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적 인간] 35. Waterland(스티븐 질렌홀, 1992)

영화 ‘나의 청춘 워터랜드’ 포스터(자료=네이버 영화)
영화 ‘나의 청춘 워터랜드’ 포스터(자료=네이버 영화)

그때는 동네마다 비디오 가게가 있었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명작을 고르곤 했다. 정확히는 좋은 작품이기에 그곳에 꽂혀있었으리라. 고등학생 시절에 나를 성숙하게 한 건 영화들이었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택시 드라이버’, ‘첩혈가두’, ‘슬픈 로라’, ‘칠수와 만수’ 등이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 나왔다. 몇 해 뒤 그 많던 비디오 가게들은 거의 다 실종되었다. 추억도 미궁에 빠졌고, 기억은 장기미제 사건파일 한켠에 들어가 잠들었다.

추억의 영화를 보는 일은 낡은 캐비닛을 열어보는 일과 비슷하다. 그곳에는 차마 버리지 못한 물건들이 많다. 차라리 버렸으면 그리워라도 하지, 기억이 두려움에 떨며 웅크리고 있다. 스무 살 무렵, 세상을 향해 응시만 하고 있을 때 이 영화를 만났다. ‘나의 청춘 워터랜드’. 화북 바닷가에서 놀던 유년시절이 내겐 워터랜드의 시절이었다. 그때의 친구들은 모두 어디에서 무얼 할까.  

캐비닛 한켠이 환하다. 잘 익은 감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조명 탓이다. 스포트라이트는 현실을 왜곡한다. 사실 곪아터졌다. 이제는 먹을 수도 없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먼 훗날 지금을 추억할 영화는 어떤 영화일까. 이 모든 영화들이 다 추억이 되겠지. 그러고 보면 내게 남은 시간은 영화를 볼 수 있는 시간이다. 영화적 인간. 주체적으로 영화적 삶을 산다고 여긴다 해도, 사실 우리는 예상 관객으로 존재한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은 추억이라는 낭만적인 낱말이 살인을 둘러싼다. 살인을 추억할 수 있나. 좀 다른 말이지만, 우리는 김현식과 유재하와 김광석이라는 죽은 가수들을 추억한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이 낭만이 시대와 만나면서 낡은 방식으로 전락하고 만다. 진범이라 확신하고 미국까지 보낸 조사서에는 불일치라는 결과가 나왔다. 서류가 모든 것을 말한다고 확신했던 서울 형사도 그런 결과를 받고 주저앉는다. 

나는 내 생애 두 가지가 가능할까 의심했다. 통일과 화성 연쇄살인사건 진범 체포. 통일은 여전히 요원하고, 마침내 그 범인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너무 평범한 얼굴이었다. 험악한 얼굴이 아니었다. 선한 얼굴에 왜소한 체구. 영화에서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한 인물과 진범의 몽타주가 거의 일치해 봉준호 감독의 디테일에 다시 한 번 놀랐다. 

훗날 우리는 지금의 우리를 어떻게 추억할까. 나와 우리 가족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은 평범해 보이지만 위험한 욕망이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사회적 타살’이라는 말이 나와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밥은 먹고 다니냐?”라는 형사의 말에 “삼시세끼 꼬박꼬박 밥 잘 먹습니다.”라고 대답할 것만 같다. 

우리는 용케 잡히지 않고 빠져나온다. 최근에 연이어 두 가수의 죽음이 있었다. 누가 그 둘을 죽음으로 몰고 갔나. 청춘에서 끝난 두 가수의 노래는 이제 추억이 될 수 있을까.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 착한 얼굴들이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