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詩 한 편] (35) 파이(π) / 이명숙

한림 어느 집 벽에 나머지로 붙어 있는 담쟁이 이파리. ⓒ 김연미
한림 어느 집 벽에 나머지로 붙어 있는 담쟁이 이파리. ⓒ 김연미

가을볕에 익으면 상처도 떨어질까
속에서 좌표 없이 흔들리는 그대 체취
세상사 
모자라거나 
넘치거나 모를 일

믿으려면 다 믿을 걸
주려면 다 내줄 걸
바람에 속사포로 부서지는 넋두리
세상에 우리 사랑이 그뿐이더냐,
빌어먹을

늦가을 찬 서리에 나머지로 서 있는
담쟁이 한 줄기가 별빛 향해 뻗는 손
애인아
나는 중독이다
하늘인들 못 갈까

- 이명숙 [파이 π] 전문

단순함을 사랑한 적이 있다. 쨍한 햇빛에 제 본색을 드러내는 빨강 노랑 꽃들, 경계선 확실하게 그은 바다와 하늘, 단호하게 돌아선 그 사람의 뒷모습도 내가 사랑하는 한 부분이었던 때. 소나기 갑자기 내리는 창가에 앉아 아래로 떨어지는 물방울들을 보며 이야기 했던 건 경쾌함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기운은 위로 향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 한 때는 아주 잠깐 머물다 가고, 가을이 오듯 쇠락한 감정들이 뚝뚝 떨어져 내린다. 

계산할 때마다 다른 답이 나오는 중년. 패턴조차 짐작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하루하루의 생활을 아래로 끌어내릴 때, ‘빌어먹을...’ 지금까지 도대체 뭘 하며 살았던 걸까. 내 안에 확실하게 자리 잡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이렇게 속절없이 흔들릴 줄이야. 

아무것도 예상할 수 없는 시간. 흔들리는 줄 알면서도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끝까지 파고 들었다 생각했는데도 여전히 빗나간 답을 받아든다. 그 답 앞에 망연해 하면서도 다시 연필을 놓지 못하는 건, 지금껏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중독 증세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다시 무릎을 꿇는다. 분명, 올만큼 온 것 같은데도 여전히 그 끝을 알 수 없는 숫자는 계속 이어지고...

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 산문집 <비오는 날의 오후>를 펴냈다.

젊은시조문학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현재 오랫동안 하던 일을 그만두고 ‘글만 쓰면서 먹고 살수는 없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제주의소리>에서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연재를 통해 초보 농부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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