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섬 숨, 쉼] 손과 발, 마음도 편안하게

그런 시절도 있었다. 내가 십대 이십대였던 시절. 지금으로부터 삼사십여 년 전이니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거의 호랑이 담배 피는 시절쯤 되려나. 아무튼 그 시절 내가 버스를 타는 기준은 최소 용담로터리에서 중앙로터리 정도는 지나야 하는 것이었다. 당시 용담로터리가 아니라 제주차부라 불렀던 정류장에서 중앙로까지는 금세 걸어갈 수 있는 거리. 그 거리 정도는 지나야 버스요금이 아깝지 않았다.

요즘은 버스가 몸통에 크게 노선 번호를 새기고 다니지만 그때는 출발지와 종착지를 보고 버스를 탔다. 중앙로를 기준으로 서쪽은 하귀 동쪽은 삼양 한라산 쪽으로는 광양, 조금 더 가면 제주대학교 정도만 알아도 버스 타는 데 큰 불편은 없었다. 버스 시간표가 있었지만 굳이 맞춰 나가지 않고 그냥 정류장에서 기다리다 버스가 오면 타고, 버스가 사람들로 가득차면 다음 버스를 탔다.

이제 도로는 차들로 넘쳐난다. 한 집에 자가용 한 대가 아니라 두 대, 세 대인 집도 많다. 차량 운행도, 차를 세우는 일도 점점 전쟁이 되고 있다. 나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자가 차량 운전자가 된지 꽤 되었다. 내가 처음 운전대를 잡을 때만 해도 여러 가지 편리한 점이 많았다. 편하게 빨리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고 이런 저런 짐들도 실을 수 있어 돌아다니며 영업하는 나에게는 마냥 고마운 친구였다. 그런데 요즘은 차를 두고 버스를 타는 일이 종종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차량 운전이 주었던 편리함을 버스가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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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안의 컴퓨터 핸드폰을 잠시 내려놓고 버스를 타고 가는 순간만이라도 세상을 구경하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즐거운 일이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우리 집에서 가까운 여고사거리 버스 정류장에서 중앙로까지는 버스 전용차선이 있기 때문에 출퇴근 시간에는 버스 타는 게 빠르다. 내려서 주차 걱정할 필요도 없다. 아주 무거운 짐 아니면 큰 가방을 이용하면 된다. 그리고 일단 핸들을 잡으면 손발에 힘이 가고 마음을 온전히 놓지 못하는데 버스를 타면 손과 발, 마음이 편안하다. 그러면 창 밖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앞만 보고 갈 때는 미처 보이지 않았던 길들의 풍경이 생각보다 재미있게 다가온다. 또 사람들 구경도 재미있다. 버스에 탄 사람, 창밖을 통해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이런 저런 상상을 해보는 것도 참 재미있다. 

어, 저기 저 건물, 다시 공사 시작하나. 몇 년 째 짓다 말다 하더니, 무슨 사연이 있었던 걸까. 어머, 저기 할머니 봐. 유모차를 주차시키네. 저렇게 곱게 차려입으시고 어디 가시는 거야. 아 버스 타시려고 유모차 놓고 오시는 구나. 저 할머니도 한때는 유모차 없이도 성큼성큼 걷던 시절이 있었겠지. 뭐야, 또 생긴 거야. 올해 흑당 버블티가 유행이라더니 참 많이도 생긴다. 에구, 저 아이들은 뭐가 좋아 저렇게 깔깔거리는 걸까, 웃음소리에 근심 걱정 다 날아가겠네. 역시 버스를 타면 가로수 구경을 빼놓을 수 없지. 오래된 나무들을 보는 것은 언제나 즐거워.

내 손안의 컴퓨터 핸드폰을 잠시 내려놓고 버스를 타고 가는 순간만이라도 세상을 구경하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즐거운 일이다. 물론 지금 나의 상황으로서는 버스를 타는 일이 다반사가 아니라 이벤트다. 그래도 때가되면 차를 놓고 버스만 타고 다녀야겠다는 생각은 자주 한다. 그때를 위해 걷는 일이 힘들지 않도록, 버스 기다리며 초조하지 않게 여유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도록, 전보다 훨씬 복잡해진 버스 노선을 수시로 배우고 익혀 필요할 때 잘 써먹을 수 있도록 미리 미리 준비하고 있다. 그 때가 생각보다 빨리 올지, 늦어질지 모르지만 준비는 지금부터 하고 있다.

사족 : 이 글은 지난 9월11일 김성진 기자의 <버스 타는 재미, 그리고 준공영제>라는 글을 보고 내 마음대로 이어서 써보았습니다. / 홍경희 제주교재사 대표 ( http://jejubooks.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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