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에 묻혔던 제주독립영웅] 제74주년 광복절, 야학 항일교육 펼쳤던 배두봉 선생에 '건국포장'

배두봉 선생의 아들 광흠씨가 간직하고 있는 당시 동아일보 신문 기사. 당시 기사에 하귀야학회사건이 보도됐다.

1930년대 제주시 애월읍 하귀리에서 학생들에게 식민지 수탈의 실상을 알리는 등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던 독립운동가 배두봉(裵斗奉·1914~1948·호적명 배창아) 선생. 그동안 제주4.3 희생자라는 이유 등으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던 배두봉 선생이 고인이 된지 71년만에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로로 '건국포장'을 받게 돼 그의 항일정신이 드디어 빛을 본다. 

 
정부는 제74주년 광복절을 앞둬 12일 독립운동가 배두봉 선생에 건국포장을 포상했다. 국가보훈처는 독립유공자 신청인인 배두봉 선생의 자녀 배광흠(72)씨 등에게 12일 이같은 소식을 알렸다.
 
▲ 일본서 한국 노동자 집단해고에 반발 노동운동 '옥고' 치러 
 
  배두봉 선생의 생전 모습. 유족이 갖고 있는 단 2장의 사진 중 한 장이다.

배두봉 선생은 친척이 운영하던 칠성통 포목점에서 총무로 일했다. 당시 영어와 일본어, 중국어까지 소화했던 지식인 배두봉 선생은 일본과 중국을 오가며 물건을 유통하는 역할까지 도맡았다.

 
일본을 오가던 배두봉 선생은 일본에서 노동운동 배후자로 지목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6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32년 일본 오사카 한 방직공장에서 한국인 직원 36명이 해고당하자, 이에 반발한 직원들은 노동조건 개선 등을 요구하면서 파업 투쟁을 이어갔고, 농성이 계속되자 일본 경찰은 노동자 30여명을 검거했다.
 
일본경찰은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이하 전협)에서 활동하던 배두봉 선생을 파업 사건의 배후로 지목했다.
 
검거된 배두봉 선생은 오사카 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 하귀리 야학 세워 항일 의식교육 앞장서다 '체포'
 
배두봉 선생은 귀국 후 1933년 8월 고향인 애월읍 하귀리에 야학을 만들었다. 
 
배두봉 선생은 수십명에 달하는 학생들에게 일본의 식민지 수탈 실상과 함께 독립의 필요성을 가르쳤다.
 
배두봉 선생은 항일 의식에 고취된 학생들과 함께 1935년 5월5일 어린이날 항일 시위를 벌였다. 이른바 ‘하귀야학회사건’.
 
배두봉 선생은 이 사건으로 강문일·박영순·김홍규·김을봉 선생과 함께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일본 경찰에 검거됐다.
 
배두봉 선생은 김을봉 선생과 함께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고, 강문일·박영순 선생 등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았다.
 
이 사건은 1935년 8월27일자 동아일보에도 실렸다.
 
당시 동아일보는 ‘제주도적색사건(濟州島赤色事件)’ 제목의 기사를 통해 “제주도에서 공산주의사상과 동지 획득을 목적으로 야학회를 설립하고, 남녀학생 80여명 지도교양하는 일방교육후원회를 조직했다는 사건으로, 지난 5월 검거된 전협계 인물인 배두봉…(중략), 배두봉, 김을봉 2명은 기소유예 됐다고 한다”고 기술했다.
 
배두봉 선생은 일제 강점기 제자를 양성하면서 항일 정신과 독립의 필요성을 알렸던 당대 지식인이자 독립운동가다.
 
배두봉 선생의 생전 모습. 유족이 갖고 있는 단 2장의 사진 중 한 장이다.

▲ 제주4.3에 묻힌 독립유공

 
제주4.3은 ‘1947년 3월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3일에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1947년 3월1일 관덕정에서 기마경찰이 타고 있던 말에 어린아이가 치였다. 경찰이 아무런 조치 없이 빠져나가려 하자 일부 군중들은 돌멩이를 던지는 등 항의했다. 이에 경찰은 군중에게 발포했다. 6명이 숨지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배두봉 선생도 이날 경찰에게 격렬히 항의하던 군중 안에 있었고, 이 때문에 미군정 포고령 제2회 및 법령 19호 위반 혐의로 징역 8월을 선고받아 또 옥고를 치른다. 그 뒤 1948년 11월 출소했다. 
 
배두봉 선생이 출소하던 시기는 제9연대장 송요찬의 포고령에 따라 중산간지대 민간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진압작전이 전개됐던 상황이다. 
 
1948년 11월17일에는 제주에 계엄령이 선포됐고, 같은 해 12월31일까지 제9연대는 중산간마을 주민들이 유격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했다며,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벌였다.
 
1948년 10월부터 군·경은 1947년 3월1일 당시 사건과 관련돼 시위·파업 가담 경력이 있는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했다.
 
그해 12월 배두봉 선생은 집에서 바둑을 두다 당시 제9연대 본부가 주둔했던 제주농업학교에 끌려갔다. 농업학교에는 배두봉 선생을 비롯해 현경호(초대 제주중 교장), 김원중(제주북교, 제주남교 교장 역임), 이상희(서울신문 지국장), 현두황(제주중 교사, 현경호의 아들) 등 제주 지식인들이 함께 검거돼 왔다. 
 
9연대는 제2연대와 교체로 제주를 떠나게 되자 수감자들을 총살했다. 배두봉 선생 등 지식인 6명은 ‘박성내 말방앗간 총살사건’으로 목숨을 잃었다. 박성내는 현 제주여자고등학교 인근 냇가다.
 

9연대는 총살한 뒤 시체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질러 그 흔적조차 찾지 못하게 했다. 유족들은 아직도 배두봉 선생의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했다.

광흠씨가 아버지(배두봉 선생)와 어머니(문군석) 영정 사진을 앞에 두고 아버지의 독립유공자 선정을 기뻐하고 있다.

12일 [제주의소리]와 만난 배두봉 선생의 아들 배광흠(72)씨는 “4.3과 연관됐다는 이유로 1994년, 1998년, 2007년 독립유공자에서 번번이 탈락해 사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정권이 바뀌면서 대대적으로 독립유공자를 발굴한다는 얘기를 듣고,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신청했다. 선정됐다는 얘기를 듣고, 그저 기뻤다. 2007년 아버지가 독립유공자에서 탈락하고 2년 뒤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평소 아버지 얘기를 자주 해주던 어머니가 하늘에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4.3 광풍 학살의 희생자이지만 '4.3에 희생됐다'는 이유로 그동안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던 배두봉 선생의 항일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이 결국 고인이 된지 71년 만에 빛을 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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