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극단 마음같이·괸당들 연극 ‘눈 오는 봄날’

‘가족’, ‘공동체’에 대한 달라진 세간의 인식은 TV드라마, 영화 같은 매체를 봐도 잘 나타난다. 한 지붕 아래 3대, 4대가 북적이며 모여 살고 옆집 이웃과 희로애락을 수시로 공유하며 살갑게 지내는 모습은, 1980~90년대 TV에서 자주 보던 장면이다. 다만 ‘2020’이란 숫자가 달력 맨 앞에 찍힌 오늘 날은 전통적인 가족 구성보다는 1인·2인 가구, 연애, 동거처럼 확연히 달라진 현실을 대변하는 경우가 많다. 그나마 오후 8시 30분 일일드라마에서 옛 가족 드라마의 향기를 느낄 수 있겠다.

지난 1월 31일부터 2월 2일까지 '극단 마음같이·괸당들'이 소극장 세이레아트센터에서 공연한 연극 ‘눈 오는 봄날’은 아련한 ‘그때 그 시절’ 소시민들의 삶을 재현한 작품이다.  

가구마다 다닥다닥 붙어있어 안부를 수시로 묻는 허름한 동네, 작은 점방의 평상을 오가며 함께 치는 화투 한 판에 고민을 잠시 잊고 술 한 잔에 서로의 상심을 달래주는 마을. 이런 장면들이 10~20대 초반 나이라면 다소 낯설겠지만, 중년 세대부터 그런 환경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추억의 향수를 떠올릴 만 하다. 

‘눈 오는 봄날’은 소시민들의 일상 속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 같은 감정을 선명한 캐릭터로 보여준다.

핵심은 가족을 책임지는 세 여자다. 억세지만 마음 따뜻한 홍자 엄마(배우 신혜정), 겉으로는 까칠한 신방이지만 말 못할 속사정에 눈물짓는 성자 엄마(백은경), 폭력적인 남편과 살면서 행여나 딸이 삐뚤어질까 스트레스에 서서히 병들어 가는 치옥 엄마(조옥형). 

여기에 철딱서니 없는 딸내미 홍자(고수연), 넉살 좋게 백수 생활 중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제 역할을 하는 미워할 수 없는 홍자 아빠(현대철), 고치지 못하는 도박 습관에 남편과 싸워도 늘 쾌활한 미숙(홍화형), 술에 찌들어 사는 치옥 아빠(강제권)까지. 작품은 원색처럼 또렷한 성격을 장착한 인물 중심으로 이야기가 흐른다. 

덕분에 지켜보는 관객들도 울고 웃고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내기 용이하다. 비극적인 결과를 맞이하는 치옥 엄마와 그런 반려자를 지켜보며 뒤늦게 후회하는 치옥 아빠의 눈물, 신방이라는 직업 때문에 자녀가 고통 받을 때 눈물로 가슴을 치는 성자 엄마는 관객의 눈물샘을 깊이 자극한다. 

분란과 갈등의 파도를 넘어 세찬 눈물의 소나기까지 그치고 난 뒤 찾아오는 행복은 온기를 품고 서로 서로에게 전해진다. 가족과 이웃의 의미가 점차 희미해지는 요즘, ‘눈 오는 봄날’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 ‘정(情)’의 따스함을 간접적으로 나마 느끼게 해준다.

6일 오후 6시 '눈 오는 봄날' 마지막 공연 무대 인사 모습. ⓒ제주의소리
2일 오후 6시 '눈 오는 봄날' 마지막 공연 무대 인사 모습. ⓒ제주의소리

‘눈 오는 봄날’은 2010년 전북연극제 최우수상과 같은 해 전국연극제 대통령상 포함 4관왕을 차지한 수작이다. 지난해 ‘우리말 예술축제’ 말모이 연극제에서도 재경 제주예술인모임이 제주도 판 ‘눈 오는 봄날’을 앞서 공연했다. 이미 충분한 검증 과정을 거친 셈이다. 달동네에 불어 닥친 재개발 열풍으로 가족과 다름없는 작은 공동체가 분란을 겪고 다시 화합한다는 원작 설정은 ‘개발’, ‘공동체’라는 가치가 어느 때보다 부각되는 최근 제주의 여건과 잘 어울린다. 

극단 마음같이·괸당들의 ‘눈 오는 봄날’은 배역을 잘 살리는 배우들의 연기와 맛깔 나는 제주어 대사로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안겨줬다. 치옥 엄마를 연기한 조옥형 배우는 남편의 폭력에도 어떻게든 가정을 지키려 하지만 그런 압박을 몸과 마음이 버티질 못하는 운명을 인상 깊게 보여줬다. 

제주어 연기는 사투리 구사 능력이 비교적 능숙한 중년 나이 이상 출연진 덕분에 어색함이 덜했다. 무엇보다 제주 출신이기도 한 현대철 배우는 흡사 ‘구시렁구시렁 대면서 가끔 버럭 소리 내지만 사람 좋은 동네 아저씨’를 연상케 하는 쫀득쫀득한 사투리 어감과 연기를 보여줬다. 일상에서 볼 법한 친숙한 연기와 소소한 지명이 더해져 즐거운 제주어 연극을 완성했다. 

다소 진부하게 느껴지는 가족 드라마의 잔상과 ‘중국 자본의 개발로 땅을 팔렸다’는 설정을 도입해 제주 현실을 어느 정도 반영하려 했지만 기대만큼 효과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것 같아 아쉬움으로 남는다. 

극단 마음같이는 현대철 배우가 이끄는 극단이다. ‘괸당들’은 재경 제주예술인모임이 이번 공연을 위해 지은 다른 이름이다. ‘연기’라는 꿈을 품고 타지에서 활약하는 많은 제주 출신 배우들을 고향에서 만나는 건 반가운 일이다. ‘물 건너’ 오는 무대가 쉽지 않지만 제주 배우들과 도민 관객이 만나는 더 많은 기회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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