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섬 숨, 쉼] 새 집은 텅 빈 여유로 채워주라

냉장고 안을 정리하기로 했다. 이것저것 마구잡이로 넣다보니 칸칸이 그릇들로 가득 찬 모습이 부담스러워서다. 사실 더 현실적인 이유는 반찬 하나를 꺼내고 집어넣을 때마다 공간 확보를 위해 요리저리 그릇 옮기기가 번거로워서이다. 날마다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그릇 퍼즐 맞추기가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정리에 앞서 굳게 결심했다. 이번에는 확실히 버릴 것은 버리자.
 
냉장실 안쪽 깊숙이 있던 두릅장아찌를 꺼냈다. 산에서 나는 온갖 먹을 것을 즐겨 캐던 선배가 어느 날 툭 던져두고 간 두릅. 비닐 한가득 채운 두릅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온 나는 장아찌를 담았다. 먹고 먹어도 장아찌는 조금 남았지만 두릅을 건네주었던 선배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 잠깐 망설이다 다시 냉장고 안으로 집어넣는다. 

유리병 안에 담겨있던 딸기잼은 과감히 버렸다. 작년 봄의 끝자락에 노지딸기 한 상자를 샀다. 아주 충동적으로 샀다. 당시 많이 불편한 일이 있어 화가 잔뜩 난 상태에서 딸기를 샀다. 
돌아와서 딸기를 씻고 으깨며 나의 분노와 화를 같이 으깼다. 잼을 만드는 과정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지만 감정이 실려서인지 맛이 너무 없었다. 당연히 맛없는 딸기잼은 냉장고에서 존재감을 잃었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가능한 결정을 하지말자는 결심을 다시 하며 딸기잼은 버렸다.

해마다 봄이면 엄마가 유리통 가득 담아준 무말랭이와 마늘장아찌. 한겨울을 품은 무를 잘 말린 무말랭이와 새 봄의 싱싱함이 가득한 풋마늘이 기분 좋게 만난 장아찌는 이제 유리통의 바닥에 납작 누워있었다. 요건 작은 유리병에 옮겨 담았다. 냉동실도 정리했다. 언젠가는 먹으리라 생각해 잘 보관해두었던 여러 가지 식재료들을 정리했다. 이렇게 저렇게 정리하니 냉장실과 냉동실 모두 절반의 여유 공간을 확보했다. 

작고 예쁜 동네 찻집에서 즐기는 커피 한 잔. 버리고 비워 한결 홀가분해진 몸과 마음이 커피 한 잔과 만나니 그곳에 행복이 있었다. 제공=홍경희. ⓒ제주의소리
작고 예쁜 동네 찻집에서 즐기는 커피 한 잔. 버리고 비워 한결 홀가분해진 몸과 마음이 커피 한 잔과 만나니 그곳에 행복이 있었다. 제공=홍경희. ⓒ제주의소리

아빠가 살아생전 가끔 내게 하던 말이 있다. 

“넌 꼭 외할망 닮앙 뭐 버리지를 못해. 이것저것 다 모앙 뭐 헐꺼라.”

그렇다. 난 정말 뭐든지 잘 버리지를 못했다.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고향에 내려올 때 내가 싸들고 온 책들을 보고 기겁하던 아빠의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대학시절 교재는 물론 
당시 헌 책방에서 구매했던 철 지난 잡지, 미술 도록 세트까지 먼지 가득인 책이 잔뜩 있었으니 말이다. 몇 년 전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 올 때도 이삿짐센터 직원으로부터 한소리 들었다. 이 많은 짐들을 다 어찌 모시고 살았느냐고. 

이제는 버리고 비우려 애쓴다. 비워놓고 다시 채울 때는 몇 번이고 나에게 물어본다. 이게 정말 꼭 필요해? 반백년 삶을 살고 나서야 겨우 깨달았다. 넘쳐나게 물건들을 잔뜩 안고 있는 것이 풍요가 아니라는 것을. 정리되지 않은 물건들이 넘쳐날 때 정작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꼭꼭 숨어버린다는 것을. 그래서 이제는 버리고 비우기로 굳게 결심한 것이다. 그리고 꼭 필요한 것만 조금씩 사기로 하고 아직까지는 잘 지키고 있다. 앞으로도 잘 지켰으면 좋겠다.

그래도 소소한 집착은 버리지 못해 정리한 물건을 버리며 혼자 노래 부른다.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근데 두껍아, 새 집은 텅 빈 여유로 채워주라. / 홍경희 제주교재사 대표 ( http://jejubooks.com )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