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제주4.3 연극 ‘침묵’ 선보일 극단 노뜰 대표 원영오

지난 2월 8일 오후 6시, 제주시 조천읍 신촌 문화의 집에서는 독특한 연극 공연이 열렸다. 극단 노뜰(대표 원영오)의 신작 ‘침묵’을 미리 선보이는 쇼케이스(showcase) 공연이었다. 전문 공연장도 아닌 아담한 강당에 무대를 마련했고 제주 극단의 작품도 아닌데다 시간도 45분에 불과한 짧은 작품이었지만, 객석은 4.3을 위해 힘써온 김종민, 김수열, 허호준을 비롯해 많은 제주 예술인-학자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눈길을 끌었다.

‘침묵’은 지금까지의 4.3 연극과 비교할 때 한층 더 함축된 언어로 관객에게 다가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유태인 학살할 때 들려줬다는 바그너의 합창곡 ‘순례자의 합창’으로 4.3 당시 동굴에서 숨진 주민들을 묘사하거나, 손수레 가득 담긴 신발을 흩뿌리고 수습하며 섬의 고통을 형상화하는 방식 등은 노뜰 만의 색깔이 돋보이는 시도다. 9월에 있을 본 공연에서는 나열한 이미지를 유기적으로 이어 보다 선명한 메시지를 기대해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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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제주에서 열린 극단 노뜰의 전쟁연작 공연 '침묵' 쇼케이스 모습. 제공=노뜰. ⓒ제주의소리

극단 노뜰은 1993년 창단한 중견 극단이다. 한적한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후용리의 어느 폐교를 개조한 극장 겸 사무실 ‘후용공연예술센터’를 기반으로 한다. 노뜰은 지난해 ‘전쟁연작’ 3부작을 시작하면서 첫 번째 ‘국가’를 선보였다. 두 번째는 4.3을 주제로 하는 ‘침묵’이다. 원영오 대표를 비롯한 노뜰 단원들은 올해 1월부터 2월까지 약 한 달 동안 제주에 터를 잡았다. 4.3평화공원·유적지 답사, 4.3활동가들과의 만남, 전문가 강연, 내부 토론 등 4.3을 무대 위에서 표현하기 위한 방식을 고민했고, 그 결과물이 이번 쇼케이스 공연이었다. 

공연을 마치고 후용리로 돌아가기 하루 전 날인 10일, [제주의소리]는 원 대표와 만났다. 장소는 공연 장소와 임시 숙소에서 멀지 않은 카페다. 그는 쇼케이스를 마치고 2시간 가까이 이어진 관객과의 대화가 무척 인상 깊었다고 피력했다. 관객과의 대화가 보통 30분을 넘지 않기 마련인데, 이날은 막걸리를 곁들이며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고 4.3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고 전했다. 그는 ‘침묵’ 작업을 통해 활자로만 알던 4.3의 무게를 몸으로 느꼈다고 강조했다. 4.3을 위해 삶을 바쳐 싸운 이들의 노고와 피해자들의 고통 역시 마찬가지다. 

노뜰은 해외 각국에 진출해 현지 문화·예술가들과 적극 소통하는 방식으로 한국 연극계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보통 연극과는 사뭇 다른 ‘음악과 몸의 언어’를 내세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런 특성은 ‘침묵’에서도 잘 드러난다.

원 대표는 “4.3은 제주라는 제한적인 지역 안에서 일어났던 엄청난 일이기에 눈여겨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것만으로 침묵과 다름없다. 그렇기에 4.3을 더욱 알아야겠다는 생각”이라면서 “앞으로 완성할 ‘침묵’은 4.3의 가치를 동시대 적으로 해석하고, 동시에 세계사의 한 부분으로서 이해하는 작업물이 되리라 본다”면서 오는 9월 관객과 다시 만나기를 기대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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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뜰의 대표 겸 연출 원영오. ⓒ제주의소리

Q. 언제부터 연극을 시작했나.

A. 노뜰이란 이름은 올해로 27년째다. 1993년 창단했다. 1980년대 친구, 선배들과 대학 시절 풍물패에서 활동하면서 자연스레 ‘연희’에 관심을 가졌다. 나아가 현대적 의미의 연극에 대해 궁금증이 생겼고 연극을 통해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보자는 마음에서 시작했다. 연극에 대한 비전이나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하거나 연극이 너무 좋다는 마음보다는 ‘재미있겠다’ 정도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연극을 하면 할수록 계속 궁금해지니 더 연구하고 싶고 더 트레이닝하고 싶어졌다. 다른 연극인을 만나고 싶고, 우리만의 연극으로 세계와 만나고 싶어서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Q. 노뜰은 국내보다 오히려 국외 활동이 더욱 눈에 띈다. 프랑스, 이탈리아, 루마니아, 북경, 일본, 맥시코, 호주, 페루 등을 누볐다. 극단 스스로도 ‘다양한 공연 언어를 탐구하고 발견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고 소개한다. 노뜰만이 가지고 있는 색깔은 무엇인가?

A. 창단할 시기나 지금이나 연극으로 생존한다는 건 사회적으로나 미학적으로 쉽지 않다. 모든 예술의 창작 활동은 생존을 위한 분투가 필요한데, 노뜰은 ‘우리가 공연하고 싶은 환경은 우리가 만들자’는 목표를 세웠다. 예를 들어 없는 관객을 올 때까지 기다리는 건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원하는 공연 양식을 원하는 방향으로 지켜가려면 우리가 더 적극적으로 시장을 개척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극단을 만들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부터 국외 활동을 시도했다. 없는 살림을 털어 프랑스에서 3개월간 머물면서 단원들과 이런 저런 작업을 하기도 했고, 아예 해외로 이주해서 활동할까 고민도 했다. 미학적으로도 극단은 새로운 예술, 새로운 관객, 새로운 문화를 만나야 밀도가 높아진다. 극단의 자립 측면에서도 새로운 시장, 환경, 제작시스템을 고민해야 했다. 예를 들어 유럽 예술가들은 어떤 사회적 구조 안에서 생존하는지 정말 궁금했다. 그래서 현지 예술가를 만나 어떻게 먹고 사느냐, 나라에서 무얼 지원하느냐, 어떤 국가 기관의 어느 부서로부터 얼마나 지원 받아서 넌 무엇을 하는지 꾸준히 리서치 했다. 그런 과정이 계속 쌓이면서 네트워크가 생겼고 이제는 해외 예술 단체와의 공동 작업도 많다. 신작 소식을 알리면 올해는 어느 파트너와 작업할지 정해진다. 3월이면 일본 극단과 함께 신작을 선보이는데 3년 전부터 함께 준비해온 작품이다. 후용리에서 한 번, 서울에서 한 번, 일본에서 한 번 공연한다. 이런 시도는 새로운 관객을 만나기도 하지만 공연 제작에 대한 비용 부담도 줄어든다. 우리에게는 미학적, 경제적 생존이다. 

Q. 노뜰 규모는 어떻게 되나.

A. 상근 직원은 배우 4명, 기획 프로듀서 1명, 대표 1명이다. 프로젝트 마다 함께 하는 배우나 제작진이 최대 5명 정도 된다. 가장 오래 함께한 단원은 올해로 15~16년 정도 됐다.

Q. 지난 작품을 보면 주로 고전을 재해석했다. (햄릿, 하녀, 세 자매 등) 더불어 작품 '귀환'과 전쟁연작에서도 잘 나타나듯 전쟁을 다루는 작품도 많다. 이유는 무엇인가?

A. 우리는 공연 하나를 만들면 다양한 관객을 만나려고 한다. 강원도를 비롯해 서울, 유럽, 남미 등 지역과 국적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래서 제일 중요한 것이 보편성이다. 셰익스피어가 지금도 명작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 읽어도 권력, 배신, 인간성과 같은 보편적인 가치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인류보편적인 가치를 담아내기 위해 고전을 선택한다. 두 번째 이유는 동시대성이다. 수백 년 전 셰익스피어 이야기를 그대로 재현할 이유는 없다. 리어왕 이야기가 우리에게 무엇으로 다가오는지, 동시대적인 해석은 곧 오늘날 사회적 의미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이런 이유로 고전을 선호한다. 전쟁이란 소재는 전쟁 자체를 선호한다기 보다, 인간의 존재가 가장 극명하게 그러나는 환경이 전쟁이다. 내가 연극을 시작할 때부터 인간의 존재와 인간의 가치에 대한 의문을 품고 있었다. 아무리 인간이라도 인간으로서 가치와 대우를 부여하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다. 근래 한국사회에서 벌어진 갑질 논란, 문화계 위계 성폭력 모두 인간이 인간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했다. 인간적 가치가 가장 극명하게 나타나는 순간이 전쟁이고, 극명하게 드러나는 시스템이 군대 조직이다. 전쟁과 군대 속에서 인간을 보려한다.

Q. 제주와의 인연을 말해달라.

A. 2003년 제주문예회관에서 ‘동방의 햄릿’이란 작품을 공연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인상 깊은 공연이다. 그 뒤로 2006년 ‘귀환’이란 작품을 제주에서 4~5번 정도 순회 공연을 했다. 우리는 해외 공연을 갈 때 되도록 오래 거주하려 한다. 초청 공연만 하고 오면 그 지역의 문화와 시스템을 이해하기 어렵다. 스케쥴을 길게 잡아 현지 배우를 대상으로 오픈 워크숍도 하고, 학생들이 참여하는 연기 트레이닝도 하고 공동 작업도 하면서 그 지역을 배우려고 한다. ‘침묵’ 쇼케이스를 위한 제주 방문도 같은 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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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케이스 공연 후 이어진 관객과의 대화에서 마이크를 잡은 원영오(뒷줄 맨 왼쪽) 대표. ⓒ제주의소리

Q. 전쟁 연작의 두 번째는 침묵이다. 침묵을 먼저 정했나, 4.3을 먼저 정했나.

A. 침묵을 먼저 정했다.

Q. 그렇다면 4.3은 어떻게 알아갔나.

A. 일단 4.3에 대해서는 사실 그대로 알고는 있었다. 전쟁 연작은 국가, 침묵, 그리고 눈물 순서로 미리 정했다. 국가를 이야기하려면 세계 근현대사에서 가장 아픈 역사인 제2차 세계대전이 알맞다고 판단해 볼프강 보르헤르트의 소설을 선택했다. 그 다음 침묵은 국가에 비해 포커스를 좁혀서 ‘누가 침묵하나’라고 고민했고 자연스럽게 4.3이 떠올랐다. 4.3은 제주라는 제한적인 지역 안에서 일어났던 엄청난 일이기에 눈여겨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것만으로 침묵과 다름없다. 그렇기에 4.3을 더욱 알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사실 전쟁 연작 1편을 준비하면서 4.3을 공부했다. 1편 '국가'에는 제주 출신 배우 양승한도 출연했다. 국가로서 4.3을 다루기에는 공부와 연구가 더 필요하다고 판단했기에 미뤘고 제주 쇼케이스까지 이어졌다. 작품을 만드는 입장에서 4.3이란 주제는 책임감을 안겨준다. 4.3은 현재진행형이고 더 밝혀져야 할 문제이기에 만약 책으로만 공부하고 공연했다면 정말 부끄러웠을 것이다. 4.3유적지를 둘러보고 다양한 이야기를 듣는 한 달은 소중한 시간이었다. 최소한 덜 부끄러울 수 있을 것 같다.

Q. 쇼케이스가 끝나고 관객과 막걸리를 나눠먹으며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어떤 의견이 오갔나.

A. 이번 쇼케이스는 정말 유익했다. 4.3에 대해 우리가 미처 고민하지 못한 시각이 존재할 수 있구나 라고 느껴 마음이 놓였다. 공연을 위한 리서치 과정에서 동행한 분들은 50대에서 60대까지 주로 4.3진상규명을 위해 청춘을 바친 세대였다. 역사에 대한 부채감, 민주사회에서 정의에 대한 자의식이 강하기에 그 분들과 함께 다니다보니 ‘4.3은 분노’라는 생각이 한 동안 있었다. 4.3으로 웃으면 절대 안될 것 같은 느낌? 그런데 쇼케이스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이 전해준 의견은 분노만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4.3의 동시대성, 지금 제주는 어떻게 살아야할까 였다. 다음 세대들에게 4.3의 무거운 돌을 떠안겨주면 4.3도 미래 세대들에게도 불행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다. 언젠가 광주5.18민주화운동 컨퍼런스에 참석한 오키나와 평화 활동가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오키나와도 오키나와를 놔야 살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오키나와인들은 매일 악몽을 꾸며 살아갈 것이다. 광주도 광주를 조금은 내려놔야 광주를 보고 나아가 미래를 볼 수 있다’는 취지였다. 결코 쉬운 말은 아니지만 쇼케이스를 마치고 나서 이 말이 떠올랐다. 쇼케이스 관객들 가운데 젊은 분들은 4.3 자체의 슬픔은 잘 알지만 작품이 미학적으로 아름다운 슬픔이어서 좋았다고 말했다. 미학적으로 가치 있게 아름다운지, 표현 양식에 대한 지적도 인상적이었다. 제주 관객은 어른, 아이 관계 없이 4.3은 내 이야기라는 강한 주인의식을 지닌 것 같다. 구체적으로 여러 이야기를 해줘서 놀라웠고 재미있었다. 우리는 20년 전부터 공연 아침에 배우들이 밥을 지어, 본 공연 후 관객들과 함께 나눠먹으며 대화를 나눈다. 공연 형식만 보여주는 것이 아닌 무대에 임하는 예술가들의 삶이란 방식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20년 동안 지켜오고 있다. 관객와의 대화는 보통 30분인데 이날은 2시간 넘게 이어졌다. ‘침묵’ 쇼케이스를 제주 관객들에게 보여준 건 정말 다행이다.

Q. 관객 피드백을 반영한 9월 ‘침묵’ 본 공연은 어떤 모습이 될까?

A. 극단 내부 합평회도 거치고 작가과 함께 고민하며 연구해야겠지만, 4.3의 주제성이란 측면은 원점에서 다시 고민할 필요가 있겠다. 이번 쇼케이스는 4.3에 대해 우리 가슴으로 다가온 느낌을 표현한 정도였다. 그런 감정을 관객들에게 보여주니 ‘너무 무거워’, ‘지루해’, ‘웃어도 돼’ 같은 여러 말씀을 해주셨다. 남은 시간 동안 ‘침묵’은 굉장히 새로운 고민을 하고 더 유연해질 수 있을 것 같다. 4.3에 대해 무겁게만 다루지 않되 더 보편적인 키워드로 말하는 건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다. 4.3의 보편성이 무엇일까 고민해봤다. 4.3의 진실이 너무 커서 보편성을 함부로 담아도 될까 싶었는데, 전 세계 관객들이 객석에 앉아있다고 상상해봤다. 학살에 대한 역사는 세계적으로 많다. 시대와 지역을 불문하고 권력, 학살, 전쟁 같은 인간에 대한 아픔은 비슷비슷하게 존재한다. 특히 근현대사는 냉전과 자본, 정치 권력이 얽힌 문제다. 4.3과 같은 아픔을 겪은 인도네시아, 오키나와, 중남미 국가 관객과 기꺼이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4.3을 이야기하고 싶다. 앞으로 완성할 ‘침묵’은 4.3의 가치를 동시대 적으로 해석하고, 동시에 세계사의 한 부분으로서 이해하는 작업물이 되리라 본다. 오는 9월 더 많은 제주 관객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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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오 대표. ⓒ제주의소리

Q. 원영오가 생각하는 4.3은 무엇인가?

: 제주에 오기 전 책으로 공부할 때는 4.3은 ‘그때 있었던 학살의 이야기’였다. 그런데 제주에 와서 유적지를 살펴보고 4.3을 오랫동안 공부해온 사람들을 만나고 들으니 4.3은 지금도 진행 중인 엄청난 고통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트라우마를 겪고 있었다. 책으로 활자로 본 4.3은 4.3이 아니었다. 신기하게 단원들이 제주에서 거의 잠을 못잤다. 매일 악몽을 꿨다. 많은 제주도민들에게 4.3은 지금도 악몽일 것이다. 

음… (한참을 뜸 들이며) 4.3은 무겁고 무겁지 않은 두 가지 저울 같다. 무겁지 않다는 것은 4.3의 무게를 계속 품고는 동시대를 살아가기 어렵다는 뜻이다. 몸은 외부 압력에 스스로 저항하기 마련이다. 무거움과 무겁지 않음, 어느 것 하나 함부로 할 수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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