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극단 가람 악극 ‘가슴 아프게’

제주 연극계를 대표하는 극단 가운데 하나인 ‘가람’(대표 이상용)이 올해 마지막 공연이자 올해 첫 창작 초연을 가졌다. 지난 21일부터 22일까지 무대에 올린 악극 ‘가슴 아프게’다.

극본, 연출을 도맡으며 이상용 대표의 수고가 담뿍 녹아있는 이 작품은 제주 현대사의 파도를 온몸으로 감내해야 했던 출항 제주해녀의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찬찬히 조명한다.

4.3으로 아버지가 일본으로 떠나고 어머니마저 여읜 순이(배우 양진영·고가영)는 슬하의 동생 둘을 책임지기 위해 해녀의 길을 선택한다. 심성 고운 남편(박세익)을 만나 짧은 행복을 누렸지만 6.25전쟁이 발발하고, 책임감에 군 입대를 자처한 남편은 절름발이로 귀향한다. 끔찍한 전쟁 트라우마로 인해 술에 의존하다가 끝내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 이 때문인지 다정하던 시어머니(김정희)는 180도 돌변해 순이를 괴롭힌다. 결국 가장으로서 순이가 선택한 길은 일본 대마도 출항해녀다. 동생들과 첫째 딸, 젖먹이 둘째 아들을 뒤로 하고 무려 15년간 대마도에서 지내면서 버는 돈은 족족 고향으로 보냈지만, 정작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를 맞이하는 건 돈을 요구하는 동생들과 아들의 다툼이다. 결국 ‘내 있을 곳은 바다뿐’이라는 숙명을 눈물로 절감하며 대마도로 돌아가고, 끝까지 가족들을 위한 물질을 하다가 세상을 떠난다.

불행이 겹겹이 쌓이는 ‘가슴 아프게’를 보면서 한편으로, 비극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고난과 불합리함을 겪어야 했던 제주 여성들, 특히 1930~40년대에 태어난 세대들의 삶을 직접 만나거나 혹은 기록으로 나마 접하면 '가슴 아프게' 줄거리는 그리 무리한 편도 아니다. 현실은 더욱 비참하기에. 극본을 쓴 이상용 대표는 몇 년 전 일본 도쿄, 오사카에서 만난 고령의 제주 어머니들을 떠올리면서 “실화를 바탕으로 작가의 상상을 가미해 해녀의 아픈 삶을 그대로 무대에 옮겨 놓고 싶은 마음”이라고 소개의 글에 남긴다.

작품은 1930~40년대를 지나온 제주해녀, 혹은 그런 부모를 둔 자녀들의 눈높이를 적확하게 맞추는 요소들이 가득하다.

힘겨웠던 한 여인의 삶은 당대 발표됐던 전통 가요에 실려 한층 더 감정적으로 관객에게 다가간다. 호소력 짙은 고가영의 검증된 연기는 다시 한 번 빛을 발한다. 더불어 순이가 의지하는 선배 해녀를 맡은 윤정주는 깊은 인상을 준다. 통상 연극 무대에서 만나는 연기와는 사뭇 다른, 일상에 가까운 제주어와 제주인의 감정선을 잘 살려내 중년 이상이 상당수였던 관객들과 공감대를 이루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다정한 배우자에서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는 참전 용사까지 한 개인의 불행한 파멸을 보여준 박세익, 특유의 씩씩한 연기와 노래로 전반부 무대를 책임진 양진영, 관객에게 웃음과 미움을 선사하는 이병훈, 오랜만에 무대에서 만나는 김시혁 등 주어진 역할을 알맞게 소화한 조연들이 있었기에 2시간 20분이란 공연 시간은 크게 지루하지 않았다.

배우들의 연기는 불턱의 분위기를 적절하게 재현한 무대와 소품으로 더욱 돋보였다. 수영장에서 볼법한 물안경은 흠이었지만 물소중이, 물적삼, 물수건 같은 옛 해녀 복장은 어색하지 않게 갖췄다.

여기에 중요한 순간마다 함축적인 연출도 등장하며 눈길을 끌었다. 기다란 천을 헤치면서 순이가 물숨을 삼키는 장면, 그리고 망자가 된 순이가 ‘이젠 다 괜찮다’는 어머니의 위로에 평생을 끼고 살았던 태왁을 내려놓는 연출은 긴 여운을 남겼다. 사실 재현에 방점을 뒀던 가람의 평소 스타일을 잘 알고 있기에 더욱 새로웠다.

이런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결합하면서 ‘가슴 아프게’는 관객들의 눈물샘을 깊이 자극했다. 구성진 가요가 흐르고 비통한 연기가 무대를 장식할 때마다 객석 곳곳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주의 격변기를 몸소 겪은 해녀들의 마음을 직접 어루만지고 위로한다는 면에서 볼 때 가람의 ‘가슴 아프게’는 독보적인 작품으로 손꼽히겠다. 개인적으로 작품 말미를 망자 순이에 집중해 노래 없이 마무리하면 여운이 더욱 짙게 남겠다는 사족도 더해본다.

# 이쪽도 저쪽도 똑같은 놈들? 위험한 시각

'가슴 아프게'는 충분히 호평 받을 작품이지만 작품이 보여주는 4.3에 대한 인식은 매우 안일하고 위험하기에 더 나은 평가를 주저하게 만든다.

순이의 남편 철수는 파출소장의 아들이다. 아버지는 4.3 당시 숨졌다는 설정인데 “빨갱이에게 죽임 당해”, “빨갱이라면 치가 떨린다”, “아방의 원수를 갚는다”는 철수와 철수 어머니의 대사에서 파출소장이 무장 세력에게 피살당했다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주인공 남편 집안이 파출소장이란 설정만을 걸고넘어지는 게 아니다. 4.3 당시 무장·봉기 세력에 의해 피해를 입은 도민들이 분명 존재하고, 오늘 날 극우에서 극좌까지 이념은 각자의 가치 판단으로 인정받기 마련이다.

문제는 극 초반에 나오는 4.3에 대한 상징적인 묘사와 그것이 내포한 사실 왜곡이다.

평화롭게 노래하는 해녀와 제주도민들에게 느닷없이 혼란이 찾아온다. 무대 양쪽에 두 존재가 등장하는데 왼쪽은 죽창을 든 남자, 오른쪽은 소총을 든 군인이다. 먼저 죽창으로 주민 한 사람을 찌르고, 다음에 군인의 총으로 다른 주민이 쓰러진다. 그렇게 동일하게 두 번씩 반복하면서 작품은 4.3을 함축해서 설명한다.

이 같은 묘사는 4.3을 단편적으로 왜곡시킬 우려가 다분히 크다. 무대 위에서 도민들을 학살하는 두 세력이 비등한 존재이자 별 반 다를 바 없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실제 역사는 다르다. 군경과 무장대 양쪽에 시달리며 무고한 피해를 입은 도민들에 대한 작품의 인식은 공감하지만, 4.3 당시 피해 규모를 아예 간과했다고 봐도 틀리지 않다.

2003년 12월 국무총리가 위원장인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는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를 발표한다. 정부의 공식 자료인 셈이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4.3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4.3 희생자 수는 2만명에서 최대 3만명이다. 이 가운데 군인은 180명 내외, 경찰은 140~214명, 우익단체원은 639명이다. 모두 합하면 1033명 수준이다. 여기에 가족 등의 피해까지 더하면 무장대에 의한 피해는 전체의 10% 안쪽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진상조사 보고서 작성에도 참여한 김종민 전 4.3중앙위원회 전문위원은 지난해 4.3시민아카데미를 통해 “보통 군인·경찰에 의한 피해와 무장대에 의한 피해가 9대 1 비율이다. 그러나 몇몇 마을은 8대 2에서 6대 4 정도까지 된다”고 밝힌 바 있다.

뿐만 아니라 1948년 4월 3일 봉기가 있기 전까지 경찰과 우익세력이 저지른 무차별 테러, 고문까지 감안하면, 하나의 생명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인지해도 4.3의 피해는 군인·경찰과 그에 동조한 세력의 책임이 매우 크다. 작품에서는 죽창이 소총처럼 똑같이 사람을 해치지만, 그들이 왜 죽창을 들었는지, 죽창을 들기까지 수 많은 도민들이 일방적인 폭력에 고통받았다는 사실은 '가슴 아프게'에서 전혀 나오지 않는다. 90%에 달하는 군경의 대량 학살도 '5대 5'로 희석돼 버린다. 죽창과 소총을 양비론처럼 다루는 ‘가슴 아프게’ 연출이 자칫 역사 왜곡을 가져올 수 있다는 우려가 드는 이유다. (민의와 유리된 판단으로 상황을 악화시킨 무장세력 지도부의 문제점을 옹호하는 것으로 곡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여기에 파출소장 집안을 등장시켜 4.3으로 입은 피해를 토로하는 내용까지 더해지니, 작품의 역사 인식이 위험하다고 다가오는 지경이다. 예술을 통한 4.3의 재해석은 제약 없이 이뤄져야 한다는 게 예술 현장의 공통된 인식이나, 그것은 반드시 공인된 역사(진상조사 보고서)를 근거해야 한다. 공인이라는 의미는 최소한의 합의다. 그 합의를 무시하면 왜곡과 불신의 굴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가람의 ‘가슴 아프게’는 제주해녀를 조명한 예술에 있어 새로운 시도 만큼이나 당사자들이 공감할 만 한 솔직 담백한 목소리가 필요하고 또 의미있다는 것을 잘 알려준 사례다. 앞으로 제주 해녀들을 위로하는 작품으로 오래 기억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다만,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는 4.3에 대한 인식은 신중한 판단이 필요해보인다. 시대가 바뀌면서 4.3을 이해하는 시선도 점차 진일보하는 요즘이다. 

21일 극단 가람의 악극 '가슴 아프게' 무대 인사 모습. ⓒ제주의소리
21일 극단 가람의 악극 '가슴 아프게' 무대 인사 모습. ⓒ제주의소리

# 가람의 2019년과 2020년

'후궁 박빈'으로 시작한 가람의 올 한해 활동은 '가슴 아프게'로 유종의 미를 거뒀다. 역사관은 문제가 있으나, 작품 전체로 볼 때 직전 창작 공연인 뮤지컬 '힘차게 달려가세'와 비교하면 여러모로 자신들의 몸에 잘 맞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가슴 아프게'는 애초 뮤지컬로도 검토됐지만 악극으로 선회했고, 그 선택은 성공이었다.

가람의 올해 모든 작품을 지켜보고 일부는 기록으로 남기면서 전통·고전에 특화된 개성, 기본 이상을 소화하는 준수한 역량을 느꼈다. 다만, 준수함 이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매 공연마다 반복하는 실수가 아쉬움을 자아낸다. 조명·가림막 조작을 비롯해 무대에서 빠진 배우들의 목소리가 마이크로 들어가는 기본적인 실수들은 이번 '가슴 아프게' 포함 매 공연마다 거의 빠짐없이 등장했다.

'가슴 아프게'에서도 이승준 배우가 지난 8월 악극 '이수일과 심순애'서 부른 조용필의 '상처'를 다시 부르고, 학생 순이를 연기한 양진영 배우가 사전 설명에도 없이 성인 수민(순이의 딸)으로 등장하는 등의 크고 작은 실수로 완성도를 해쳤다. 조용필의 '상처'는 성인이 된 순이 아들 '철민'이 본인의 처지를 하소연하는 대목에 등장한다. 해석 여지에 따라 어울리는 선곡일 수 있으나, 이전 작품을 감안하면 성의 문제로 비춰질 수 있다. 

행여나 올해로 설문대여성문화센터 공연장상주단체를 3년 연속 이어가면서 매너리즘에 빠진 건 아닌지 우려된다. 그것이 '기우'였다는 것을 가람은 보다 나은 무대로서 증명해야 한다. 현장을 모르는 철없는 소리라고 여길지 모르나, 가람의 발전을 기대하는 관객 중 하나로서 바람을 남겨본다. 이 밖에 '포스트 고가영'을 키워야 하는 과제 역시 주어진 숙제가 아닌지 생각해본다.

참고로, 이상용 대표는 21일 '가슴 아프게' 무대 인사에서 제주도립극단 설립을 위한 관객들의 관심과 참여를 당부했다. 한 극단을 책임지는 동시에 제주연극협회장에 걸맞는 성숙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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