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배의 도백열전-해방정국 이끈 제1대 박경훈 도지사(1)

‘제주의 소리’는 홈페이지 업그레이드를 계기로 다양한 정보와 컨텐츠를 제공하겠다는 약속에 따라 그 첫 번째로 [김종배의 도백열전] 연재를 시작합니다.
제주CBS 보도제작국장이 쓰는 道伯列傳은 도지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제주도정의 이야기를 그 시대 역사와 함께 읽을 수 있는 또 다른 흥미를 제공해 줍니다. 도백열전은 이미 신문 지면을 통해 연재된 바 있으나 네티즌들에게 온라인상으로 다시 한번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연재를 시작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편집자]

우석 박경훈(朴景勳). 37세의 나이로 초대 도지사를 지낸 박경훈은 해방공간과 군정의 혼란기에 초기 도정을 이끌어나간 시련의 지도자였다. 특히 해방 이후에 보인 그의 족적은 실로 혼란과 갈등으로 이어진 제주역사의 한 페이지였으며, 그 시대의 지식인들이 겪었던 고난의 연속이었다.

역사라는 모래 위에 많은 발자취를 남긴 모든 인물들의 대부분이 그러하 듯 1945년부터 1948년 사이 해방공간에서 무수한 정치적인 갈등을 겪어야 했던 우석에 대한 평가는 역사라는 단면에서 보다 「역사와 인간」이라는 시각에서 재조명돼야 할 것 같다.
결코 순탄하지 못했던 제주의 근대사를 직접 몸으로 겪으면서 일생을 살았던 박경훈이었기에 그가 걸어온 역사를 총체적으로 이해함으로써 가능하다 하기 때문이다.

1945년 8월15일.
전라남도 호남은행 사원으로 근무하고 있던 박경훈은 이른 아침부터 광주시내 곳곳에 나붙어있는 「금일 정오 중대 방송, 1억 국민 필청」「15일 정오 중대 발표, 황국신민 경청」이라고 쓰인 벽보를 보고 정국에 큰 변화가 있을 것 같은 예감에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그는 「소련에 대한 일본의 선전포고」와 「일본의 항복」등 두 가지의 경우를 생각하면서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가슴 터질 것 같은 日 천황의 목소리 “무조건 항복한다”

낮 12시. 일본 천황 히로히토의 목소리는 라디오의 심한 잡음 탓인지 분명하게 들리지 않았으나 그것은 일본의 패전과 항복을 알리는 특별방송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히로히토(裕仁)의 목소리는 몹시 떨리고 있었다.
"우리의 선량하고 충실한 신민(臣民)들이여. 오늘 우리 제국에 지배되고 있는 여러 특수한 세계 정세를 깊이 생각한 끝에 우리는 비상조치로서 이 난국을 구하고 지금의 정세를 조정할 것을 결정하였다. 우리는 정부에 명하여 미합중국, 영국, 중국 및 소련연방정부 공동성명의 조건을 수락할 것을 통고시켰다."

천황의 목소리는 이어 "일본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한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낮아졌다. 그리고 계속된 해설 방송과 신문의 벽보들이 「일본의 항복」사실을 알렸다.

이날 아침까지만 해도 보이던 일본 국민복이나 여자들의 몸빼 차림이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박경훈은 숨 막힐 것 같았던 긴장을 떨치고 우선 아버지 박종실(朴宗實)에게 연락을 취했다.

제주도의 최대 거부(巨富)인 박종실은 그해 4월 막바지에 이른 전쟁을 피하기 위해 전라남도 나주군 봉황면 와우리에 있는 한학자 한봉구(韓鳳九)씨 집에 머물고 있었다. 그때 제주도민들은 일본군이 제주도를 최후의 격전장으로 삼으면서 계속되는 미군의 폭격에 상당수의 시설물이 파괴되자 육지로 피난을 떠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었으며, 일본은 제주사람들을 강제로 소개시켰다.

1945년에 접어들면서 제주도에는 「본토사수」의 최후 사명을 띤 관동군이 집중 배치되기 시작했으며 한라산과 해안가 요지마다 진지들이 구축되기 시작했다. 그해 4월에 들어서는 제주도의 방어를 위해 일본군 제58군 사령부가 신설 편성됐고 그 예하부대로서 제96사단․제111사단․제121사단 등 3개 사단과 독립혼성 제108여단 등을 두고 있었으며 병력만도 6만여명에 달했다.

박종실은 앞으로의 처신을 상의하는 장남 경훈과 함께 광주 식량영단에 근무하고 있는 3남 박태훈(朴泰勳), 전라남도 지방서기로 있는 4남 박충훈(朴忠勳)에게도 동요하지 말고 당분간 현지에 머물면서 직장일에만 전념하도록 했다.

박종실은 그해 10월에 6개월간의 피난생활을 청산하고 제주로 돌아왔다.
8.15 해방의 감격은 제주읍내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8월16일 아침에는 관덕정에 태극기가 가장 먼저 내걸렸고 감격과 흥분을 이기지 못한 사람들은 급조한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 시가행진을 벌였다.

해방한달 넘어서야 한국인 김문희가 임시 도사로 선출

일본인 제주도사(島司) 오노도리이치(小野虎市)는 패전 소식을 듣자마자 우선 제주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 거류민들의 안전한 귀국부터 생각했다. 그는 주둔군 사령관 가스키 중장과 제주도청(島廳) 간부직원들을 도지사 관사로 불러 대책을 강구했다.

오노는 이미 일본이 항복한 마당에 더 이상 제주에 머물 이유가 없다고 여긴 때문인지 하루라도 빨리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렇다고 어느 누구도 뾰족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미군이 제주에 들어올 때까지 일본인들의 안전과 치안유지를 위해서는 무장과 경계를 풀지 않았다.

이러한 와중에 8월18일에는 지방 청년들을 모아 건국준비를 서둘던 홍순녕(洪淳寧)이 동문헌병대로 연행, 구속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오노는 천황의 항복 선언이 있은 지 한달이 지나도록 아무런 조치도 하지 못한 채 불안한 나날을 보내던 중에 전라남도 미군정청으로부터 후임 도사를 한국인으로 정하고 도청의 모든 업무를 인계하라는 지시를 받을 수 있었다.

9월 중순 어느 날 오노는 도농회(島農會) 주사 김문희(金汶熙)와 도청 산업기수 이홍림(李洪琳)을 지사실로 불렀다.
오노는 제주도민들 중에 가장 높은 공직에 있는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에게 후임 도사를 정해 업무를 인계할 생각이었다.

"내가 당신네를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일본의 지배가 끝난 지금의 실정에서 누군가가 도청의 업무를 인수하고 행정의 책임을 맡아줘야 하기 때문이오. 더군다나 미군정청에서는 빨리 후임 도사를 정하여 사무인계를 마치라는 독촉이 내려오고 있고 불원간 미군이 제주에 올 것 같소."

그러면서 오노는 두 사람 중에 지위가 높은 이홍림 기수의 손을 잡고 "이 기수가 도사의 직을 맡아주면 어떠하냐"고 물었다.
이 기수는 갑작스런 오노의 제의에 크게 당황하고 "저는 그런 중책을 맡을 위인이 못 된다"고 거절했다.
이에 대해 이 기수와 김 주사는 "도사는 도민 대표들과 상의한 후에 신중히 결정한 문제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이 문제는 우리들에게 맡겨주고 일본인들은 일본으로 돌아갈 채비만 준비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오노는 「조기 도사 선출, 조기 업무 인수」를 거듭 강조했다.
이 기수와 김 주사는 도사실에서 나오자마자 곧 도청 직원과 도농회, 도수산회 등 도내 주요 기관의 직원들을 모아 도사 선정에 따른 비상회의를 소집했다.

이날 비상회의에는 대표격인 15명이 참석했다.
이 기수와 김 주사는 오노 도사와의 대화 내용을 소상히 설명하고 도사 선출에 따른 의견을 제안해줄 것을 요구했다.
참석자들은 도사를 선정하여 조속한 업무를 인수하는 데에는 모두 동의했으나 누구를 도사로 선정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장시간의 난상토론 끝에 결국 연장자인 김문희가 임시도사로 선출됐다. 참석자 가운데 일부는 지위가 가장 지위가 높고 행정경험이 많은 이홍림 기수가 적임자라고 주장했으나 이 기수 본인의 사양으로 김 주사가 임시 도사로 선출했다.

이때부터 김문희는 도농회 주사에서 임시 도사로 자리를 바꿔 앉고 업무인수에 들어갔으나 임시 도사에 불과한 탓인지 어려움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당시 제주도사의 임명권은 전라남도 미군정청이 가지고 있어서 미군정청의 최종 승인이 내려지기 전 까지는 말 그대로 「임시」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김문희는 미군의 제주상륙이 늦어지면서 정식 도사로 임명을 받을 수 없어 도사의 직권과 책임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인 도사 오노 역시 귀국준비만 겨우 마친 채 어정쩡한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상태였다.

한편 건국준비위원회 계열에서는 9월게 자체적으로 도사선출회의를 가지고 초대 도사에 조천출신의 안세훈(安世勳)을 추대했으나, 안세훈은 회의에조차 참석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추대를 거절하는 바람에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美 파우엘 대령, "제주도 재건에 모든 주민이 앞장 서 달라”

미군이 제주에 들어온 것은 1945년 9월28일이었다.
미군은 이날 오전 제주비행장과 제주부두를 통해 들어왔다. 1개 연대의 병력이 10대의 군용기와 2척의 LST 함정에 나눠 파우엘 대령의 지휘아래 처음으로 상륙했다.

파우엘은 도착 즉시 가진 기자회견에서 「미군정의 실시」와 「최단 시일 내의 일본군 무장해제」계획을 발표했다.
이어 오후에는 일본군 사령부가 설치되고 있는 제주농업학교에서 일본군의 항복 조인식이 이뤄졌다.

파우엘 대령은 가스키 중장으로부터 항복조인을 받고 "주한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의 포고문을 철저히 준수하고 제주도의 재건에 모든 주민이 적극 앞장서 달라"고 말했다.

다음날에는 濟州島미군정청이 설치되고 초대 군정관에 스타우드 소령, 도점령법무관에 존스 대위(후에 패트리치 대위가 부임)가 임명됐다. 스타우드는 취임 성명을 통해 "제주도의 질서와 기강을 바로 잡는 데에 노력 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군정관의 첫 업무로서 오노 도사를 해임하는 동시에 그때까지 임시 도사로 있는 김문희를 도사직무대리로 임명했다. 이와 함께 내무과장에 오응삼(吳應三), 산업과장에 이홍림을 발령했다.

그러나 도청의 기능은 일제 때의 기능을 그대로 옮긴 데에 불과해서 극히 한정된 대민업무만을 다루는 데에 그쳤다. 더구나 제주는 전라남도에 소속돼있어서 업무추진에 불편이 많았다. 또한 전라남도에서도 제주에 대한 행정적인 지원을 거의 하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제주도청에 급사 한 명을 채용하는 데에도 전남 본청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로 제주도(濟州島)를 제주도(濟州道)로 승격시켜 사실상 자치제를 실시하는 것이 선결과제였다. 그러나 대다수의 도민들은 그같은 도(道) 승격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도 당장 해결해야할 생활고로 추진할 여유가 없었다.

그 무렵 농산(農山) 김홍석(金洪錫)은 충청남도 강경에서의 피난 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후 10월13일 도청으로 김문희 도사를 방문하고 도제 승격에 대한 필요성을 역설했다.

두 사람은 빠른 시일 내에 도승격추진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하고 지역유지인 최원순(崔元淳) 양홍기(梁洪基) 박우상(朴雨相) 박명효(朴明效) 박종실(朴宗實) 김남련(金南鍊) 김축준(金築俊) 김충희(金忠熙) 박종훈(朴鍾壎) 홍순용(洪淳容) 이윤희(李允熙) 최남식(崔南植) 김종현(金宗鉉) 등을 모아 「도제추진위원회」를 조직했다.
도제추진취원회는 곧 김홍석을 대표로 하는 탄원서를 아놀드 미군정장관에게 제출키로 하고 문안작성에 들어갔다.

『제주도 30만 대표 김홍석 백배상서우(百拜上書于). 조선군정장관 각하 복이(伏以)』로 시작된 진정서는 제주도가 조선의 남단에 위치한 하나의 큰 섬이나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는 관계로 기후와 풍토가 판이하게 달라 조선시대 때부터 자치제를 허가해 왔기에 미군정청에서는 본도 도민들의 탄원을 들어주어 제주도(濟州島)를 제주도(濟州道)로 승격해줄 것을 간곡히 바랍니다』

그러나 도제추진위원회는 탄원서를 보낼 것만 아니라 군정장관을 직접 만나 제주도제 실시의 타당성을 설명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들이 제시됨에 따라 김홍석은 1945년 10월24일 며느리 고수선(高守善)과 통역관으로서 호남사람 추기채(秋基彩)를 대동하고 서울로 올라갔다.

다음날 세 사람을 접견한 아놀드 장관은 "그렇지 않아도 제주도의 도승격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이 자신에게 건의한 바 있어서 미군정청에서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중이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놀드는 도승격에 대한 조건으로서 제주도에 있는 노년층과 청년들을 잘 선도해서 빠른 시일 내에 자치제의 기틀을 마련하고 치안확보에 노력해 달라고 주문했다.

미군정청은 그들이 돌아간 뒤 현재 도사직무대리로 있는 김문희 대신에 참신한 인물을 내세워 도제승격에 대비하는 한편 군정업무를 보다 효율적으로 추진해나갈 계획을 세웠다. 미군은 제주지역의 유지 대부분이 나이가 많아 언어 소통과 대민업무에 많은 지장을 받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어서 정식 도사의 임명과 제주도의 도제실시는 그들로서도 매우 절실한 문제였던 것이었다.

미군정청은 우선 대상자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기 시작했다.
당시 제주지역에는 「4朴」이라고 불리우는 박명효(朴明效) 박치순(朴致順) 박우상(朴雨相) 박종실(朴宗實) 등 4명이 지역의 여론을 이끌어나가고 있어서 후임 도사로 유력시됐으나 나이가 많고 행정경험이 없으며 영어를 하지 못해 일단 후임 도사의 대상에서 제외됐다.

따라서 도사 후보는 제주도의 상급관청인 전라남도 지역 관공서에 근무하고 있는 제주출신 인사로 옮겨지면서 호남은행 순천지점 차장으로 근무하다가 광주본점에 재직하고 있는 박경훈과 전라남도 지방과에 있는 문종철(文鍾哲) 등으로 좁혀졌다.

그때 호남은행장은 호남지역의 당대 최고 갑부인 현준호로서 전남도정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박경훈은 이러한 관계로 현준호 등의 추천을 자연스럽게 받게 됐다.

미군정청,도제승격 앞둬 최고거부 박종실 자제 박경훈 도사 임명

미군정청은 경성제대(京城帝大) 출신의 박경훈과 경도제대(京都帝大) 출신의 문종철을 개별 면접했다.

박경훈은 "행정기관에서 근무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문씨가 적임자이다"고 고사했으나 미군정청은 박경훈의 부친이자 제주도의 최고 거부로 알려진 박종실과의 관계 등 여러 가지를 검토한 끝에 박경훈을 후임 도사로 낙점했다.

박경훈과 함께 도사로 추천을 받았던 문종철은 대학시절에 영어와 독어, 불어, 라틴어, 러시아어 등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수재였으며 1943년 고등문과 시험에 합격하고서도 조선인에 대한 차별대우로 전라남도 지방과의 하위직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문씨는 그후 법제실 제2국장을 거쳐 제주대학장을 지냈다)

도지사로 발탁된 박경훈은 수락조건으로서 "내 고향 제주도에는 쌀이 거의 생산되지 않는데도 쌀을 공출토록 함으로써 주민들이 생활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다 육지에서 쌀을 사다가 공출하는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어서 앞으로 제주도만큼은 쌀 공출대상에서 제외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이 같은 그이 요구는 그 후에 지켜지지 않았다.

박경훈은 1946년 2월에 정식 도사로 부임했다.
박경훈은 1909년 10월20일 박종실의 4남1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성공립중학교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한 그는 동생 영훈(永勳. 후에 제주도 보건후생국장과 제주도립병원장을 역임)과 함께 제주도에서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했다 해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었다.
故 유진오(兪鎭午)박사는 「片片夜話」에서 박경훈은 경성제대 문과 B반(예과 7회)에서 가장 성적이 뛰어났으며 체조점수가 병(丙)인데도 평균 성적이 갑(甲)일 정도로 전 과목에 걸쳐 우수했다고 했다.

체조점수가 나빴던 것은 도키토라는 육군조장(체조담당 교사)이 한국사람에게만 아주 나쁜 점수를 주어 병 이상을 받기 어려웠다고 한다. 박경훈이가 경성제대에 입학할 당시의 1930년도 합격자는 응시자 1102명 가운데 148명에 불과했으며 한국학생은 36명이었다.

박경훈은 졸업과 동시에 민족은행인 전남 광주에 있는 호남은행의 행원으로 들어갔는데 업무처리가 워낙 철저하여 「시계」라는 별명을 듣기까지 했다. 이러한 인연으로 은행장 현준호의 눈에 띄어 은행에서도 승진이 빨랐고 훗날 도사발탁에도 큰 힘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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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배는
1980년 제주신문 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디딘 이후 제민일보 정경부차장,사회부차장,교육체육차장,교육체육부장과 편집부국장을 거쳐 논설위원,기획관리실장,상무이사를 역임했다. 제민일보 노조위원장과 제주도기자협회장도 지냈다. 현재는 제주기독교방송(CBS) 보도국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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