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72주년 기획] 4.3피해 회복탄력성 (5) 민주화 이전 회복탄력성

제주4.3은 현재 진행형인가? 아니면 70여년이 지난 이미 끝난 일인가? 최근 법원의 군법회의 공소기각 판결을 보더라도 4.3이란 족쇄를 풀지 못한 억울한 시민들이 여전히 고통 받고 있다. 긴 시간이 흐르면서 4.3을 겪은 피해자들의 마음은 어느 정도 나아졌을까. 전 국무총리소속 4.3위원회 전문위원 김종민은 최근 제주학연구센터의 지원을 받아 ‘4.3피해자 회복탄력성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4.3으로 생사의 고비를 넘긴 피해자들의 이야기와 함께 그들의 내적 회복은 어떻게 이뤄졌을까. [제주의소리]는 4.3 72주년을 맞아 김종민 전 전문위원의 연구를 1월6일부터 매주 월요일, 목요일 총 8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편집자 주]

Ⅲ. 제주4.3 관련 사회 환경과 4.3피해자의 회복탄력성 조사 분석

지금까지 제주4.3 관련 연구는 피해사실의 진상규명에 주목하였고, 현재는 미국의 책임 그리고 4.3피해에 대한 배상 등의 주제에 주목하고 있다. 다른 표현으로 지금까지 제주4.3 연구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진행되어왔다. 연구의 방향을 돌려서 피해자의 삶의 경로를 통해 제주4.3이 4.3피해자의 일상생활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미시적인 접근 역시 중요하다. 이와 같은 연구의 시각에서 회복탄력성이란 개념을 도입하고, 결정론적 관점에서 벗어나 다변적 상호작용 관점에 주목하여 조사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고자 한다.

4.3피해자는 ‘공산주의자’(빨갱이)로 지목되었고, 사회제도인 연좌제를 통해 취업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에서도 제약을 받았다. 특히, 민주화 이전에는 사회 환경이 직접 개인의 환복탄력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우선 1987년 민주화운동 이전에 연좌제가 4.3피해자의 회복탄력에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였는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둘째, 1987년 시작된 민주화운동은 시민 역량을 강화시켰고, 이를 통해 4.3연구소, 4.3유족회, 문화예술 단체 등 4.3관련 단체가 출범하였다. 이것이 4.3피해자의 회복탄력에 영향을 주었는지를 분석하고자 한다. 이와 더불어 오랫동안 단절되었던 4.3관련 대화의 장이 민주화운동을 계기로 열렸는지, 또한 4.3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일상생활에서 피해경험을 말함으로써 정신적 상처의 치료가 가능해졌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셋째, 민주화운동 이후 다양한 사회제도들 즉, 제주4.3평화공원 조성 및 재단 설립, 위패봉안소와 행방불명인 표석 등 위령시설 설치, 4.3추념일 지정 등이 4.3피해자들의 회복탄력에 도움을 주었는지를 조사하고자 한다. 특히 4.3특별법의 제정과 이에 따른 정부차원의 진상규명과 진상조사보고서 확정, 노무현 대통령의 사과가 4.3피해자들의 회복탄력에 어떤 작용을 하였는지를 알아보고, 현재 제주사회에 대한 4.3피해자의 인식을 알아보고자 한다. 

1. 민주화운동 이전 4.3피해자의 회복탄력성

4.3피해자는 사회 환경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사회 환경의 직접적 영향에서 4.3피해자는 어떤 삶의 경로를 통해 회복탄력의 과정과 정도를 보여주는지 조사 결과의 사례를 통해 분석하고자 한다.

1-1 능동적 회복탄력성: 일본 밀항

우선 사회 환경이 4.3피해자의 회복탄력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상황에서 4.3피해자가 스스로 능동적으로 사회 환경을 극복하며 회복탄력을 찾아내는 사례이다.

제주읍 이호2구(이하 모두 당시 지명을 사용함)에 살던 김○주는 11살 되던 1948년 12월 7일 토벌대가 마을에 불을 지른 후부터 가족 8명(조부모, 부모, 증언자, 동생 3명) 중 모친, 증언자, 막내 여동생만 생존하는 피해를 입었다. 1949년 1월 13일에 온가족이 산으로 피신하였다가 동년 4월 말경에 산에서 내려왔다. 김○주는 마을이 소개되고 자신의 집이 불에 타는 장면이 지금도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난 지금도 붉은 벽돌만 봐도 마을이 불에 탈 때 돌이 시뻘겋게 됐던 당시가 떠올라서 가급적 피해갑니다.”(김○주 녹취록 참고)

부친 없이 모친과 삶을 영위해야만 하는 어려운 일상을 그의 증언에서 알 수 있다.

“4.3 이후 아버지나 젊은 형이 있는 사람들은 생활이 굉장히 좋았습니다. 그러나 여성의 힘으로 밭농사 짓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밭을 갈아엎을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집안에 장정이 있고, 밭갈쇠 한 마리 있으면 다른 집 밭을 갈아주며 번 돈으로 한해에 밭 하나씩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없는 우리는 어머니와 같이 죽기 아니면 살기로 살았습니다. 볶은 콩에도 새싹이 나더군요.”(김○주 녹취록 참고)

“오도롱(제주읍 이호2구의 속칭)은 워낙 향학열이 높은 곳입니다. 옛날부터 양반들이 살았던 동네입니다. 일제 때도 글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야학도 활발하게 운영되었지요. 오도롱은 이웃마을 노형리와 더불어 원체 향학열이 높은 곳입니다. 돈을 버는 것보다도 일단 배워야 한다는 분위기가 더 컸던 마을이지요. 나는 4.3 당시 외도국민학교를 다녔고(4학년 8반), 6.25전쟁 때에는 제주중학교를 다니며 공부를 마쳤습니다. 이후 제주상업고등학교 야간반도 들어갔지만, 집안이 너무 어려워서 중퇴했습니다. 이후 딱히 직업을 구할 수 없어서 조농사와 보리농사를 지으며 살았습니다.”(김○주 녹취록 참고)

여기서 김○주는 스스로 특별한 선택을 하게 된다. 이는 곧 일본 밀항이었다.

“30대 초반에 일본 오사카로 건너갔습니다. 결혼 후 아들 둘도 있는 상태인데 혼자 일본으로 가서 공장에서도 일하고 이것저것 잡일들을 했습니다. 일본에서 25년간 살다가 55세가 되는 1992년에 일본에서 돌아왔습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일본에 그냥 눌러앉아 살았겠지만 나는 ‘55세 되면 반드시 돌아온다’고 다짐했었지요. 일본에서 번 돈을 제주로 보내면 부인이 알뜰하게 모았기 때문에 지금의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벌어온 돈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였지요. 돈은 내가 벌었지만 부인이 모든 궂은일을 다 도맡아 하며 오늘날 안정적인 삶을 구축하게 하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김○주 녹취록 참고)

결국 김○주는 당시로서는 고학력을 지녔지만 마땅히 취업할 수 있는 곳을 찾지 못하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일본 밀항을 감행함으로써 경제를 회복하는 능동적 회복탄력의 정도를 보여주고 있다.

1-2 능동적 회복탄력성: 모친과 절약

김○보(당시 2살)는 1948년 11월 7일 군.경 토벌대가 고향인 남원면 의귀리 마을에 불을 지르자 가족과 함께 산으로 피신했다. 1949년 봄 ‘귀순하면 살려준다’는 삐라를 보고 산에서 내려와 주정공장에 갇혔다. 어머니와 함께 주정공장에서 풀려났지만, 함께 갇혔던 조부와 부친은 어디론가 끌려가 행방불명됐다. 50년이나 지난 후인 1999년에 '수형인명부'가 발굴됨에 따라 조부와 부친이 군사재판을 받아 목포형무소에 수감됐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아직 두 돌도 지나지 않은 어린 나를 데리고 정말로 힘겹게 사셨다. 남의 집 밖거리를 빌어 살았는데, 사실 밖거리라기보다는 외양간 같은 곳이었다. 문도 없어 가마니로 문을 대신했고, 흙바닥 위에 짚을 깔아 그 위에서 잠을 잤다. 벽돌담도 촘촘하지 않아서 비가 들이치면 바닥이 빗물로 흠뻑 젖었다. 땅이 한 평도 없어 남의 밭을 빌어 농사를 지었다. 어머니는 어린 나를 혼자 둘 수 없으니 나를 애기구덕에 담아 밭으로 가서 재워놓은 후 일을 하셨다. 여성이 혼자서 어린 자식을 키우며 남의 밭 빌어 농사를 지으며 살았으니 얼마나 고생을 하셨겠는가? 나도 6~7세 무렵부터 어머니와 함께 밭에서 김매기를 했다. 주로 조를 재배했는데 조 농사는 김매기가 가장 큰 일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는 ‘남의 밭 김매기’도 했다. 남의 밭을 빌어 농사를 짓는 것은 일종의 ‘소작농’이고, ‘남의 밭 김매기’란 글자 그대로 다른 사람의 밭에 가서 무료로 김매기를 하는 것이다. 파종 전에 밭을 갈아엎어야 하는데, 쟁기를 끌 소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설령 있다고 해도 여자의 힘으로는 소를 몰아가며 밭을 갈 수가 없다. 그래서 밭갈쇠를 소유한 청·장년 남자에게 밭갈이를 부탁하려면 그 사람의 밭에 가서 사나흘 이상 김을 매줘야 한다. 이렇게 여러 날 김매기를 해야 밭갈이를 하루 빌 수가 있는 것이다. 굶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보니 초등학교(화산초등학교) 졸업 후 더 이상 학업을 이어가지 못했다. 어머니는 중학교 교복을 입고 지나가는 내 또래 아이들을 보면 눈물을 보이셨다. 그러나 나는 ‘학교에 보내달라’고 떼쓰거나 조르지 않았다. 어머니가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시는 게 느껴지는데 어떻게 떼를 쓸 수가 있겠나.”(김○보 녹취록 참고) 

“그렇게 절약을 해서 1969년 즉 내가 22살 때 밭 1040평을 샀다. 처음으로 내 명의의 밭이 생긴 것이다. 그 밭에서 수확한 것을 모으고 절약한 돈으로 밭을 늘려갔다. 그 결과 지금 중산층 정도의 삶을 살고 있다.”(김○보 녹취록 참고).

“어머니는 일제강점기와 4.3을 겪었고, 나도 4.3으로 인해 큰 어려움 속에 살았기 때문에 지금이 얼마나 좋은 세상인지 느끼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 그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면 지금이 좋은 세상인지 몰랐을 것이다.”(김○보 녹취록 참고)

"폭도 자식이라는 말을 늘 의식하며 살았다. 왜냐면 군·경 토벌대에게 아버지를 잃은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군가 내게 직접 ‘폭도 자식’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왜냐면 산에서 내려온 후 우리는 고향마을이 아니라 어머니의 친정 마을인 세화리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세화리에서는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형무소로 끌려간 사정을 모르기 때문에 ‘폭도 자식’이라는 말을 듣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계시지 않다 보니, 어떤 사람들은 내가 자기 눈에 거슬리면 ‘애비 없는 놈’, ‘홀어멍 자식’이라고 욕을 했다. 성인이 됐을 때라면 항의라도 했을 텐데, 사춘기 때 그런 소리를 들으면 더 이상 이 세상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김○보 녹취록 참고)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직장을 구한 것이 아니라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연좌제’를 직접 느끼진 않았다. 하지만 주변에서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연좌제의 피해도 있는 모양이다.”(김○보 녹취록 참고) 

가정 경제 환경이 절대 빈곤 상황이고, 또한 ‘애비 없는 자식’이라는 멸시를 당해 심리적으로 위축된 상황에서도 모친과 본인이 근검절약해 부를 축적해 가정 경제를 일으켰고 심리적으로 부정적인 상태를 능동적으로 바꿔 회복탄력성을 높이고 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강요배의 작품 '이승과 저승 사이', 1991년, 종이에 목탄, 58x49cm. 제공=제주도립미술관.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김○문(당시 2살)은 토벌대가 고향 마을인 제주읍 영평리에 불을 지르자 부모와 함께 남문로 오현단 부근으로 소개(疏開)했다. 그런데 소개지에서 부모가 경찰에게 끌려갔다. 모친은 고문을 받은 후에 풀려났지만, 부친은 1948년 12월 8일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수형생활 중에 행방불명되는 피해를 보았다. 김○문은 어려운 경제 상황에도 불구하고 광양초, 제주일중, 그리고 제주농고를 졸업해 당시로선 고학력자였지만 처음에는 마땅한 직업을 구하지 못했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본격적으로 농사를 시작했다.”(김○문 녹취록 참고)

김○문은 아라리 ‘함바집’에서 10년을 살다가 초등학교 5학년 때가 되어서야 고향 영평리로 복귀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2대 독자라 가까운 친척도 없고 나는 너무 어렸으니 집안에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었다. 누나들이 있었지만 큰누나는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갔고, 둘째누나도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시집을 갔다. 막내누나는 그 무렵 집을 떠나 인천에 있는 방직회사에 일하러 갔다. 그러니 나는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도와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방학 때는 매일 밭에 가서 김을 맸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는 밭을 갈았다. 하지만 밭을 가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밭갈쇠’가 아니라 길들여지지 않은 ‘생소’는 제멋대로 왔다 갔다 하기 때문에 밭을 갈기 어렵다. 집안에 아버지와 장성한 형이 있는 경우엔 농사짓는 게 쉬었다. 하지만 어머니와 어린 나만 있는 우리는 참으로 힘이 들었다. 결국 ‘밭갈쇠’가 있는 남의 밭에 가서 4~5일 김을 매주면 밭갈쇠를 하루 빌어 밭을 갈 수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밭갈이 하며 농사일을 도왔지만 등록금 내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내가 학교 다닐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죽기 살기로 일했다. 3000~4000평 정도의 밭을 농사지었지만 우리 힘만으로 농사를 지을 수 없어 다른 사람의 품을 빌리다보니 실제 수익이 얼마 되지 않았다. 남의 땅 빌려서 농사를 짓기도 했는데, 땅주인과 우리가 수확의 50%씩 나눠 갖는 경우도 있었고, 심할 때는 수확량의 70%를 땅주인이 가져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본격적으로 농사를 했는데 일반 밭농사 즉 보리, 조, 고구마는 가격이 별로 안됐다. 유채는 좀 돈이 되었다. 22살 때부터 감귤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즉 1968년부터 1970년까지 해마다 조금씩 감귤나무를 심었다.”(김○문 녹취록 참고)

“당시엔 야만적인 것이 있어서 힘이 센 사람은 잘 살고 약한 사람은 천대받았다. 그런 면에서 내가 많이 시달렸다. 학교갈 때 선배들 책가방 들고 다녔는데, 이유 없이 그들에게 매를 맞기도 했다. 만일 아버지가 2대 독자가 아니어서 친척이 많이 있으면 남들이 우리를 그렇게 함부로 무시하지 못했을 텐데, 내겐 형도 없으니 멸시를 많이 받았다. 약한 집안이라 무시당하면서 살았다. 아버지도 형도 친척도 없는 나 같은 사람들이 서러움을 많이 받았다. 22살에 결혼했는데 그 후에도 멸시를 당했다. 20대 후반까지는 이유 없이 매도 많이 맞았다. 형제가 쟁쟁하고 친척도 수십 명이 있다면 그러지 못했을 텐데 세력이 없어서 함부로 당했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 힘을 키웠다. 어릴 때 제대로 못 먹어 키는 작았지만 축구 등 운동을 잘했고, 힘을 키우니 웬만한 돌담도 한 번에 휙 넘을 수 있었다. 나는 술도 마시지 않으면서 체력단련을 했다. 그래서 서른 살이 될 무렵엔 마을에서 힘으로 나를 당할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리고 마을 일에 적극 봉사하다보니 서른 살에 마을 청년회장이 되었다. 그때부터는 멸시 당하지 않고 마을 지도자급이 되어 당당하게 살 수 있었다. 또한 영평동 4H 회장, 제주시 4H 후원회 청소년 사무국장, 영평동 새마을지도자, 제주시 농촌지도자연합회장, 제주도 농촌지도자부회장, 영평동 마을회장을 역임했다. 47세부터 60세까지는 비료 회사인 ㈜풍농 제주출장소장으로 일했다.”(김○문 녹취록 참고)

가정 경제 환경이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바로 농업을 통해 가정 경제를 일으키고 사회참여 및 봉사활동을 통해 심리적으로 부정적인 상태에서 능동적으로 회복탄력성을 높이고 있다.

경제적 안정은 심리적 안정을 찾는데 도움을 준 것으로 보인다. 물이 부족해 쌀 농사를 할 수 없고 환금가치가 낮은 조·보리 농사로는 절대 빈곤 상태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으나, 60~70년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감귤 농사는 경제적 안정을 찾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감귤나무 몇 그루만 있어도 대학 등록금을 충당할 수 있다 하여 한때 ‘대학나무’라고 일컬어 질 정도로 감귤 농사는 고수익 과일이었기 때문이다.

1-3 능동적 회복탄력성: 본적 이동 – 연좌제

부○휴는 1929년생으로 4.3 당시 제주읍 화북리에 거주하면서 제주농업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5학년). 1948년 10월 30일 무장한 군인 집으로 찾아와 형을 끌고 가서 사살하였다. 이때 부○휴는 학생임을 밝히며 위기를 모면했지만, 같은 해 12월 초 또다시 집으로 들이닥친 군인들에게 끌려가 9연대 주둔지이자 본인이 다니는 농업학교 천막수용소에 감금되었다. 20여 일 후인 12월 말에는 목포형무소를 거쳐 인천소년형무소에 수감됐다가 1년가량 지난 후인 1949년 10월 말에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 후 6.25전쟁 직후 벌어진 예비검속 학살은 다행히 피할 수 있었고, ‘빨갱이 딱지’를 지우기 위해 전쟁 직후인 1950년 8월 하순 자원입대를 하였다.

농업학교 졸업생이면 당시로선 인텔리인데 취직을 못했느냐의 질문에 “연좌제가 아니라 전과 경력이며, 학교를 졸업하지도 못했다”(부○휴 녹취록 참고), “사상이 깨끗하다고 증명하고 싶었다. 그래서 군대갔다온 직후 23세에 나 혼자만 본적을 화북리에서 이도리로 바꿨다. 탯줄을 태워버린 것이다.”(부○휴 녹취록 참고). 

부○휴는 1954년 1월에 제대한 직후 제주도보훈처에서 5년을 근무했다. 졸업은 못했지만 농업학교 5학년까지 다닌, 당시로서는 지식인이었고 농업학교 동창 등 인맥이 있었기에 공무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 그는 교육청 학무과, 조천중학교 행정실 등에서도 근무했고, 세화중학교를 끝으로 1975년에 8월 공무원 생활을 끝냈다. 그는 ‘왜 공무원 직을 그만 두었느냐? 신분에 위협을 느꼈느냐?’는 질문에 대해 “그때는 지역마다 담당 형사들이 있었는데 형사들이 찾아온 건 아니지만 마음 편안하게 살자고 그만두었다. 그만둘 무렵은 분위기가 어수선해서, 군사정부가 심할 때여서 40대 중후반에 내가 스스로 그만뒀다”고 말했다(부○휴 녹취록 참고). 박정희 유신독재 정권이 본격화되자 정신적으로 큰 부담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사회 환경이 4.3피해자의 진로에 직접 영향을 주자, 본적 이동이라는 일탈적이고 능동적인 방식으로 회복탄력성을 높이고 있지만, 한계에 부딪혀 공무원에서 스스로 물러난 사례인 것이다. 

1-4 능동적 회복탄력성: 진로 개척 

1948년 11월 군인들이 남원면 한남리에 들이닥쳐 불을 지를 때, 6살 고○조는 9살인 누나와 함께 올레에서 놀고 있었다. 

"당시 가을이어서 조 같은 곡식들을 멍석에 널어 말리고 있었다. 한남리 동남쪽에서부터 초가집에 불을 붙였다. 그러자 누나가 급히 자신을 이끌고 집 근처 대밭에 숨었다. 토벌대가 집안을 수색하고 불붙이는 것을 목격했다. 대나무가 타서 열기가 대단했는데 참아서 기다리느라 애를 먹었다. 해가 진 다음에 어머니가 와서 우리 남매를 이끌고 그날 밤부터 피난길에 올랐다." 

"어머니와 누나와 함께 야간 피난길로 외가(남원면 남원리 상동)로 피난 가서 숨어서 지냈다. 며칠 후 어머니와 아버지가 연락이 닿았다. 어머니가 아버지 보고 남원리로 오라고 했는데 아버지는 세 식구가 처가집에 이미 신세를 지고 있는데 자신까지 가기는 미안하다고 하면서 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결국 피신 생활 중 붙잡혀 행방불명됐는데, 나중에 '수형인명부'를 통해 아버지가 마포형무소에 감금됐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후 어머니 아시는 분의 권유로 서귀포 보목리로 갔다. 어머니는 길쌈을 잘했다. 길쌈 주문이 들어오는 날은 우리도 그 집에 따라 가서 점심도 얻어먹곤 했다. 보목리에서는 7살부터 15살까지 살았다. 그 후 어머니와 떨어져서 17살에 하효리에 있는 가구공장에 취업해 10년간 기술을 배웠다. 그러다 집을 짓는 목수로 전업해 73세까지 건설업을 했다. 고향 한남리에 가봐야 아무런 전망이 없으니까 기술계통으로 가기로 마음 먹었던 것이다. 가구를 배우는 시간이 10년이 되었다." 

"목수가 되어 큰 부자가 된 것은 아니지만, 7남매 모두 4년제 이상 교육시켰고 4남매는 서울로 유학을 보냈다. 해외연수, 대학원까지 보낼 수 있었다. 가구공장 다니던 26살에 결혼을 했다. 당시 기술직은 알아주지 않았고, 내 처지가 완전 빈손인데다가 내 집도 없이 남의 집에 살고 있어서 배필 구하기가 어려웠다. 다행히 상대방 부모님을 설득해서 결혼을 했다."

"누나는 11살에 남원리 이모집에 맡겨졌는데, 누나는 10대 초.중반기를 이모집에서 가사일을 하며 살았다. 그러다 독립해 혼자 자취를 하면서 전분공장(신효리)에 취업했고 물질도 했다. 돈을 벌기 위해 육지로 물질을 나가기도 했다. 누나는 물질을 1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 한 것으로 기억 된다."

"어린 시절을 가시밭길을 걸었으니 어려운 처지에 놓인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이 앞선다. 건설업을 하다 보니 안 가는 데가 없다. 돌아다니면서 보니까 너무나 열악한 주거환경이 많았다. ‘고쳐주고 갑써’라고 부탁이 자주 들어오니까 같이 목수일을 하는 사람들로 자원봉사 모임을 만들어 어려운 사람들의 집을 고쳐주었다. 서귀포건축기술자원봉사회를 조직해 1996년부터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라이온스클럽에도 가입해 28년차 불우이웃돕기하고 있다. 어려웠던 시절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어려운 사람들에게 내가 도울 수 있는 방법으로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 보니 2007년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고○조 녹취록 참고) 

가정 형편이 어려워 4.3을 겪은 후에도 어머니와 떨어져 살면서 친척집에 맡겨졌지만, 스스로의 진로를 개척하면서 기술를 배우고 더 나아가 자신의 목수 기술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등 능동적인 회복탄력성을 보이고 있었다.

1-4 조력자를 통한 회복탄력성: 결혼 

김○녀는 1948년 11월 13일 조천면 교래리에서 군인들이 쏜 총에 맞아 평생을 제대로 걷지 못하는 장애인으로 살고 있다. 그의 나이 4살 때 일이다. 그날 군인들이 갑자기 마을에 들이닥쳐 불을 질렀다. 김○녀의 어머니는 살려달라고 빌었지만 군인들은 김○녀의 어머니와 김○녀의 오빠(5살)에게 총을 쏘았다. 김○녀의 오빠는 즉사했고, 김○녀는 어머니에게 업혀 있었는데, 어머니의 옆구리를 관통한 총알이 김○녀의 왼쪽 다리에 부상을 입혔다. 이 사건으로 김○녀는 강렬한 트라우마를 지니게 되었고, 오빠와 자신을 데리고 빨리 피신하지 않은 어머니를 평생 원망하며 지내게 된다.

가정 경제도 빈약했다.

“먹을 거라고는 밀가루 수제비뿐이었다. 하도 수제비만 먹은 탓에 어머니는 그 후 돌아가실 때까지 수제비를 전혀 드시지 않았다.”(김○녀 녹취록 참조) 

다리에 총상을 입어 제대로 걸을 수 없었고, 동년배들에게 ‘병신’이라 놀림을 받은 탓에 초등학교 1년을 다니다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가정 경제가 너무 어려워 거동이 불편한 상태에서도 생계비를 벌기 위해 제주도청 구내식당에서 1995년까지 일했다.

“이때 제주시에서 딸(1973년생)과 함께 방 한 칸 얻어 살고 있었고, 연탄가스 때문에 죽을 뻔하기도 하였다. 집에 놀러온 어머니도 연탄가스에 죽을 고비를 겨우 넘겼다.”(김○녀 녹취록 참고).

하지만 그녀에게 회복탄력의 기회는 1990년대 말 재혼을 통해서 나타났다.

"현 남편을 만나기 전에는 불편한 몸으로 홀로 딸을 키우는 게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아픈 다리를 질질 끌면서 도청 식당에서 일했지만 월급이 7만원 밖에 되지 않아 집세를 내고나면 먹을 거 구하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도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90년대 후반에 현 남편을 만나 보살핌을 받으니 삶이 안정되었습니다. 우선 집세를 내지 않아도 되니 경제적으로 안정됐습니다.”(김○녀 녹취록 참고) 

“현 남편은 나를 무척 아껴주었습니다. 남편은 내 다리를 고쳐주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의료보험혜택도 못 받고 있던 나를 데리고 제주도에 있는 정형외과는 모두 다녀보았습니다. 그러나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여수에 훌륭한 의사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1998년경 여수재활병원에 가서 수술했습니다. 지금도 제대로 걷지 못하지만 이 정도 치료받은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있습니다.”(김○녀 녹취록 참고)

결국 김○녀씨는 열악한 경제 상황과 다리 불구로 인하여 회복이 어려운 심리적 상태였지만, 결혼해 남편의 보살핌을 받은 것이 회복탄력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박경훈의 작품 '언어연구-빨갱이', 500x200cm, 사진 위에 실크스크린, 1998.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1-5 조력자를 통한 회복탄력성: 일가친척

4.3 당시 19살이던 문○선은 갓 결혼해 임신한 상태로서 제주읍 연동리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1948년 12월 토벌대의 강경작전이 심해지자 온가족이 산으로 피신하였다가 1949년 봄 ‘귀순하면 살려준다’는 소문을 듣고 산에서 내려와 주정공장에 감금됐다. 약 3개월 동안 주정공장에 감금돼 있던 중 그곳에서 아기를 낳았다. 문○선은 풀려났으나 같이 감금돼 있던 시어머니는 전주형무소로 보내졌다. 시어머니는 형기를 마치고 귀환했지만 시어머니가 형무소에 함께 데리고 간 시아주버니(당시 2~3살)은 형무소에서 병사했다.

“그때는 해볼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산에 가서 땔나무를 모아 그걸 팔아서 살았다. 민오름 뒤 목장, 혹담밭 부근의 곶자왈까지 가서 땔나무를 해왔다. 잔잔한 나무를 모아서 베로 져서 왔다. 그때는 연탄과 기름이 없어서 주로 식당과 일반집에 팔았다. 장사도 못하고 농사도 지을 수 없었다. 조 농사는 비료를 안 줘도 되지만, 보리농사는 퇴비를 만들어 거름으로 줘야 하는데, 퇴비를 마련할 힘이 없으니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어 땔나무를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땔나무를 판 돈으로 조나 보리를 사서 범벅을 해서 먹었다.”(문○선 녹취록 참고)

“그런데 시아버지가 일본에서 보내준 돈으로 경제적으로 풀리기 시작했다. 일본에 계시는 시아버지가 ‘제주도에 사람이 다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화병이 났다. 시아버지는 몸이 아파도 돈을 모아서 제주로 보내줬다. 그 돈으로 이 집터를 사고 여덞말지기 땅을 샀다. 시아버지는 내가 70살이 되던 쯤에 일본에서 돌아가셨는데, 일본에서 시아버지가 지원해 준 것이 사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문○선 녹취록 참고)

그는 이제 한이 풀린 것 같느냐는 질문에 “지금도 4.3의 한이 풀린 것 같지 않다. 죽으면 풀릴테지요”라고 말했다(문○선 녹취록 참고). 

결국 남편을 잃은 피해자는 일본에 있는 시아버지의 경제적 지원 덕분에 가정의 경제적 안정을 찾고 자녀를 올바르게 키워 4.3 장한어머니상을 수상하는 회복탄력성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조부모의 조력으로 농사를 짓게 되는 사례도 존재한다. 4.3 당시 14살이던 안○행은 고향인 애월면 장전리에 소개령이 내려지자 가족과 함께 하귀리 개수동으로 소개하였다. 그런데 1948년 12월 5일경 경찰이 '월동용 장작을 마련해야 하니 도끼를 들고 집합하라'는 동원령에 따라 집을 나섰던 아버지가 행방불명되었다. 그로부터 5일 후인 12월 10일에는 경찰이 개수동에 들이닥쳐 주민들을 학살했다. 안○행은 경찰이 총격을 가할 때 모친이 자신을 감싸 안고 쓰러진 덕에 목숨을 구했으나 결국 부모 잃은 고아가 되었다.

“할머니가 찾아오셔서 수산리로 데려갔다. 그 뒤로 할머니와 할아버지 손에서 자랐다. 학교는 고성리에 있는 간이학교 다녔지만 소개령이 내려지는 바람에 학교 졸업도 못 했다. 바쁜데 학업을 이어갈 수 없었다. 솔직히 밥만 얻어먹었지, 눈칫밥 얻어먹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소개 가기 전에 밭을 살려고 아버지가 모아둔 돈이 있었고,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밭이 5000평이 있었다. 아버지의 형제들을 살리려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돈을 다 썼지만, 아버지의 밭은 남아 있었다. 우리는 땅 안 팔고 보리, 조, 메밀 등 잡곡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다. 그 당시 할아버지는 농사지을 힘이 있는 나이였다.”(안○행 녹취록 참고)

1940년생으로 4.3 당시 8살이던 오○은은 구좌면 상도리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1948년 12월 5일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들이 다짜고짜 집에 불을 지르면서 조부 오지현(吳志炫, 54세), 부친 오문형(吳文形, 28세), 모친 김정숙(金貞淑, 29세), 남동생 오차은(吳次銀, 7세)과 오계은(吳季銀, 5세)을 총살했다. 급히 숨었던 오○은만 목숨을 구하고 모두 희생된 것이다. 8살 나이에 갑자기 고아가 된 오○은은 그 후 외할머니, 큰어머니, 6촌 집을 전전하며 생활하게 되었다.

“친척 집에 살면서 눈칫밥을 많이 먹었다. 차라리 고아원이 더 낫지 않았을까 생각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큰어머니 집으로 갔다. 내 결혼도 큰어머니가 시켜주셨다. 농업고등학교까지 졸업할 수 있었던 것은 선친께 물려받은 재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반도 안 남았다.”(오○은 녹취록 참고)

“고등학교 졸업 이후에는 식품 가공업체인 ‘유창산업’에서 일했다. 5~6년 정도 일하고 나와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공기업에 일한 것은 아니어서 연좌제 피해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오○은 녹취록 참고)

홍○호는 1938년생 여성이며, 안덕면 동광리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1948년 11월 15일 동광리에 토벌대가 들이닥쳐 마구잡이로 총격을 가하자 주민들은 산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피신 중 동생 셋을 잃었고, 이듬해 자수하면 살려주겠다는 선무공작에 의해 3월 20일 막대기에 흰 천을 두르고 토벌대에 ‘항복’하였다. 

“우리는 항복한 후 ○○마을로 끌려갔다. 우리는 토벌대가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 쌓은 성 안에서 지냈다. 우리가 지낸 곳은 마을 사람들이 보초를 서는 곳 바로 아래였다. 우리는 ‘폭도자식’이라는 욕을 들었고 돌에 맞기도 했다. 너무 무서워서 그때 잡혀간 사람들이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함께 잡혀갔던 사람들과 ‘앞으로 그쪽으로는 오줌도 싸지 않겠다’고 다짐도 했다. 이후 우리 마을 사람들은 화순지서로 끌려갔다. 화순지서에서 나와 작은 배에 탔다. 배를 타고 한참을 가서 지금 천지연 폭포 아래 항구에 배를 댔다. 이후 근처에 있었던 단추공장에 감금됐다. 1949년 겨울, 단추공장에서 풀려난 후 우리 가족은 화순에서 새로운 삶을 살았다.”(홍○호 녹취록 참고) 

이 시기에 부모님은 남동생을 낳게 된다.

“그러나 부친이 갑자기 별세하고, 다른 사람의 집을 빌려 살았다. 집 주인의 눈치가 많이 보여 먹는 것조차 마음이 편치 않았다. 눈에 거슬려 ‘폭도 자식’이라 욕할까봐서였다. 마을이 불타 동광리 집이 없어진 이후 도피 생활을 마친 이후에도 한동안 생활이 곤궁해 이불 한번 덥지 못했다. 쌀이 없어 밀껍질을 구해다 삶아서 먹곤 했다. 이대로 살 수는 없을 것 같아 어머니가 동네 사람들의 손을 빌려 공터에 움막을 지었다. 나무로 벽을 만들고 억새를 이어 지붕을 만든 3~4평 남짓한 작은 움막이었다. 집이라기엔 초라하기 짝이 없었지만 손가락질하는 소리를 듣지 않게 되어 우리 가족은 참 기뻤다. 겨울철 눈이 내리면 지붕 사이로 눈이 떨어지는 집이어도 마음이 편했다. 7년을 움막에서 살았다.”(홍○호 녹취록 참고)

결혼을 하여 친정과 떨어져 살았는데 어머니가 별세하여 어린 동생을 친정으로 데려올 수밖에 없었고, 친정 눈치를 보며 생활을 해야 했다.

“꽃다운 20대부터 30년간 먹고 살기 위해 아등바등 살았다. 내 나이 50이 되던 무렵 형편이 나아졌다. 우리 가족들의 이름으로 된 밭을 사고, 소도 키우며 먹고 사는 걱정을 덜었다. 4.3으로 가족과 집을 잃었던 나의 어린 시절을 딛고 가정 형편이 나아지면서 서글프고 고통스러운 나날들이 끝났다.”(홍○호 녹취록 참고)

여성으로서 어려운 경제·사회 환경 특히 심리적으로 ‘폭도자식’이라는 언어 폭력을 당하며 살아왔지만, 결혼을 통해 조금씩 회복해 나가는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 김종민은?

김종민(59)은 4.3의 최고 전문가로 꼽힌다. 일간지 기자 4.3취재반 13년, 국무총리 소속 4.3중앙위원회 전문위원 13년, 그리고 지금까지 30여년간 오로지 4.3 연구에만 매달리고 있다. 제민일보 ‘4.3은 말한다’ 취재보도, 정부 진상조사보고서 작성, 4.3평화기념관 전시 설명문 작성, 희생자·유족 인정, 일부 희생자를 제외시키라는 극우보수단체와의 숱한 송사를 맡아 승리로 이끌었다. 지금은 낮엔 농사를 짓고 밤엔 글을 쓰고 있다. 기자시절 무려 7000여명의 4.3유족들로부터 증언을 채록한 역사학도(고려대 사학과 졸업)로서의 집요함을 보였다. 이 방대한 증언은 4.3의 진실을 밝히는데 단초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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