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시선] 역사 교과서 ‘필수요소’ 반영 단상 

제주4.3평화기념관에 이름도 없이 누워있는 백비. 4.3의 현주소를 잘 말해주는 상징적인 존재다. 하지만 이 백비가 내년에는 고교 역사 교과서에 실릴 예정이다. <제주의소리 DB>  

‘베스트셀러 작가’ 유시민은 <조선상고사>를 쓴 단재 신채호 선생이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을 사대주의 역사가의 원흉으로 지목했다고 했다. ‘역사 서술의 역사’를 이야기한 책 <역사의 역사>에서다. 

충격이었다. 유 작가의 말대로 <삼국사기>는 ‘국가 공인 역사 교과서’가 아니던가. 다들 그렇게 배워왔다. 유 작가는 단재가 김부식을 사대주의자로 규정한 근거로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요동과 간도 지역을 민족사에서 삭제하고, 중요한 사료를 다 폐기해버린 점을 들었다고  설명했다.   

단재를 ‘걸출한 사료 연구자’로 평가한 유 작가는 일제강점기 비타협적 독립투쟁을  벌였던 단재가 <조선상고사>를 쓴 이유에 대해 ‘광복을 이루려면 우리 민족의 고대사를 자주적 민족의식에 입각해 다시 써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역사서(書)에 관한 한 문외한에 가깝기에 감히 논할 처지는 못되지만, 단재의 판단이 맞다면 <삼국사기>는 ‘국가 공인’의 지위를 내려놓아야 마땅하다. 그만큼 교과서는 후세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제주도에서는 (1948년)4월3일 남로당 주도로 총선거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켜 경찰서와 공공기관을 습격하였다…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는 무고한 양민의 희생도 초래되었다”

우리 아이들에게 4.3을 이렇게 가르칠 뻔 했으니,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소름이 돋는다.  

출판사 교학사의 고교 한국사 초안은 본질적으로 ‘폭동’의 시각을 벗어나지 못했다. 제주4.3특별법과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 명시된 4.3의 정의는 깡그리 무시했다. 마지못해 구색을 맞추듯 짧게 도민 피해를 언급했을 뿐 그 전과 달라진 게 거의 없었다. 

유신시대도, 5공시대도 아니었다. 때는 바야흐로 2013년. 4.3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한지 14년, 정부가 진상조사보고서를 공식 채택한지도 10년이 흐른 뒤였다. 보고서를 근거로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과 2006년 두 번이나 과거 국가 폭력에 대한 잘못을 빌었다. 우리 사회가 점차 4.3의 진실에 다가가고 있었으나, 교육은 한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던 셈이다.  

교학사는 큰 반발에 직면했다. 교육부는 이미 검정을 마쳐놓고도 여론이 악화하자 부담을 느꼈는지 수정·보완을 권고했으나 교학사는 다시 꼼수를 부렸다. 희생된 양민 앞에 ‘많은’이라는 단어를 추가하거나, 문장의 순서만 달리했지 기조는 그대로 유지했다. 학살의 주체도 모호하게 만들었다. 결국 교학사는 교육부에 의해 수정 명령을 받기에 이르렀다. 

당시 전국적으로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한 학교는 없었다. 박근혜 정부에선 ‘교학사 파동’ 말고도 국정화까지 추진될 정도로 역사 비틀기 시도는 집요했다. 

그걸 막아낸 국민들, 특히 제주도민들에게 최근 희소식이 하나 날아들었다. 오랜기간 그릇되게 서술됐던 4.3이 내년 고교 한국사 교과서에 자주적 민주통일국가 수립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위상이 재정립된다. 

2017년 9월부터 ‘검인정 역사교과서 4.3집필기준 연구 용역’을 벌인 제주교육청이 그해 12월 관련 보고서를 교육부에 제출한 결과 내년 8종의 교과서에 4.3이 광복과 통일정부 수립 과정에서 이해해야할 ‘학습요소’로 반영된 것이다. 학습요소는 역사 교육에 있어서 필수적으로 이수해야할 핵심 요소를 의미한다. 

제주교육청이 낸 보고서에는 정부 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로 4.3의 배경과 전개과정을 객관화하는 내용이 담겼다. 지긋지긋하게 이어져온 왜곡 논란에 종지부를 찍게된 셈이다.  

특히 제주4.3평화기념관에 누워있는 백비(白碑) 사진을 곁들인 교과서가 눈길을 끈다. 백비는 여태껏 제 이름을 찾지 못한 4.3의 현주소를 잘 말해주는 상징적인 존재다. 소설 <순이삼촌>과 영화 <지슬>이 소개된 교과서도 있다. 교과서에 4.3 관련 작품이 실린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정명(正名)을 바라는 4.3유족들의 간절한 염원과 이를 받든 교육당국의 집필기준 개발, 관련 단체들의 노력이 한데 어우러진 결과다. 교과서 뿐만이 아니다. 4.3 왜곡 발간물이 나올 때마다 뒤늦게 항의하는 광경은 더 이상 보고싶지 않다. <논설주간 / 상임이사> 

* 소리시선(視線) /  ‘소리시선’ 코너는 말 그대로 독립언론 [제주의소리] 입장과 지향점을 녹여낸 칼럼란입니다. 논설위원들이 집필하는 ‘사설(社說)’ 성격의 칼럼으로 매주 수요일 정기적으로 독자들을 찾아 갑니다. 주요 현안에 따라 수요일 외에도 비정기 게재될 수 있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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