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143. 견디는 것이 약이다

* 존디는 :견디는, 인내하는
* 약인다 : 약(藥)이다

심상하게 읽을 말이 아니다. 제주의 옛 선인들은 열악한 섬에서 사철 몰아치는 바람과 대지가 타들어 가는 가뭄과 한겨울의 폭설과 혹한을 딛고 농사지으며 어려운 삶을 이어 온 투지로 무장한 이 섬의 전사(戰士)였다.
 
박토를 따비와 쟁기로 일궈 농토를 만들고, 거친 숲을 헤쳐 길을 내고, 셀 수 없는 수많은 돌을 배로 안아 밭담을 쌓았다. 밭에 나가 일하다 물때가 되면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았다. 물뭍을 오가며 생계를 유지했던 억척스러운 정신력과 강철 같은 체력의 소유자들이었다.
 
갑인년 뒷해에도 먹다 남는 게 물이었다 하니, 사철 목을 축일 수 있는 우물이 가까이 있는 것만도 신의 선물이었지 않을까. 물을 찾아 바다 쪽으로 옹기종기 모여 사는 취락에 눈을 주다 보면 조상의 지혜가 엿보여 흥미진진하기도 하다.
 
마을에 병원이 있을 턱이 없었다. 힘겨운 일에 시달려 몸이 다 망가져도 호소할 데라곤 없었다. 요즘 정형외과나 한의원을 찾아 물리치료를 받고 있는 건 이를테면 호사에 다름 아니다.
 
조밥, 보리밥이나 굶지 않고 먹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그러면서도 내 자식들만은 잘 살아야 한다고 밭팔아 가며 학교를 보냈다. 대단한 교육열이다.

제주의 옛 어르신들의 한 생이 오늘의 이 눈부신 발전의 토대가 됐음을 생각하면 절로 고개숙이지 않을 수 없다.

가장 잘 훈련된 지구력을 가진 사람이 제주의 옛 선인들이었다. 인내력과 지구력이 곧 삶의 효율적안 연장이었고 수단이면서 도구였다. 1970년대 제주 농촌 모습. 출처=제주학연구센터 아카이브.
가장 잘 훈련된 지구력을 가진 사람이 제주의 옛 선인들이었다. 인내력과 지구력이 곧 삶의 효율적안 연장이었고 수단이면서 도구였다. 1970년대 제주 농촌 모습. 출처=제주학연구센터 아카이브.

‘존디는 게 약인다.’
 
기가 막힌 목소리다. ‘존디다’란 말 속에 함축돼 있는 제주인의 말로 다할 수 없는 인내의 삶 말이다. 배고파도 참고, 갖고 싶어도 참고, 입고 싶은 옷을 보아도 참고, 잠시 어딜 가 공기를 쐬고 싶어도 참았다. 아파도 참고, 슬퍼도 괴로워도 참고, 화가 나도 참고, 억울해도 참고, 놀고 싶어도 참고 말하고 싶어도 참고 때로는 목 놓아 울고 싶은 대목에서도 참았다. 평생 동안을 내리 참았다. 참고 또 참았다.
 
참으면 넘어갔다. 참으면 됐다. 중병에 걸려도 참으면 한 고비가 넘어갔다. 참는 것 이상이 없었으니 ‘참는 게 약’이라 한 것이다. 참는 것을 능가할 특효제가 없었으니 입에서 절로 나온 말이 ‘촘는’이었을 테다.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제주인들은 사람이 버틸 수 있는 인내의 극한을 살았던 사람들, 지구력의 한계에 도전했던 강인한 모험가들이다. ‘참는 게 약’이란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인내력과 지구력의 극단에서 야윈 제주 여인의 마른 가슴에서 젖을 짜 아기에게 물리듯, 짜고 나온 바로 정신의 엑기스, 진액이다.
 
인내력과 지구력은 제주인들만이 지닌 정신의 표상이란 생각이 든다.
 
인내력이란 괴로움이나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힘이다. 외부의 충동에 대해 끝까지 버티고 조절하는 능력아 바로 그것이다. 무언가 끝까지 해내는 인내력이 하고자 하는 일을 성취시킬 수 있다. 참을성 없이 되는 일은 없다.
 
인내력과 이웃해 있는 게 지구력이다. 어금버금한 두 말이다. 오랫동안 버텨 견디는 게 지구력이다. 지구력이 없으면 일을 장시간 계속적으로 할 수가 없다. 체력만 좋다고 되지 않는다. 의지가 강해야 한다. 자동차의 내용성(耐用性)과 관계되는, 냉열(冷熱)이나 윤활유 기관에 해당하는 게 지구력이다. 인간의 신체 능력 가운데 다른 동물에 비해 가장 우수한 항목이 지구력이다.

운동역학적인 면에서 2족 보행이 4족 보행보다 훨씬 효율적이며, 연비가 좋다. 훈련된 인간은 몇 시간 이상 지속적인 달리기와 수영이 가능하고, 그보다 더 긴 시간 쉬지 않고 걷는 게 가능하다.
 
가장 잘 훈련된 지구력을 가진 사람이 제주의 옛 선인들이었다. 인내력과 지구력이 곧 삶의 효율적안 연장이었고 수단이면서 도구였다. 병을 고치는 ‘약’이었다. 다시 한 번 되뇌고 싶은 말, ‘존디는 게 약인다.’ 정신이 번쩍 든다. /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자리>, 시집 <텅 빈 부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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