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적 인간] 31. 여행자(A Brand New Life), 우리 르콩트, 2009

영화 ‘여행자’ 증 한 장면(자료=네이버 영화)
영화 ‘여행자’ 중 한 장면(자료=네이버 영화)

우리는 종종 삶을 여행에 비유한다. 이 비유는 낡은 비유이지만 이보다 적절한 비유도 흔하지 않다. 수월한 선택은 별로인 경우가 많지만 이번 생은 이렇게 흘러가는 걸. 이 여행의 출발지는 어디인가. 모든 여행이 그러하듯 우리는 이 여행의 출발지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 여행의 종착지는 집이다. 추석, 설날이면 우리는 집으로 간다. 우리 여행이 시작된 곳, 그곳으로 간다. 그렇다고 다 집으로 갈 수 있는 건 아니다. 한영애의 노래 ‘완행열차’를 흥얼거리고 싶지만 장필순의 노래 ‘방랑자’가 귓가에 맴도는 삶이라니.

추석 전날. 아내와 함께 심야로 영화를 봤다. 이 코너에 글을 쓰기 위해 봤으나 감흥이 그다지 없었다. 난감한 마음으로 집으로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렀다. 스무 살 조카가 알바를 하고 있는 곳이다. 조카는 밤 편의점에서 무슨 생각을 할까. 바나나우유를 두 개 사서 하나는 조카에게 주고 하나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바나나우유를 들이켜며 무심코 옆을 돌아보니 편의점 앞에 조카랑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한 청년이 쭈그려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무슨 사연이 있기에 추석 전날 저렇게 취해서 집으로 가지 못하고 있나.

“속편 치고 괜찮은 영화는 없어.”

나는 짐짓 영화로 관심을 돌리려고 아내에게 말했지만 자꾸만 술에 취한 그 청년이 떠올랐다. 그때 떠오르는 영화 한 편이 있었다. ‘여행자’. 이러면 그 청년에게 고마워해야 하나. 이 영화의 감독 우니 르콩트는 한국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 프랑스로 입양됐다. 자전적 영화인 셈인데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영화와 자신의 삶은 구분 지어 달라고 기자에게 당부를 했다. 그 말마저 쓸쓸하다.

특이한 점은 아니지만, 눈에 띄는 점은 이 영화의 제작자가 이창동 감독이다. 그는 ‘여행자’ 이후 몇 년 뒤 정주리 감독의 영화 ‘도희야’를 제작한다. 둘 다 여성 감독이고, 둘 다 배우 김새론 주연이다, 좋은 제작자 혹은 감독은 배우를 성장 시킨다. 김새론은 성장하고, 내 인생은 뭐 이러냐. 이창동 감독이 ‘버닝’ 이후의 영화를 상영할 때까지 나는 이 코너를 이어갈 수 있을까.

기타를 치는 조카는 편의점에서 ‘오아시스’의 노래를 들으며 내일을 꿈꾸고 있을까. 편의점 앞에 쭈그리고 앉아있던 청년은 집으로 잘 들어갔을까. 삶은 추석 특선 영화처럼 한때 잘 나갔으나 이제는 허풍이 되어버리는 것인가, 브라운관 속의 배우는 스크린으로 봤을 때보다 의기소침해 보인다.

내가 잡은 패는 개패이고, 뻥카를 날릴 배짱이 없다. 이 여행이 끝나면 조명이 켜진다. 짙은 감흥도 없이 끝나는 여행만은 아니길. “풍성하고 행복한 한가위 보내세요.”라는 정치인의 형식적인 말을 걷어차고 싶은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길 바라며. 이렇게 글을 끝내면 추석 분위기 나지도 않는 글일 될 텐데, 이 코너 담당자 한형진 기자에게 미안해지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