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72주년 기획] 4.3피해 회복탄력성 (6) 민주화운동을 통한 회복탄력성

제주4.3은 현재 진행형인가? 아니면 70여년이 지난 이미 끝난 일인가? 최근 법원의 군법회의 공소기각 판결을 보더라도 4.3이란 족쇄를 풀지 못한 억울한 시민들이 여전히 고통 받고 있다. 긴 시간이 흐르면서 4.3을 겪은 피해자들의 마음은 어느 정도 나아졌을까. 전 국무총리소속 4.3위원회 전문위원 김종민은 최근 제주학연구센터의 지원을 받아 ‘4.3피해자 회복탄력성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4.3으로 생사의 고비를 넘긴 피해자들의 이야기와 함께 그들의 내적 회복은 어떻게 이뤄졌을까. [제주의소리]는 4.3 72주년을 맞아 김종민 전 전문위원의 연구를 1월6일부터 매주 월요일, 목요일 총 8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편집자 주]

2. 민주화운동을 통한 공동체 변화와 4.3피해자의 회복탄력성

민주화운동을 통한 공동체의 변화를 우선 공동체의식의 변화와 유족회 발족으로 구분하였고, 이런 공동체가 회복탄력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분석하고자 한다.

2-1 공동체 의식의 변화와 회복탄력성

공동체 의식의 변화와 회복탄력성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사례는 다음의 사례가 유일하였다.

양○천은 1947년생으로 남원면 의귀리에서 토벌작전과 예비검속으로 부친과 형을 잃는 피해를 당하였고, 모친이 2살배기 양○천을 데리고 언니가 사는 집(신흥리)으로 피신하여 생존하게 되었다. 신흥에서 흥산초등학교를 다니다, 의귀리 마을 복귀가 이뤄지면서 의귀초등학교를 졸업하였고, 남원중학교와 서귀농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건국대학교 축산가공학과에 합격하였으나 가정 경제 형편상 대학교를 포기하고 공군하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중사로 28세에 제대를 하였다.

“아버지 명의로 땅이 만평 정도 있었다. 누이들에게 나눠주고 6000평을 내가 가졌다. 신흥리에서는 어머니가 남의 일도 하고 겨우 살았다. 신흥리에서 의귀리까지 밭에 일하러 다녔다. 밭은 넓었지만 요즘처럼 제대로 경작하기 어려웠다. 특히 나는 너무 어렸고 어머니가 여자 힘으로 혼자 밭농사 하는 건 힘든 일이었다. 특히 밭가는 것은 여자가 못했다. 소 있는 집에 밭갈쇠를 빌렸다. 어머니가 그 집에 가서 며칠 일을 하고 밭갈쇠를 빌렸다. 육체노동으로 다 농사짓지 못하니까 병작을 줬다.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모친이 용돈을 주는 일이 거의 없어 집에서 계란을 가지고 가서 공책을 샀다. 지네를 잡아서 한약방에 팔아서 용돈으로 썼다”(양○천 녹취록 참고). 

“제대후 다른 직업을 갖지 않고 농사를 지었다. 이때 6000평 밭에 귤나무를 300주를 심었다. 제대할 때 전별금과 퇴직금으로 40만원을 일시금으로 받았다. 그걸로 집을 지었다. 또한 이웃의 친한 사람이 내가 제대하니까 친하게 지내자해서 우리집에 와서 경운기로 밭도 갈아주고 농사법도 가르쳐줬다. 탱자나무 접붙이는 것도 배우면서 묘목생산을 해서 6000평에 모두 심었다. 심어서 3년 후 700관이 달렸다. 1975년도는 감귤농사가 본격화된 시기였다. 묘목도 팔고 밀감 수확량도 많아지면서 생활이 나아졌다. 그 이후에 서귀포집도 샀다. 신시가지 대림아파트도 샀다”(양0찬 녹취록 참고). 

양○천은 군대 제대 후 바로 1975년경 삼묘동친회 회장직을 수행했다. 이는 다른 4.3피해자의 회복탄력의 과정과 정도에서 차이를 보이는 대목이다.”(양○천 녹취록 참고).

“1984년에 현의합장묘에 비석을 세우니까 자꾸 서귀포경찰서 남원지서에서 조사를 나왔다. 유족회 창립 후에 남원지회가 먼저 생겼다. 남원지회 사람들이 모여서 회의하면 뒷날 아니면 며칠 후에 남원파출소에서 조사가 나왔다. 현의합장묘에 누가 있냐? 등등을 캐물었다. 이때 나는 이 사람들이 조사해서 뭐 할건가 생각했다”(양○천 녹취록 참고). 

“의귀리 학살을 자행했던 군인들의 만행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군 복무를 하며 듣고 보던 이야기를 통해 ‘군대는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적극적 참여 동기는 4.3연구소 행사를 했을 때부터이다. 1989년에 유족회도 막 출범할 때였다.”(양○천 녹취록 참고). 

“기존 현의합장묘가 길가에 붙어있어서 길을 넓히는 데 지장이 있었고, 우리 유족 입장에서도 우리 손으로 제대로 다시 한 번 봉분을 잘 꾸며 모셔보자는 여론이 생겨 이전한 것이다. 이전된 위치는 수망리 893번지이다. 즉 현의합장묘가 의귀리에서 수망리로 2003년에 이장한 것이다. 유족의 손으로 2003년에 현의합장묘에 안장하면서 마음이 너그러워진 것 같다”(양○천 녹취록 참고).

이처럼 양○천은 민주화운동 이전 군대를 제대하자마자 고향에 돌아와 현안 문제에 대해 능동적이며 의식적인 행동으로 삼묘동친회(현의합장묘) 회장을 맡으면서 회복탄력의 과정을 경험하고 있다. 특히 민주화운동 직후에는 더욱 적극적 현의합장묘 문제뿐만이 아니라 4.3 문제 해결에도 앞장을 서며 회복탄력의 긍정적 정도를 추구하고 있다. 

현의합장묘 4.3유족회는 지난 2004년 10월 7일 영령위령제와 묘비제막식이 가졌다. 현의합장묘는 1949년 1월 12일 군경토벌대에 의해 집단 학살 당한  의귀, 수망, 한남리 주민 80여명을 모신 곳이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현의합장묘 4.3유족회는 지난 2004년 10월 7일 영령위령제와 묘비제막식이 가졌다. 현의합장묘는 1949년 1월 12일 군경토벌대에 의해 집단 학살 당한 의귀, 수망, 한남리 주민 80여명을 모신 곳이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천에게는 회복돼야 할 부정적 부분이 남아있다.

“지금도 꿈 때문에 괴롭다. 죽이는 모습, 현의합장묘 영령들 발굴하는 모습, 잡동사니로 나타났다. 누군가 찾아와서 4.3에 대한 얘기를 하게 되면 정신적으로 괴롭고 꿈도 꾸곤 한다. 광역형 정신보건센터에 가서 얘기하고 서귀포 병원에서 치료하기도 했다. 그러나 낫지 않았다. 그러다 소개를 받아 올해 제주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박준혁 교수의 처방을 받아 2달간 약 먹고 나았다. 그분이 나의 사연을 듣고 약 처방을 해줬다. 그래서 조금 나아졌다”(양○천 녹취록 참고). 

또 다른 사례는 김○주의 경우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에서 돌아온 1992년 말쯤에 마을(이호동)에 잔치가 열렸다. 그 잔칫집에서 ‘우리 동네가 이렇게 큰 희생을 당했는데 이를 기록이라도 남겨야 하는거 아니냐’라는 말이 어른들 사이에서 나왔다. 어른들은 나에게 그 책임을 맡겼다. 각 지역의 책임자들을 다 정해서 역할을 분담했지만 끝까지 추가 조사 하는 사람이 없어서 나중에는 결국 내가 마무리를 지었다. 집마다 다니면서 증언을 듣고 1995년에 보고서를 최종 마무리했다. 보고서가 발표된 1995년은 김영삼 대통령 때다. 그때는 군사정권이 좀 마무리되고 민주화운동이 있었던 때였기 때문에 4.3에 대한 이야기를 그나마 할 수 있었던 거다.”(김○주 녹취록 참고).

제주지역 동차원에서 실태조사를 진행할 수 있었음은 마을 주민 의식의 변화와 김○주의 적극적인 행동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 이는 민주화운동 이후 공동체의 변화가 회복탄력성에 영향을 주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임이 분명하다.

다음은 민주화운동 이후 도민인식의 변화를 정리하고자 한다. 오○은은 “이젠 연좌제 없어지고 4.3특별법이 제정된 후부터는 4.3을 알려는 학생도 많아지고. 요즘은 많이 풀렸다. 옛날 같으면 무슨 말이라도 하면 바로 ‘폭도 새끼’라고 했는데, 이제는 그렇게 하는 사람은 없고 그런 눈짓도 안 한다. 그렇게 말하던 사람들이 오히려 많이 눈치 보는 것 같다. 과거엔 말로 밀리거나 힘으로 밀리면 바로 ‘폭도 새끼’라고 했는데 말이다. 유족회 활동은 하지 않지만 위령제는 간다. 4.3공원 만들고 추모식하는 걸 보면서 많은 위안을 받는다. 유족이 아니라도 제주도민이면 다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오○은 녹취록 참고)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홍○호는 “1980년대 후반부터 경제적인 상황은 나아졌지만 내 마음 속에는 ‘폭도자식’라는 낙인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그러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4.3에 대해 정부차원에서 진상규명을 하려는 시도가 큰 위안을 주었다. 특별법 제정과 노무현 대통령의 공식사과, 위령제 참석 등이 나를 떳떳한 존재로 만들어줬다. 제주4.3평화공원에서 보여주고 있는 다양한 전시물들이 나 같은 사람들이 죄가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들이 나에게 큰 위로를 해준다. 한때는 나의 고향, 안덕면 동광리를 떳떳하게 밝히지 못했던 세월도 있었다. 우리 마을이 ‘폭도마을’이라는 낙인이 찍혀 혹시나 사람들이 나를 안 좋게 볼까봐 말하지 못했다. 유족회 활동은 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 마을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4.3 때 우리 마을과 내가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날이 와서 기분이 좋다”(홍○호 녹취록 참고).

2-2 유족회 활동과 회복탄력성

유족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응답한 사례의 수가 적다. 우선 김○보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4.3희생자유족회 활동은 2006년경부터 시작했다. 그전엔 중부님이 유족회 행사에 다녔는데 내게도 참여하라고 해서 그때부터 유족회 활동을 했다. 전국의 형무소 터를 매년 순례하면서 점점 더 활동적이 되었다. 진실 밝히는 것이 후손의 도리라고 생각해 적극적으로 유족회 활동을 하게 되었다”(김○보 녹취록 참고). 

“지금까지 유족회 활동을 15년 정도 했으니 2000년대 초반부터 활동한 셈이다. 우선 행방불명인유족회 영남위원장을 6~7년 했다. 현재는 제주4.3행방불명희생자유족협의회장, 4.3평화합창단장, 4.3명예교사 역할을 맡고 있다. 4.3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만큼 열심히 하려고 앞장서고 있다. 자식의 도리로서 비참하게 돌아가신 원혼을 달래고 싶다. 그래서 아버지가 ‘우리 아들 잘하고 있다’고 동료들에게 자랑이라고 할 것은 아닌가 하면서 4.3 일에 나서고 있다.”(김○문 녹취록 참고).

유족회의 첫 출발인 ‘반공유족회’는 4.3피해자의 회복탄력성에 낮은 정도의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회복탄력성을 높이는 기회라기보다는 도덕적 차원인 ‘도리’로써 유족회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반공유족회’ 시기에는 유족회 활동에 적극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유족회의 잘못을 지적하는 경우도 조사에서 노출되고 있다. 유족회가 활성화된 큰 계기는 1999년 9월 '수형인명부' 발굴이다. 이에 따라 ‘4.3행방불명인유족회’가 출범했고, 현재 유족회의 핵심 인사들은 대개 행방불명인 유족들이다. 그동안 ‘전과자의 후손’이라는 낙인에 찍혀 오랜 세월 숨죽이며 살아온 유족들이 멍에를 벗어던지자 가장 강력한 유족 집단이 된 것이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4.3희생자 유족들이 4.3평화공원 위패를 살펴보고 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3. 민주화운동 사회제도의 변화와 4.3피해자의 회복탄력성

민주화운동 이후 사회제도의 변화(4.3평화공원, 4.3추모제 등)가 4.3피해자의 회복탄력성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 대한 분석을 사례들을 통해 진행하고자 한다.

우선 김○보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2008년 4.3평화공원에 ‘행방불명인 표석’이 설치된 것에 위안을 받고 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무덤이 없어 벌초 때마다 크게 섭섭했는데, 비록 시신이 없는 빈 무덤의 형태이지만 행방불명인 표석이 만들어지니까 ‘이곳에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계신다.’는 마음을 갖고 있다. 그래서 설과 추석 명절을 지낸 후 명절 음식을 갖고 온가족이 행방불명인 표석에 찾아와 참배한다. 또한 4월 3일 ‘4.3추모제’와 ‘행방불명인 진혼제’ 때에도 찾아간다. 그러니까 1년에 최소 4번은 찾는 것이다”(김○보 녹취록 참고). 

김○녀 역시 “4.3평화공원에는 돌아가신 어머니와 오빠가 계시기 때문에 매년 추모제에 간다. 거기 가면 ‘나라가 희생자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구나!’라는 생각에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된다”(김○녀 녹취록 참고)라고 증언하고 있다.

더 나아가 안○행의 증언이다.

“위안이 된다. 평화공원에 행방불명인 표석도 그렇고 제주도민으로서 4.3 피해를 본 사람들은 억울한데… ‘폭도’라는 말만 안 들어도 좋다. 위안이 많이 된다. 억울한데 표석해주니까, 국가에서 해주니까. 4월 3일에 가서 제사도 지내고, 어머니 묘소 옆에 아버지 비석도 세워두었다. 평화공원 행불인 표석을 보면, 이름이 있으니 묘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4.3 위령제 때 동생하고 표석에 제일 먼저 간다. 유족회 활동은 안 하고 4.3 위령제만 참석한다“(안○행 녹취록 참고).

양○천도 다음과 같이 구술하고 있다.

“행불인 표석에 형님 표석도 있다. 유해 발굴로 유해봉안관에 형님이 안치된 것이 맺힌 한을 푸는데 도움이 되었다”(양○천 녹취록 참고). 

이처럼 4.3평화공원은 4.3피해자에게 심리적 안정과 위로를 가져오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다. 또한 4.3추모제도 4.3피해자에게 심리적 안정을 찾게 해주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 김종민은?

김종민(59)은 4.3의 최고 전문가로 꼽힌다. 일간지 기자 4.3취재반 13년, 국무총리 소속 4.3중앙위원회 전문위원 13년, 그리고 지금까지 30여년간 오로지 4.3 연구에만 매달리고 있다. 제민일보 ‘4.3은 말한다’ 취재보도, 정부 진상조사보고서 작성, 4.3평화기념관 전시 설명문 작성, 희생자·유족 인정, 일부 희생자를 제외시키라는 극우보수단체와의 숱한 송사를 맡아 승리로 이끌었다. 지금은 낮엔 농사를 짓고 밤엔 글을 쓰고 있다. 기자시절 무려 7000여명의 4.3유족들로부터 증언을 채록한 역사학도(고려대 사학과 졸업)로서의 집요함을 보였다. 이 방대한 증언은 4.3의 진실을 밝히는데 단초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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