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결국 ‘아무것도 없음’에 가 닿는다
모든 것은 결국 ‘아무것도 없음’에 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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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詩 한 편] (37) 홍시를 두고 / 유재영
실핏줄 다 삭은 홍시 세 알 ⓒ김연미
실핏줄 다 삭은 홍시 세 알 ⓒ김연미

첫서리 내린 마당 누구의 발작처럼
어디서 날아왔나 등 붉은 감잎 한 장
고향집 노을이 되어 사뿐히 누워있네
 
지우고 고쳐 쓰다 확 불 지른 종장같이
와와와 소리치면 금방 뚝 떨어질 듯
우주 속 소행성 하나 발그라니 물이 든다. 
 
굽  높은 그릇 위에 향기 놓은 전신 공양
가만히 귀 기울면 실핏줄 삭는 소리
말갛게 고인 저 투명 문득 훔쳐 갖고 싶다

-유재영 [홍시를 두고] 전문-

깊은 것들이 좋다.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의 밑바닥을 찾아 몸을 거꾸로 세우고 자맥질 쳐 보는 것,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상태까지 버티다 순간 솟구치면, 길게 내쉬는 한숨에 창자 속에서 썩어가던 묵은 냄새까지 한꺼번에 다 내뱉어질 것만 같은 것. 아니, 겉에서만 부유하는 온갖 가벼운 것들을 걷어내다 보면, 어느 순간 단단하게 여문 알맹이 하나 만날 수 있는, 그 깊이에 빠져들고 싶다. 

눈길을 사로잡는 색깔과, 달콤한 맛, 더 이상 가벼워질 것도 없는 부유물 걷어내고, 고향집을 거치고, 그 고향집에 계신 어머니를 거치고, 그리고서도 한참 더 내려간 자리에 있는 소행성을 지나면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 투명. 그 투명 속으로 들어가는 시인의 심연의 깊이에 숨이 멎을 것만 같다. 

모든 색깔은 검은색에 가 닿고, 모든 빛은 하얗게 바래는 것인데, 세상의 모든 사물은 결국 ‘아무것도 없음’에 가 닿는다는 걸 바닥을 짚어본 자만이 알 수 있으리라. ‘지우고 고쳐 쓰다 확 불 지’르기를 얼마나 반복해 왔던가. 그 수많은 불면의 밤이 지나고 나면 내게도 투명한 홍시 하나가 툭, 내 앞에 놓였으면 좋겠다.

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 산문집 <비오는 날의 오후>를 펴냈다.

젊은시조문학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현재 오랫동안 하던 일을 그만두고 ‘글만 쓰면서 먹고 살수는 없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제주의소리>에서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연재를 통해 초보 농부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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