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72주년 기획] 4.3피해 회복탄력성 (7) 정치 변화와 현재 제주사회 인식

제주4.3은 현재 진행형인가? 아니면 70여년이 지난 이미 끝난 일인가? 최근 법원의 군법회의 공소기각 판결을 보더라도 4.3이란 족쇄를 풀지 못한 억울한 시민들이 여전히 고통 받고 있다. 긴 시간이 흐르면서 4.3을 겪은 피해자들의 마음은 어느 정도 나아졌을까. 전 국무총리소속 4.3위원회 전문위원 김종민은 최근 제주학연구센터의 지원을 받아 ‘4.3피해자 회복탄력성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4.3으로 생사의 고비를 넘긴 피해자들의 이야기와 함께 그들의 내적 회복은 어떻게 이뤄졌을까. [제주의소리]는 4.3 72주년을 맞아 김종민 전 전문위원의 연구를 1월6일부터 매주 월요일, 목요일 총 8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편집자 주]

4. 정치 변화와 4.3피해자의 회복탄력성 

사회 환경의 변화, 특히 정치 진영의 변화는 4.3피해자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김○녀의 증언에 따르면 “제주4.3특별법이 제정되고, 노무현 대통령이 희생자와 유족에게 사과한 것에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김○녀 녹취록 참고).

“후유장애인 결정은 오래됐습니다. 장애등급 받으라고 해서 보건소에 가니까 3급 결정을 해 주었습니다. 지원금을 주는 데 겨우 월 30만원을 주었습니다. 그게 조금씩 올라 50만원이었다가 지금은 70만원입니다. 4.3특별법과 노무현.문재인 대통령의 사과가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사회가 우리를 외면했는데, 이젠 희망이 조금 보이니까요. 4.3특별법이 개정돼 보상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김○녀 녹취록 참고). 

김○보는 “김대중 대통령 재임기인 2000년 4.3특별법이 제정돼 2003년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되고 노무현 대통령이 희생자 및 유족들에게 공식 사과한 것에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았다. 그런데 진상조사보고서가 나오고 대통령이 사과했지만 완전한 위로를 받고 있지는 않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도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 ‘전과자’라는 낙인이 찍혀 있기 때문이다. 4.3특별법 개정안에 ‘4.3군법회의 무효화’ 조항이 있는데, 어서 특별법이 개정돼 전과자라는 억울한 누명이 깨끗이 벗겨져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위로를 받게 될 것 같다”(김○보 녹취록 참고)고 구술하고 있다.

2006년 제58주년 제주4.3희생자 위령제에 참석해 묵념하고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왼쪽)과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2018년 4월3일 제70주년 4.3희생자 추념식에 참석해 추념사를 하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2006년 제58주년 제주4.3희생자 위령제에 참석해 묵념하고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왼쪽)과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2018년 4월3일 제70주년 4.3희생자 추념식에 참석해 추념사를 하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김○문는 정치의 변화가 공동체와 도민의식의 변화에 영향을 주고 또한 개인의 회복탄력에 영향을 주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군법회의 수형인명부가 발굴됐다는 소식을 듣고 옛 도립병원 옆에 있는 4.3관련 단체를 찾아갔다. 거기에서 아버지의 형량이 15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너무나 억울해서 만일 그때 누가 시비를 걸어온다면 그때 기분으로는 누구라도 죽이고 싶을 정도였다. 뭐를 잘못했는데 15년이냐? 백보양보해서 15년형이 정상적인 것이라 해도 15년이 훨씬 지났으니 풀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아버지는 학교도 다닌 바 없는 무학이었고 산에 오른 적도 없는 분이다”(김○문 녹취록 참고).

“곧이어 2000년 4.3특별법이 제정되자 비로소 4.3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 전엔 ‘죄 아닌 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살았지만, 4.3특별법 제정과 진상조사 결과를 놓고 노무현 대통령이 사과를 한 이후엔 누구에게도 지지 않고 4.3에 관해 논쟁할 수 있게 되었다. 특별법과 대통령의 사과로 위로를 받게 되었고 맺힌 한도 조금이나마 풀렸다”(김○문 녹취록 참고).

문○선은 정치의 변화, 사회제도의 변화가 심리적 안정을 찾아준 계기가 되었다고 하면서도 4.3의 한은 죽어서야 풀린다고 한다.

“4.3 추념식에 가면 위로가 된다. 그리고 특별법, 공원, 대통령 사과가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완전히 풀리지는 못했지만, 노무현대통령도 사과, 문재인 대통령도 사과, 대통령들이 고맙다”(문○선 녹취록 참고).

부○휴 역시 정치의 변화가 공동체와 도민의식의 변화에 영향을 주고 또한 개인의 회복탄력에 영향을 주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군법회의 재심으로 무죄판결과 다름없는 공소기각 판결 받아서 크게 위로를 받았다. 그동안 전과자 낙인만 아니었으면 고위공무원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출세를 못했다. 동기 중에는 전과가 없는 사람은 간부가 된 사람도 있고, 장교로 간 사람도 있었다. 4.3특별법 제정, 노무현 대통령 사과, 문재인 대통령 사과 위로가 되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에는 4.3에 관심을 안 가져서 섭섭했다. 문재인 대통령 사과, 재심 결정, 추미애 위원께 감사하다”(부○휴 녹취록 참고). 

또한 양○천은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특별법 개정, 진상보고서 작성, 노무현 대통령 사과와 같은 정치적 변화가 마음을 누그러뜨리는데 기여했다”(양○천 녹취록 참고).

하지만 김○주는 정치의 변화가 개인의 회복탄력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증언을 하고 있다.

“4.3유족회 활동을 하지 않습니다. 정치 문제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대통령 직선제(1987년 6월 항쟁 후) 등은 모두 내가 일본에 있을 때 일어났던 일입니다. 일본 가기 전에는 4.3 이야기를 아예 할 수 없었고 할 이야기도 없었지요. 당시는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그런 생각할 여유도 없었습니다. 4.3 이야기만 하면 공산주의자로 몰렸으니까요. 이제는 4.3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시대가 왔다는 것은 알겠지만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4.3에 대해, 그리고 정치 문제에 관해 관심을 두지 않는 이유는 이로 인해 엄청난 혼란과 피해를 겪었기 때문에 외면하고 싶은 마음 때문인 듯합니다. 굳이 거기에 대해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김○주 녹취록 참고).

고○조는 “4.3특별법이 제정돼 진상규명이 이뤄지고 노무현 대통령이 희생자와 유족들에게 사과한 것에 큰 위로를 받았다.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도에 오셔서 사과하는 걸 직접 봤다. 대통령이 사과하니 ‘우리 유족들도 이제 살 길이 트였구나’ 라는 희망이 보였다. 정신적으로 큰 희망이 되었다”(고○조 녹취록 참고). 

정치 사회적인 변화로 4.3의 진실 규명이 되고 4.3에 대한 세대전승이 이루어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4.3 문제 해결이 거시적인 담론의 측면만이 아니라 개인사적으로는 강한 트라우마로 남아 있음을 알 수 있었다.  

2007년 6월 29일 제주4.3공원을 참배하는 추미애 전 민주당 상임의원.(현 법무부장관)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2007년 6월 29일 제주4.3공원을 참배하는 추미애 전 민주당 상임의원.(현 법무부장관)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5. 현재 제주사회 인식

4.3피해자의 현재 제주사회가 지니고 있는 4.3 문제에 대한 인식은 어떠한지에 대한 조사 결과의 분석이다.

우선 김○문의 지적이다.

“4.3특별법이 하루빨리 개정돼 보상은 물론, 군법회의를 무효화해서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해야 한다. 국가가 공권력으로 피해를 입혔으니 국가가 처리해줘야 한다. 제주도를 ‘평화의 섬’이라고 하는데, 억울함이 풀리지 않아 속에 농이 가득 차 있는데 외부에다가 ‘평화의 섬’만 운운하면 무슨 소용인가. 진정 평화의 섬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4.3군법회의를 무효화시키고 배.보상이 이뤄져야만 한다”(김○문 녹취록 참고).

“그리고 4.3에 쓰이는 이런저런 예산이 많은데 정작 유족에게 쓰이는 돈은 미약하다. 유족의 아픔을 제대로 생각하지 않는 예산인 것이다. 합창단, 임원회도 스스로 돈을 내면서 하고 있고, 유족회 직원들은 봉급도 제대로 못 받고 있다”(김○문 녹취록 참고).

“우리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아낌없이 주는데 자식들은 부모의 아픔을 모른다. 4.3도 모르고 부모의 고통도 모른다. 학생들이 4.3의 진상과 역사를 알 수 있도록 교육이 앞장서야 한다”(김○문 녹취록 참고).

안○행은 4.3은 영원히 역사에 기록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4.3은 역사로 남겨두어야 한다. 역사로 남겨두어서 역사, 사회, 정치적으로 우리 대한민국에서 절대 잊혀져서는 안 되는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정치적으로 대한민국에 법이 있는 이상은 남겨야 한다. 우리 세대가 없어지면 우리 자식 세대는 모른다. 이것을 역사로 남겨두어야만 한다”(안○행 녹취록 참고).

여기에 유사하게 오○은은 “4.3은 제주도민의 몇 분의 일이 희생당한 일이다. 잊으면 안 된다. 지금의 정부 시책이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잘 기억되고 기록되어야 한다. 다음에 그러한 세상이 오면 안 된다. 4.3유족으로서 미국 책임이 있다고 본다”(오○은 녹취록 참고).

2018년 3월 30일 제주중앙여고 체육관에서 열린 '찾아가는 4.3청소년아카데미' 현장 모습.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2018년 3월 30일 제주중앙여고 체육관에서 열린 '찾아가는 4.3청소년아카데미' 현장 모습.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다음은 청소년 교육에 관련하여 증언하고 있다.

“4.3이 바로 정립되었으면 한다. 도교육청에서 4.3교육을 활성화 시켰으면 한다”(양○천 녹취록 참고).

“앞으로 더 이상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되풀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젊은 세대들이 4.3을 많이 알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홍○호 녹취록 참고).

마지막으로 김○보의 지적이다.

“과거에는 4.3에 대해 아무런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았다.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절실했기 때문에 열심히 일만 할 뿐이었다. 경제적인 문제 해결은 내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고, 정신적인 상처도 당연한 것이라 여기며 살았다. 그런데 4.3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었던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살았는데, 정작 4.3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상황이 되자 오히려 괴로움이 커지기도 했다. 위령제에 참석하거나 뉴스에서 4.3에 관한 소식이 나오면 가슴이 미어졌다. 1993년부터 2년간 ‘바르게살기위원회’ 표선면 위원장을 맡았었다. 그때 살펴보니 끼니를 거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너무나 어렵게 살았기 때문에 어려운 사람을 돕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4.3 피해에 대해 우울한 마음을 갖기 보다는 남을 돕는데 신경을 써야 4.3으로 인한 내 마음의 병이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위원장 시절부터 끼니를 거르는 어려운 가정의 아이들에게 반찬값이나 학용품 구입에 도움을 주기 위해 후원하기 시작했다. 직접 찾아가 돈을 주면 생색내는 것처럼 비춰질 수 있고, 받는 사람도 부담스러워 할 것 같아 계좌이체를 했다. 그 후 어떻게 하면 생활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일단 5억원을 모으기로 했다. 2남 2녀 자식들도 내 뜻을 잘 이해해 함께 돈을 모았다. 우선 2억원을 모아 제주4.3평화재단을 통해 장학금을 주려고 했다. 그런데 기부금품모집법률 때문에 재단에선 돈을 받을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2014년 12월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장학금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어떤 것으로도 4.3의 피해를 회복할 수는 없다. 4.3이라는 아픈 과거를 덮을 수는 없지만 앞으로 그러한 무자비한 비극을 겪지 않으려면 후세대에게 4.3을 잘 가르쳐야 한다. 그래서 평화롭고 인권이 존중받는 세상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게 행복한 사회라고 본다”(김○보 녹취록 참고).

# 김종민은?

김종민(59)은 4.3의 최고 전문가로 꼽힌다. 일간지 기자 4.3취재반 13년, 국무총리 소속 4.3중앙위원회 전문위원 13년, 그리고 지금까지 30여년간 오로지 4.3 연구에만 매달리고 있다. 제민일보 ‘4.3은 말한다’ 취재보도, 정부 진상조사보고서 작성, 4.3평화기념관 전시 설명문 작성, 희생자·유족 인정, 일부 희생자를 제외시키라는 극우보수단체와의 숱한 송사를 맡아 승리로 이끌었다. 지금은 낮엔 농사를 짓고 밤엔 글을 쓰고 있다. 기자시절 무려 7000여명의 4.3유족들로부터 증언을 채록한 역사학도(고려대 사학과 졸업)로서의 집요함을 보였다. 이 방대한 증언은 4.3의 진실을 밝히는데 단초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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