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154.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김형철 역, 서광사, 2003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김형철 역, 서광사, 2003. 출처=알라딘.

1. “너 몇 살이야?”

나라에 대한 걱정을 몸소 실천으로 옮기고자 하는 주변 선생님들 덕에 지난 연말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여의도 집회에 나간 적이 있다. 추운 길바닥에 몇 시간 앉아 있을 것에 대비해 우선 이른 저녁을 먹기로 하고 여의나루역에서 만나 쇼핑몰의 식당가로 이동했다. 지하철 개찰구를 나오자마자 재미있는 안내판이 보였다. 태극기 집회는 몇 번 출구로 나가고 촛불집회는 몇 번 출구로 나가라는 안내판이었다. 우리는 밥을 먼저 먹기로 했으므로 식당가와 이어진 다른 통로로 향했다. 밥 때도 아닌데 밥을 먹으려니 좀 힘들었지만 어쨌든 뜨끈한 국밥으로 배를 채웠다. 쇼핑몰에 오가는 가족, 친구, 연인들의 모습이 평화롭게 느껴졌다. 수많은 상품들과 맛있는 음식들, 여유 있게 쇼핑을 즐기는 시민들의 모습은 잠시 우리가 이곳에 온 목적을 잊게 만들었다. 식사 후 지하철역을 빠져 나가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고, 아무것도 준비해 오진 않았지만 무료로 나누어주는 시위 용품들만으로도 무리에 섞이는데 전혀 위화감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 심지어 함께 간 연세 많은 선생님이 손이 시려 손을 비비고 있자, 옆에 앉은 젊은 처자가 찜질팩을 몇 개 건네주기도 했다. 

무대에서는 우리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를 부르는 공연이 계속 이어졌다. 앉아서 구호를 따라 외치긴 했으나 개인적으로는 별 감흥이 있는 시위는 아니었다. 경찰에 잡혀갈 위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진이 채증 되어 수배될 위험도 없고, 최루탄, 물대포, 곤봉의 위협이 없는 시위는 마치 축제 공연에 참석한 것과 같이 평화로웠다. 몇 시간 앉아 있자니 춥기도 했고 지루하기도 해서 슬그머니 함께 간 선생님들한테 커피나 마시자고 제안했더니 나랑 같은 심정이었는지 그러자고 했다. 길 건너편에 스타벅스가 보여서 우리는 그리로 이동했다. 스타벅스 안에는 외국인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몇 있었고 나머지는 대부분 시위용품을 탁자위에 둔 것으로 보아 시위하러 온 사람들로 보였다. 우리는 나이든 ‘꼰대’답게 80년대 군부독재 시절의 살벌했던 시위 분위기를 이야기하면서 오늘날의 싱거운 시위를 개탄했다. 그런 이야기도 시시해지자 우리는 집에 돌아가기로 하고 스타벅스를 나왔다. 

지하철역에 다시 들어서자 이번에는 다른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각자의 시위 용품을 보이지 않게 가방에 넣고 지하철역에 입장하라는 안내문이었다. 시위의 흥분(이라고 할 것은 별로 없었지만)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편 시위대를 만날 경우 자칫하면 싸움이 벌어질 수 있으니 사전에 그런 상황을 예방하자는 안내문이었다. 우리는 얼른 표가 날만한 시위 용품들을 가방에 챙겨 넣었지만 안내문을 무시하고 지하철역에 들어가는 사람도 꽤 많이 있었다. 플랫폼에서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시위대들이 삼삼오오 무리지어 몰려들어 왔다. 흥미 있는 사건은 지하철을 타고 나서 벌어졌다. 한 쪽 시위대가 다른 쪽 시위대를 향해 욕을 시작한 것이다. 지하철 승객의 관심은 두 시위대의 대결에 쏠렸다. 욕을 먹은 시위대 쪽의 한 사람이 지지 않고 욕으로 맞섰다. 욕으로 승부하는 싸움이 대개 그렇듯이 싸움은 욕의 내용보다는 욕하는 사람의 성량으로 승패가 결정났다. 싸움은 결국 “너 몇 살이야?” 수준으로 마무리되었다. 욕설의 내용은 두 쪽 다 저질스러웠지만 싸움은 귀여운 면이 있었다. 격렬한 욕이 오갔지만 아무도 객차 안에서 유혈사태가 일어날 것이라고 우려하지 않았으며, 서로에 대한 경멸과 혐오감을 표현하는 정도로 끝났다. 그 귀여운 싸움은 풍요로운 쇼핑몰 식당가의 국밥과 스타벅스 커피로 배가 불러진 게으른 시위꾼의 눈에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평화로운 일상으로 각인되었다. 

2. 진리는 대립의 중간에 있다

두 시위대가 추구하는 공통의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자유’일 것이다. 태극기 부대는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고 외친다. 빨갱이인 대통령이 나라를 통째로 북한의 김정은에게 헌납하고 자유대한민국을 공산화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공산화되면 우리는 자유를 잃고 노예 같은 삶을 살 것이기 때문에 좌파 정부를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보기에 촛불시위대는 김정은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는 빨갱이들이므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서라도 제거해야 할 적이다. 다른 한편으로 촛불 시위의 참가자들은 우리나라의 ‘자유민주주의’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오랜 시간 기득권을 누려온 재벌, 검찰, 언론 등과 같은 특권 세력이 그 제도적 개혁을 가로막음으로써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양극화 문제, 여러 소수자 문제 등을 해결하는 데 방해가 되는 정치 세력들이 자유 영역의 확장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태극기 부대는 반공이데올로기를 무기로 국민을 우민화한 적폐세력의 선동에 놀아나는 불쌍하고 어리석은 사람들로서 올바른 교육을 통해 계몽되어야 할 개인들이다.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세력은 과연 누구일까? 누가 ‘자유민주주의자’로서 자격을 갖춘 것일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존 스튜어트 밀이 1859년 출간한 ‘자유론’(김형철 역, 서광사, 2003)을 들춰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 책에서 밀이 논한 ‘자유’의 개념은 ‘자유민주의의’의 이념적 전거가 되었다. 밀이 이 책에서 다루는 ‘자유’는 개인의 자유의지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사회가 개인에 대하여 정당하게 행사할 수 있는 공권력의 성질과 한계에 관한 것”(13쪽)이다. 밀은 사회가 간섭해서는 안 되는 사태에 대한 명령을 내릴 경우 그것은 사회적 폭압에 해당하며, 개별성의 발전을 저해해서 결국 인간성을 사회가 설정한 모형에 부합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회가 간섭해서는 안 되는 사태’에 해당할까? 그것은 “단순히 자신에게만 연관된 부분에 한해서, 개인의 독립성은 당연히 절대적이다”(23쪽)라는 문장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이 문장을 뒤집어서 말하면 사회가 간섭할 수 있는 부분은 개인의 행위가 ‘타인과 연관되어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몇 가지 ‘자유’의 개념이 도출된다.

“첫째, 자유는 의식의 내면적 영역을 포함한다.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 양심의 자유, 사상과 감정의 자유, 그리고 실천적 혹은 사색적, 과학적, 도덕적 혹은 신학적 등과 같은 모든 주제에 대한 의견과 감정의 절대적 자유를 요구한다. 의견을 발표하고 출판하는 자유는 다른 원칙하에 속하는 듯이 보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이 타인과 관계되는 개인의 행동 부분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상 자체의 자유와 거의 같은 정도로 중요하고, 대부분 같은 이유에 근거하기 때문에 양자를 실제로 분리할 수 없다. 둘째, 그 원칙은 기호를 즐기는 자유와 목적을 추구하는 자유를 요구한다. 비록 우리의 행위가 그들의 눈에 바보스럽거나, 기이하거나, 잘못된 것으로 보일지라도, 우리가 하는 행동이 동포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에서는 그들로부터 방해받지 않으면서 우리 자신의 개성에 적합한 인생 계획을 설계하고, 초래될 결과를 감수한다는 조건하에서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행할 수 있는 자유를 요구한다. 셋째, 각 개인이 갖는 이 같은 자유로부터 동일한 한계를 가지는 개인 간의 결사의 자유가 도출된다. 즉 타인을 해치려고 하는 목적을 제외하고 단결할 수 있는 자유이다. 단결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성년이고, 강제되거나 기만되어서는 안 된다.”(26쪽)

이런 자유의 개념에 따르면 우리는 타인에게 해가 되는 않는 한에서, 양심, 사상, 감정, 출판, 기호, 목적, 결사의 자유를 사회에 의해 간섭당하거나 제한당해서는 안 된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태극기 부대건, 촛불집회건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 한, 누려야 할 자유를 누린 셈이 된다. 그러나 그 어느 쪽이든 상대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상대를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면 그것은 ‘타인에게 해가 되는’ 상황에 해당되므로 마땅히 처벌받아야 한다. 지하철의 싸움처럼 욕을 하는 경우는 어디에 해당할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밀이 직접 말하고 있는 대목이 있다.

“일반적으로 난폭한 토론이 의미하는 것, 즉 욕설, 냉소, 인신공격 등등과 같은 것에 관하여 말해 보자면, 만일 이러한 무기가 양편 모두에게 금지되도록 동일하게 제안된다면, 그 무기에 대한 비난은 당연히 더 많은 공감대를 형성할 것이다. 그러나 그 비난은 유력한 의견에 반대하는 자가 그 무기들을 사용하는 것만을 억제하기 위하여 요구된다...(중략)...진리와 정의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비난적인 언어가 인기 없는 의견에 대하여 사용되는 것을 억제하는 것이 그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중요하다.”(73-74쪽)

난해한 번역체 문구 때문에 문장의 의미를 한 번에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다음과 같은 말인 듯 싶다. 즉 밀은 욕설을 금지하는 것은 소수의견의 입장을 가진 사람들에게 불리한 경우가 많으므로 신사적인 토론을 장려하되 욕설을 금지해야 한다면 소수자를 욕하는 쪽에 더 엄정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것으로 보인다. 자유주의자로서 밀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대립하는 의견들이 분분해서 사회가 혼란스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의견이 다른 의견을 압도해서 여러 의견들이 대립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공할 만한 해악은 부분적 진리들이 격렬하게 대립하는 경우가 아니라, 반쪽 진리가 나머지를 은밀하게 탄압하는 경우에 일어난다. 사람들이 찬반양론을 다 듣도록 강제될 때는 그래도 항상 희망이 있으나 오류가 편견으로 경색되고 진리 자체가 허위로 과장됨으로써 진리의 효과를 상실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들이 한쪽의 의견에만 주의를 기울일 때이다.”(71쪽)

밀은 무오류성을 전제하는 것이야말로 자유주의 사회의 가장 큰 해악이며, 자유주의를 위협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의견 차이가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주제에 관해서는 진리가 두 개의 대립하는 근거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균형에 의존한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밀의 주장을 토대로 우리는 ‘자유주의자가 되기 위한 조건’을 말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상대방이 아무리 위험한, 혹은 멍청한 주장을 하는 것으로 보여도 나의 의견이 완벽한 진리가 아닐 수 있다는 반성에 입각해서 상대가 의견을 말하고 표현할 자유를 주어야 한다. 물론 그의 의견이나 행동은 나의 의견이나 행동과 마찬가지로 타인에게 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 단지 상대방이 어떤 의견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제거해야 한다거나 그를 사회에서 격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이미 자유주의자가 아니다. 이런 조건에 입각해서 지하철의 싸움을 자유주의자의 토론으로 재구성해보자. 

태극기 부대 A씨: 촛불을 드신 것을 보니 검찰 개혁을 요구하러 오셨군요. 추운데 고생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살아있는 권력을 수사하는 검찰은 잘 하고 있는데 굳이 개혁할 필요가 있나요? 그보다는 공산화를 꾀하는 정권을 심판해야 하지 않을까요?

촛불 시위대 B씨: 연세가 제 아버지뻘이신데 시위에 참여하실 정도로 정정하시니 보기 좋습니다. 제 생각에는 검찰이야말로 살아 있는 권력으로 여겨지고 어떤 식으로든 견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이 되어서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는 한국이 공산화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우니 어르신이 그런 염려는 이제 그만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날도 추운데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태극기 부대 A씨: 젊은이도 조심해서 들어가구려. 그럼 다음 시위 때 다시 봅시다. 

물론 이런 상황은 벌어지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그런 현실이 우리가 ‘자유민주주의’로 가기 위한 여정이 아직 많이 남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 이유선 교수

현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고려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 철학박사
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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