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발 밑 천길 낭떠러지를 모르고
내 발 밑 천길 낭떠러지를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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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詩 한 편] (38) 바닥 / 고은희
제주 안덕면 사계리 용머리해안 바닥에 붙어있는 거북손과 홍합들. ⓒ제주의소리
제주 안덕면 사계리 용머리해안 바닥에 붙어있는 거북손과 홍합들. ⓒ제주의소리

부유富裕나
부유浮游보다
바닥을
신뢰한 나는
가진 건 쥐뿔도 없는 바람 속을 떠돌다
깡그리
내려놓았다,
남들이 밟는 자리

아파트별 줄 세우는 세상 그쯤 다다르자
먼 하늘 기웃대던 꿈들 그만 접고 누워
죄 없는 땅바닥들에 송곳처럼 파고들었다

허나 거긴
실핏줄 참 우련한 삶이 뒹굴고
비좁은 가난이 뭉텅, 갈빛으로 여위고
바닥은
서로 몸을 포개
깊어지다
따뜻했다

-고은희 [바닥] 전문-

내 발 밑에 천길 낭떠러지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허공을 부유浮游 한다. 바람이 불면 바람에 몸을 싣고, 햇빛이 비치면 따뜻한 공기의 힘을 빌어 몸을 띄운다. 그 높이에서 아래로만 내려다보는 세상은 다 고만고만하고, 그 고만한 세상에서는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올라선 자리. 그러나 그건, 뿌리 없이 떠도는 시간이었을 뿐, 어느 한 곳에도 마음을 부려놓을 수 없다. 태생적으로 불안한 허공. 높은 데로 오를수록 추락의 깊이만 깊어질 뿐이라는 걸 그 때 왜 몰랐던 것일까. 

바닥을 신뢰한다. 막혀있다는 것은 무언가 조금씩 쌓이고 있다는 것이라는 걸 믿으며, 사방이 다 벽일 때, 바닥에 몸을 부린다. 더 이상 내려설 곳이 없다는 것은 얼마나 편안한가. 손에 잡은 공기마저 사치라 생각되는 지점, 손금 따라 흐르는 삶을 펴면, 더 이상 갈 곳 없는 것들이 조금씩 몸을 비비며 내 옆에 고이기 시작하고...
  
내 옆에서 느껴지는 타인의 체온만으로도 세상은 참 따뜻한 것. 거기가 바닥의 바닥이거나, ‘아파트별 줄 세우는 세상 그쯤’이거나, ‘남들이 밟는 자리’이거나, 혹은 한겨울에도 파도 끊이지 않는 바닷가 바위일지라도 상관없다. ‘실핏줄 참 우련한 삶이’이 있는 지점, 그 삶들이 ‘서로 몸을 포개’다 ‘깊어지’면 더 이상 ‘부유 富裕나, 부유 浮遊’에 연연해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 산문집 <비오는 날의 오후>를 펴냈다.

젊은시조문학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현재 오랫동안 하던 일을 그만두고 ‘글만 쓰면서 먹고 살수는 없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제주의소리>에서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연재를 통해 초보 농부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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