 내려오는 길. 숨차게 오르막을 올라 정사에서 한 숨 쉬고 이 길을 내려올 때는 콧노래가 절로 난다. 제공=홍경희. ⓒ제주의소리
별도봉을 내려오는 길. 숨차게 오르막을 올라 정상에서 한 숨 쉬고 이 길을 내려올 때는 콧노래가 절로 난다. 제공=홍경희. ⓒ제주의소리

지금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도 저 엄마처럼 ‘그래 해’라고 할 것이다. 일이 조금 밀리면 밀린 대로 내버려두고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것이다. 요즘 내가 일하는 젊은 후배들에게 꼭 해주는 얘기가 있다. 애들 전화 오면 ‘엄마 일하니까 나중에 전화해’하지 말고 이 세상에서 가장 한가한 사람처럼 편안하게 전화 받으라고. 정말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꼭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니까.

사라봉 오르는 길에서는 어두워 잘 안보였는데 지압 길에서는 가로등 빛이 밝아 두 자매가 같은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것이 잘 보였다. 엄마의 양손을 하나씩 꼭 잡고 팔랑 팔랑 뛰어가는 자매가 보기 좋았다.

그래, 딸들아. 너희들이 커서 다시 딸 아들을 키울 때쯤이면 엄마, 아빠가 함께 하는 육아가 자리 잡기를 빈다. 예쁜 딸들아, 그래서 고민하지 않고 함께 아이들의 말에 귀기울여주는 엄마가 되길 빌게. / 홍경희 제주교재사 대표 ( http://jejubooks.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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