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詩 한 편] (34) 어머니의 노을 / 강영미

지난 여름, 애월 일주서로에서 바라본 노을. ⓒ 김연미
지난 여름, 애월 일주서로에서 바라본 노을. ⓒ 김연미

아무래도 아버지가 한 번 다녀가신 거다
한 생애 원망들을 누가 와서 지웠을까
몇 방울 꼬순 기억만 뒤적뒤적 볶고 있다

헌 냄비 바닥에서 까맣게 탄 날들도
털고 또 떨어내며 남은 깨를 볶으시네
그리운 노을 언저리 또 한 해가 저무네

- 강영미 <어머니의 노을> 전문-

예술가의 의무에 대해서 생각한다. 문학이든, 음악이든, 그림이든, 남들과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독창성이라거나 전위적이라거나, 혹은 ‘낯설게 하기’라는 이름을 붙여도 상관없다. 문학 작품을 읽는 목적 중 하나는 작품 속에 구현된 세계의 간접 경험이다. 그런 경험이 독자들의 사고 범위를 확장시켜 주며, 그 세계가 확장될 때 독자들은 감동하게 되는 것이다. 

노을에서 어머니의 꼬순 기억, 깨 볶는 모습을 연상하는 건 시인이라서 가능한 일일 것이다. 누구라도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노을의 일차적 감상을 넘어 어머니 삶이 투영된 아름다운 노을이다. 독자들은 이 작품을 읽음으로 해서 노을 이미지 하나가 더 추가된다. 거기다 그 꼬순 기억의 원인을 지금은 부재중이신 아버지가 한 번 다녀가신 것일지도 모른다는 발칙한 상상력에 기인한 것이어서 더 재미가 있다. 어머니의 ‘까맣게 탄 날들’, ‘한 생애 원망들’을 다독여 줄 사람은 역시 아버지 밖에 없는 것이다. 

노을, 어머니, 원망, 까맣게 탄 날들에게서 소멸이란 단어를 생각한다. 아래로 내리는 것들, 점점 사그라드는 것들이 시를 관통하는 이미지다. 그러나 시 전반에 퍼진 깨 볶는 냄새로 해서 그 분위기는 가볍게 역전된다. 번다하지 않으면서 원하는 효과를 제대로 표현해낸 것이다. 시인의 필력이 부럽다.

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 산문집 <비오는 날의 오후>를 펴냈다.

젊은시조문학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현재 오랫동안 하던 일을 그만두고 ‘글만 쓰면서 먹고 살수는 없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제주의소리>에서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연재를 통해 초보 농부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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