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제주시 뮤지컬 아카데미 '청 이야기'

'제주시 뮤지컬 아카데미’에 대한 기대는 애초 엇갈린 편이었다. 

뮤지컬 아카데미는 제주시가 야심차게 만든 창작 뮤지컬 <만덕>의 연계 사업이다. <만덕>에 출연할 제주 배우를 양성한다는 목적으로 지난해 시작했다. 이런 취지는 반대로 생각해보면 제주에 뮤지컬 예술의 기반이 사실상 전무하다는 지적과 이어진다. 

‘극 예술’ 안에서 제주 지역 연극, 오페라 그리고 뮤지컬의 사정은 사뭇 다른 차이를 보인다. 연극은 민간 극단과 협회가 존재하고 제주국제대학교 공연예술학과라는 고등 교육 과정도 생겼다. 오페라는 사정이 한결 낫다. 유서 깊은 제주대학교 음악학부에 공립 합창단도 두 개나 운영 중이다. 

이에 반해 뮤지컬은 여러모로 열악하다. 최근 들어 소수의 시도가 이뤄지고 있어 지켜봐야 할 일이지만, 전문적인 극단·기획사는 전무하고 협회·대학·공립 예술단도 마찬가지다.

물론 제주 극단들이 종종 시도하지만 관객을 만족시킬 만 한 뮤지컬은 많다고 보기 어렵다. (불확실한 사견을 전제로) 지난 몇 년을 돌이켜보면, 제주 극단에서는 가람의 <낮술>과 예술공간 오이의 <우연가동>, 기획 공연은 서귀포관악단원 김경택이 중심이 된 <손색시>와 제주도 천주교구의 <최정숙-동 텃저, 혼저 글라> 정도가 고심한 흔적이 느껴지는 작품으로 남는다. 시도는 좋았으나 아쉬운 작품도 여럿이다. 

기반이 없는데 행정이 끌고가는 여건에서 제주시의 <만덕>, 또 뮤지컬 아카데미가 기대만큼 우려가 높은 건 어쩌면 당연하다. 

사업 2년차를 맞는 현 시점에서 <만덕>은 주연 구성을 비롯해 여러 면에서 변화를 시도하며 지속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올해 열린 제13회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에 참여해 심사위원상, 남우주연상, 아성크리에이터상(음악상)을 수상한 바 있다. 동시에 뮤지컬 아카데미는 마땅한 결과를 도출하지 못한 채 1기가 끝난 뒤, 올해 4월 13일부터 2기 일정을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10월 20일 오후 1시와 5시, 제주시 탑동해변공연장 소극장에서 가진 결과 발표회 <청 이야기>로 끝을 맺었다.

부끄럽지만 솔직하게 고백하건데, 뮤지컬 아카데미에 대해 큰 관심을 두지 않았기에 <청 이야기>에 대한 기대는 ‘물음표’ 이하 이상도 아니었다. 그러나 러닝타임 1시간30분이 끝난 뒤 물음표는 또렷한 ‘느낌표’로 변해있었다.

지난 20일 열린 제주시 뮤지컬 아카데미 공연 '청 이야기' 무대 인사 모습. ⓒ제주의소리
지난 20일 열린 제주시 뮤지컬 아카데미 공연 '청 이야기' 무대 인사 모습. ⓒ제주의소리

# 규모 무관, 온전한 뮤지컬 작품 완성하다

제주시 뮤지컬 아카데미 <청 이야기>는 (재)서울예술단이 2009년 11월 14일부터 22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초연한 창작뮤지컬 <청 이야기>를 압축 요약했다. 참고로 2009년 작품은 1997년 서울 예술단의 <심청>을 재창작한 것이다. 

이번 <청 이야기>는 아카데미 최종 수료자 14명이 출연했기에 규모는 본 공연과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줄거리와 주요 배역, 노래는 2009년과 동일하다. 2시간 분량을 소극장에 맞게 1시간 30분으로 줄였지만 작품 이해는 크게 문제없도록 조정한 ‘드라마틱 콘서트’라고 부를 수 있다.

줄거리는 국내 전통 소설 <심청전>을 바탕으로 왕실의 권력 암투라는 소재를 추가했다. 

왕자 희원(배우 고한성)은 병세가 위독한 아버지(허진무)를 만나기 위해 시급히 뱃길을 떠나야 하지만, 물살이 거센 인당수가 앞길을 가로막는다. 결국 처녀를 제물로 바쳐야 하는 악습에 따라 청이(김진선, 강제원)가 인당수에 빠지고 만다. 이후 왕위에 오르고 싶은 숙부 광년대군(남석민)은 왕을 시해하고 희원과 충돌한다. 반란을 진압한 희원이 광년대군을 처단하려 하지만 살아남은 청이가 만류하고, 왕자 희원은 사랑하는 청이와 이별한 채 왕위를 계승한다. 청이의 아버지 심봉사(박상호)는 자식을 팔아넘겼다는 죄책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안타깝게도 부녀 상봉은 이뤄지지 않는다. 

<청 이야기>는 왕실이라는 최고 권력 기관의 내부 갈등과 선한 성품이지만 다소 유약한 왕자의 성장이란 새로운 설정을 덧붙였다. 덕분에 심청이가 흐름을 이끌어가는 원작과 달리, 선 굵은 남성 배역으로 한층 묵직한 서사를 갖췄다. 음악은 대중적인 감각을 충족하면서 풍부한 곡 구성과 친숙한 대사로 듣는 재미를 선사했다.

2009년 <청 이야기>를 공연한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은 1563석을 보유한 대극장이다. 제주시 뮤지컬 아카데미 공연이 열린 탑동해변공연장 소극장은 50석 내외다. 당연히 무대 세트부터 배우 동선까지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작은 공간 안에서 배우들은 몸에 착용하는 무선 마이크 대신 고정 마이크 다섯 개를 세워 사용했다. 배우들이 대기하는 여건도 충분하지 않아 무대 좌우 양끝과 뒤쪽에 앉았다. 이런 무대가 처음에는 낯설게 다가왔지만, 그 안에서 배우들의 진지한 연기, 짜임새 있게 연출한 안무와 동선은 점차 어색함을 없애고 무대를 집중시켰다.

무엇보다 노래 연기가 중심인 ‘뮤지컬’에 충실했냐는 물음에 뮤지컬 아카데미 과정을 마친 이은결, 강제원, 고한성, 남석민, 홍한별, 고수연, 감초연, 김정승, 김진선, 박상호, 고가영, 김금희, 고종희, 강수미는 실력으로 응답했다.

노래 연기는 앞서 언급한 제주 극단들의 뮤지컬, 기획 공연과 비교해도 관객 입장에서 볼 때 손색이 없을 만큼 깊은 인상을 줬다. 보조강사 허진무를 비롯해 고한성, 고종희, 남석민 등 남성 출연진의 노래 연기는 개인뿐만 아니라 함께 모일 때 더욱 빛났다. 주인공 청이를 함께 연기한 김진선·강제원은 다른 느낌의 목소리를 조화롭게 유지하면서 본인의 강점을 뽐냈다. 한 장면 뿐이지만 덕이 엄마를 연기한 고수연의 호소력 짙은 노래도 기억에 남는다.

화음이 3명, 5명, 그 이상 더해져도 크게 흔들리지 않으면서 노래가 끝날 때마다 관객들의 박수가 이어졌다. 2009년 <청 이야기>는 2막 동안 44곡이 등장할 만큼 노래에 방점이 찍혔다. 당시 자료에서는 이런 방식을 'Song-Through'라고 소개했다. 이번 제주시 공연은 비록 30분 가량 분량이 줄었지만 이런 기조를 충분히 따라갔는데, 배우 개개인마다 조금씩 역량의 차이는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도 힘을 크게 잃지 않는 목소리에 놀랐다.  

무대 배경에는 2009년 공연 영상을 띄웠다. 영상 속 배우와 무대 배우의 노래가 정확하게 일치하고, 좁은 무대 안에서 마이크와 마이크 사이를 빠르게 이동하는 연기 속에 노래 타이밍도 지키는 모습을 보며 제작진과 배우들이 얼마나 밀도 있게 준비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긴장 때문인지 격정적인 극 분위기 때문인지 잔뜩 실린 힘이 종종 느껴지기도 했지만, 작은 무대가 점차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재미를 선사했다.  

두 명의 청이 역할을 극에 어울리게 신경써서 분리하는 노력과 인당수 장면 등은 설사 본 공연과 차이나는 무대라도 주어진 상황에 맞게 작품성을 지키려는 제작진의 섬세한 수고를 느낄 수 있어 관객 입장에서 무척 반가웠다. 이는 강사 중 한 명인 이종석 서경대학교 뮤지컬학과 조교수가 2009년 <청 이야기>를 연출했고, 서경대 뮤지컬학과가 여러 번 이 작품을 무대에 올렸기에 보다 수월했으리라고 본다.

공연이 끝난 뒤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관객들에게 인사하는 배우들의 표정 속에는 무대 크기, 객석 숫자, 출연진과 무관하게 당당하게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뮤지컬 작품’을 선보였다는 만족감이 묻어났다. 기자 역시 관객의 한 사람으로 비슷한 감정을 공유했다.

# 결과 만큼 빛난 과정...다음을 기대하게 만든다

공연을 끝까지 보고나니 자연스레 ‘과정’이란 단어가 머릿속을 스쳐갔다. 이 정도의 무대를 올리려면 공 들인 수고와 짧지 않은 정성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공연을 본 누구라도 느낄 수 있었다. 

제주시는 지난 4월 13일부터 10월 22일까지 뮤지컬 아카데미를 운영했다. 강사는 1기 그대로 이종석(서경대학교 뮤지컬학과 조교수), 최병규(안무가·서울예술단 지도위원), 이유진(뮤지컬 배우)이 참여했다. 이들은 순서대로 연출·연기지도, 안무, 음악지도를 맡았다. 참여 대상을 명확하게 정하지 않은 1기의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2기 때는 강사진이 오디션 방식으로 배우를 선발했다. 7개월 간 강사 세 명이 매주 한 번씩 돌아가며 제주를 찾았고, 이론·기초부터 탄탄하게 밟아 실제 무대까지 완성하는 정식 교육 과정이었다.  

제주시 뮤지컬 아카데미 2기의 교육 과정. 제공=남석민. ⓒ제주의소리
제주시 뮤지컬 아카데미 2기의 교육 과정. 제공=남석민. ⓒ제주의소리
제주시 뮤지컬 아카데미 2기의 교육 과정. 제공=남석민. ⓒ제주의소리
제주시 뮤지컬 아카데미 2기생들이 모여 연습을 하고 있다. 제공=남석민. ⓒ제주의소리

정해진 강의 시간은 토·일요일 각각 다섯 시간. 하지만 여기에 그치지 않고 주중 한 차례 씩 배우들이 모여 자체 연습을 가졌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오롯이 준비에 집중한 여름 2박 3일 합동 교육,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단체 관람과 야외 공연, 거리예술제 참여 등 뮤지컬 아카데미는 조용하지만 내실 있게 진행했다.

바쁜 일정과 부상에도 불구하고 교육을 빠지지 않은 강사들의 진정성 있는 태도, 수개월 동안 주말을 온전히 반납하며 배움을 마다하지 않은 배우들 모두 높이 평가한다. 하나 더 주목할 점은 제주시 예술 행정이다.

사업 담당 부서인 제주시 문화예술과는 강사와 학생이란 두 가지 주체가 필요한 점을 고민하고 실천에 옮겼다. 보다 엄격한 심사 기준을 제안한 강사들의 입장을 온전히 반영해 2기생을 선발했다.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참가를 먼저 강사진에게 제안하며 수강생들이 경험을 쌓도록 도왔다. 수강생 자체 연습을 돕고자 연습장을 구하기도 했다.

연출·연기지도를 담당한 이종석 교수는 <제주의소리>와의 통화에서 “제주시 직원들은 창작과 수업에 관해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 수업을 원활히 진행할 수 있도록 협조했다”고 강조했다.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예술 행정의 기본을 지킨 제주시 문화예술과의 노력이 밑바탕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보완해야 할 점이 없진 않다. 음악지도를 맡은 이유진 배우는 “연습실과 음향 장비 같은 부분에서 조금 더 배우들이 기량을 펼칠 수 있게 함께 협업하는 마음으로 행정이 도와준다면 좋을 것 같다. 제주시 뮤지컬 아카데미는 내 것이 아닌 도민 모두들의 것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번 뮤지컬 아카데미는 탑동해변공연장을 기본 연습실로 두고 예술공간 이아를 포함해 여러 곳을 옮기며 연습했다. 자체 연습장은 수강생들이 수소문해서 구하곤 했다. 탑동해변공연장도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동작을 볼 수 없는 거울 크기라 연습 시간이 늘어났다. 탑동해변공연장에서 연습을 더 하고 싶어도 관리자 근무 일정과 맞지 않았다. 중단 상태인 공공 공연 연습장 사업이 절실하게 생각나는 대목이다.

제주에서 활동하는 연극 배우 수강생 남석민은 “아카데미에 집중하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참여한 사람도 있을 만큼 모두가 열정 가득히 임했다. 제주에서 이 정도 수준의 뮤지컬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는 지금까지 전무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기본기부터 확실히 쌓으며 올라가는 ‘풀 프로덕션’(Full production)이었다”면서 “돌이켜봐도 너무나 좋은 경험이었다. 아카데미 과정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수강생 모두 이번 기회를 발판 삼아 더 큰 꿈을 꾸고 있다”고 밝혔다.

서경대학교 뮤지컬학과에서 배우들을 양성하는 이종석 교수는 “수강생에게 뿌린 씨앗이 있기에 그들이 싹을 틔워 제주에 뮤지컬 자생력을 기를 수 있다고 믿는다. 그 자생력에 물과 빛이 되는 것이 강사로서 연출로서의 내 몫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지원하고, 마음과 현실의 끈을 이어가도록 노력하겠다”며 계속해서 아카데미 강사로 활동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뮤지컬 배우 이유진은 “수업을 진행하면 진행할수록 제주도의 매력에 물들어가고 배우들의 에너지에 매료됐다. 수강생들이 ‘진짜 배우’로 성장할 수 있게 최대한 돕고 싶어졌다”며 “이런 과정에서 나 역시 수업하러 온다는 느낌보다 성장해가는 배우들을 보면서 힘을 얻었다”고 강조했다.

제주시 뮤지컬 아카데미 2기의 교육 과정. 제공=남석민. ⓒ제주의소리
제주시 뮤지컬 아카데미 2기 수강생들과 강사진들이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제공=남석민. ⓒ제주의소리

제주시는 내년에도 뮤지컬 아카데미를 이어가면서 애초 목표했던 <만덕> 출연까지 달성하겠다는 계획이다. 더불어 기회가 된다면 방학을 이용한 청소년 아카데미까지 확장해 뮤지컬을 꿈꾸는 새싹들을 돕고 싶다는 구상도 멀리 바라보고 있다.

이번 뮤지컬 아카데미뿐만 아니라 창작 뮤지컬 <만덕>, 제주 ‘더불어-놀다’ 연극제, 제주소재창작연극 개발사업까지. 돌이켜보면 지역 극예술을 위해 제주시는 나름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극예술을 좋아하는 관객 입장에서도 무척 반가울 따름이다.

제주시가 뿌린 '뮤지컬 아카데미'라는 씨앗이 온전하게 잘 자랐으면 한다. 씨앗이 새싹이 되고 나아가 큰 줄기를 이뤄 열매까지 맺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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