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72주년 기획] 4.3피해 회복탄력성 인터뷰 (1) 고한조·고신하 씨 남매

김종민 전 국무총리소속 4.3위원회 전문위원의 최근 '4.3피해 회복탄력성' 연구는 길게는 27년전 인터뷰했던 4.3피해자를 다시 만났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강산이 세 번 가까이 바뀌는 동안 4.3피해자들의 몸과 마음은 얼마나 회복됐을까. [제주의소리]는 4.3피해 회복탄력성 연구 보고서에 이어 연구 과정에서 진행한 인터뷰 11건도 소개한다. 월요일과 목요일 매주 두 차례 씩 총 11회 게재를 통해 4.3피해자들의 피해회복 과정 전반을 생생한 목소리로 전한다.  [편집자 주]

연구방법은 많은 사람을 도식화된 설문조사를 통해 계량화·도표화하기보다는 심층 인터뷰라는 질적 조사방법을 적용하였다. 특히 본 연구의 책임연구원은 과거 4.3피해를 경험한 대상자를 조사한 적이 있다. 즉 책임연구원이 제민일보 기자 시절 '4.3은 말한다'를 연재하기 위해 1990년대에 이미 만나 인터뷰를 했으며(11명의 인터뷰이 중 8명), 인터뷰 내용이 신문에 게재된 바 있다. 일반적으로 사회학에서는 사생활 보호를 위해 인명과 지명을 알아볼 수 없도록 익명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은데, 본 연구의 본문은 익명이지만, 부록으로 실린 구술내용에서는 모두 실명을 사용했다. 구술자들도 이에 적극 동의했으며 사진 촬영은 물론 동영상 촬영도 허락했다. 실명을 쓴 까닭은 구술 내용이 검증될 수 있어야 하고, 그래서 구술 내용이 훗날 역사의 사료로써 기능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물론 구술자들이 구술을 마친 후 ‘어떠어떠한 내용은 빼 달라’고 한 부분은 삭제했다. [필자 주]

# 고한조(서귀포시 하효동), 고신하(서귀포시 서귀동)

1차 방문: 2019. 10. 13.

* 고한조 개인 정보
생년: 1943년생(4.3 당시 6세)
4.3 당시 가족관계: 아버지(고봉희), 어머니(현현아), 누나(고신하), 나(고한조)
학력: 보목초등학교 졸업

* 고신하 개인 정보
생년: 1940년생(당시 9살)
학력: 무학

* 부친 고봉희 수형인 명부 기록

* 마을이 불타던 때에 누나와 함께 대밭에 숨어 피신

“음력 10월 7일(1948년 11월 7일) 의귀, 수망, 한남리 마을이 불에 탔다.  

마을이 불탔던 시간은 오후로 기억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외출 중이었고, 9살 누나와 6살 나만 집 올레에서 놀고 있었다. 당시 가을이여서 조 같은 곡식들을 멍석에 널어서 말리고 있었다. 

한남리 동남쪽에서부터 초가집에 불을 붙이는 것을 봤다. 

누나가 나를 급히 이끌고 대밭으로 숨으라고 해서 대밭에 숨었다. 당시엔 집집마다 뒤뜰에 대나무를 심었다. 우린 대숲에 숨어 토벌대가 집안을 수색하고 집에 불붙이는 것을 목격했다. 대나무가 타서 그 열기가 대단했는데 토벌대가 돌아갈 때까지 그 열기를 참고 기다리느라 애를 먹었다. 해가 진 다음에 어머니가 와서 우리 남매를 이끌고 그날 밤부터 피난길에 올랐다.

마을이 불붙은 날에 죽은 사람들도 있었다. 다행스럽게 우리는 대밭에 숨어서 목숨을 부지했다. 어머니는 밖에서 피신했다가 밤에 온 것 같다. 

그때 부친께서도 농사를 지었다. 한남리는 목장이 주이다. 마굿간이 있었던 게 기억이 난다. 축사도 불탔다. 집이 불탄 후 지금껏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

구술자 고한조 씨(오른쪽)와 고신하 씨. 제공=김종민. ⓒ제주의소리
구술자 고한조 씨(오른쪽)와 고신하 씨 남매. / 사진제공=김종민. ⓒ제주의소리

* 남원리 외가에서 1년간 피난생활…눌 속에 숨어살아

“어머니와 누나와 함께 야간 피난길로 어머니 친정집(남원면 남원리 상동)으로 피난 가서 숨어서 지냈다. 며칠 후 어머니와 아버지가 연락이 닿았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남원 외가로 오라고 했는데 아버지는 세 식구가 처가에 이미 신세를 지고 있는데 아버지까지 가기는 미안하다고 하면서 오지 않으셨다고 한다. 남원리 상동에서 소개 생활은 1년가량 머문 것 같다. 

그런데 외가에서도 밖으로 나다니지는 못한 채 숨어지냈다. 당시엔 겨울철에 소나 말에게 먹일 촐(꼴)을 미리 베어다 마당에 높게 눌어놓던 시절인데, 외삼촌이 어머니와 나와 누나가 들어갈 만큼 촐 묶음을 뽑아주면 우리는 그 속에 들어가 숨고, 외삼촌이 우리가 들어간 후 촐 묶음으로 입구를 막아 숨겨준 것이다. 소개생활을 할 적에는 늘 눌 속에 숨어서 어머니와 나, 누나가 함께 잠을 잤다. 

외삼촌이 마을 서기를 해서 마을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었던 듯하다. 우리에게 항상 주의시키고 봐줬다. 그래도 불안할 때는 해안가 바위 틈에 숨어 여러 날을 지낸 적도 있다. 나중에 안정될 무렵엔 외삼촌이 남원리 연못가에 움막을 지어줘서 몇 개월 살기도 했다. 

중산간 마을에서 소개에서 온 사람들을 모아다 학살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우린 외가 덕에 목숨을 부지했다. 어머니는 생전에 ‘외가 덕분에 살았다면서 나중에 살아서 은혜 갚아야 된다’는 말씀을 여러 번 했다.”

* 마을 불탄 후 아버지를 본 적 없어…수형인명부 통해 마포형무소에 수감 알아

“아버지는 4형제 중 막내이다. 한남리 마을이 불탈 때, 말젯아버지(셋째 고봉림) 집만 불에 안탔다. 말젯아버지가 불구여서 토벌대가 말젯아버지 집은 불을 지르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바로 위 형인 말젯아버지 집에서 사태를 지켜보겠다며 외가로 안 내려왔는데, 그 집에 머물고 피난 생활을 하다가 연행된 것 같다. 그런데 아마도 그 집에 오래 머물지는 못했을 거다. 결국 피신 생활을 하다 잡힌 것같다. 

처가에 신세를 지더라도 우리와 같이 남원리로 피신을 했더라면 아버지가 살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수형인명부가 발굴이 된 이후에 안 사실인데, 아버지는 그 이후 피난 생활을 하다가 아마 1949년 봄에 주정공장에 수감되어 2차 군법회의로 마포형무소에 수감된 것을 알았다. 아버지는 그저 농부였을 뿐인데 수형인명부에는 ‘무기징역’이라 쓰여 있었다.”

* 남원에서 1년 피난생활 후 보목리…다시 한남리로 이주

“남원리에서 살던 중 서귀포 보목리로 이주해 갔다. 보목리에는 어머니가 아는 사람 2명(부부)이 살고 있었는데, 남원에서 어렵게 사는 걸 알고는 어머니에게 '당신은 길쌈을 잘하니까 길쌈이라도 해서 살아보라' 해서 그 집에 얹혀서 살게된 것이다. 어머니가 길쌈을 잘 하는 덕분에 우리는 먹고 살 수 있었다. 길쌈 주문이 들어오는 날은 우리도 그 집에 따라 가서 점심도 얻어먹고 지냈다. 보목리에는 내가 7살에 가서 15살에 나온 것 같다. 8년 정도 보목리에 산 것이다. 

학교는 보목초등학교 8회 졸업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초등학교 2학년에서 4학년으로 월반했다. 5년 만에 졸업했다. 학교 다니는 동안 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오라고 하면 집에 가도 먹을 것이 없기 때문에 밖에서 시간만 보내다 다시 들어갔다. 톳밥이나 전분 지꺼기도 먹으며 살았다. 요즘으로 말하면 결식 아동인 셈이다.

어머니는 길쌈을 했다고는 하지만 너무나 가난해 보목리에서는 어머니와 당시 8살인 내가 함께 살았고, 11살짜리 누나는 한남리 이모집에 맡겨졌다. 이처럼 나는 15살까지 보목리에서 살고 이후 말젯어머니가 ‘한남리 고향으로 와서 지내라’ 해서 거기서 1년을 살았다. 한남리에서는 1년가량 살았는데, 삶이 너무 힘이 들고 새 삶을 개척하고자 17살 무렵에 한남리를 떠나 인연따라 서귀포 하효리로 왔다.”

* 17살에 가구공장 취업해 10년…그 후 73살까지 목수일 배워 건축업

“나는 한남리 가서 살아도 땅 한 평 없이 아무런 전망이 없으니까 어머니가 ‘기술을 배워야 산다’고 해서 어머니의 소개로 하효리에 있는 한 가구 공장에 취업을 했다. 말이 취업이지 가구를 배울 때 3년 동안은 1원도 못 받는 무보수였다. 점심 식사만 제공 받았다. 17살에 하효에 있는 가구사로 들어가서 기술 익히며 10년 종사한 후 27살 때 목수일을 배워가며 건설업을 시작했다. 가구를 배우는 10년간 고생을 많이 했다. 

가구 만드는 것을 잘 익혔지만 가구를 잘 만든다고 해서 집 짓는 목수일도 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동안 신용을 잘 쌓은 덕분에 현대 정주영 회장이 외국에서 대형 선박을 수주한 것처럼 건설업을 시작하게 됐다. 정주영 회장은 아직 조선소 만들 부지를 정리하기도 전에 외국에 나가 선박 주문을 받았는데, 상대방이 미심쩍어 하자 당시 주머니에 있던 거북선이 그려져 있는 500원짜리 지폐를 꺼내보이며 ‘우리는 수백 년 전에 이미 거북선을 만든 나라이다’라고 설득했다는 일화처럼.

아무튼 나는 그간의 신용을 바탕으로 27살 때 집 짓는 일을 처음 맡았다. 처음엔 집 짓는 일을 모르니까 전문 목수를 고용했는데, 난 옆에서 목수가 하는 일을 잘 보며 배웠다가 결국 나도 목수일을 하는 건설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내가 집을 잘 지어주니까 그 후 여기저기에서 주문이 들어와 결국엔 27살에 시작한 건설업을 몇 년 전인 73세까지 하게 되었다.”

* 교양을 위해 늘 주경야독

“성실하게 살다보니 특별히 ‘폭도 새끼’라는 말을 들은 적은 없다. 그리고 태어난 고향이 아닌 여러 동네를 살다보니 내 이력을 잘 알지 못해 그런 소리를 안 들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난 늘 주경야독을 했다. 한자 공부도 수도 없이 했다. 영어와 한자를 터득했다. 밤에 독학했던 이유는 지식은 있어야 된다는 생각에서였지, 진학을 해야지 하는 생각은 없었다. 교양을 갖춰야한다는 생각에 주경야독을 했다. 

공무원이 되고자 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연좌제의 피해는 없었다. 원래 군대는 아버지 없는 외아들이어서 의가사 제대 대상인데 부친이 실종 상태로 사망 신고가 안 돼서 의가사 제대는 하지 못한 채 만기 복역했다. 

부친 사망 신고는 결혼 후 한참 후에 했다. 실종 신고하는 법원 광고도 나갔었다.”

* 가까운 친척 없는 외로움…4.3의 불행은 나의 운명

“근친이 없어서 늘 외로움을 느꼈다. 난 외아들인데다가 사촌 형제도 없다. 왜냐면 큰아버지 아들은 마을이 불타기 전에 집 뒷담 위로 숨다가 총살당했고, 둘째인 셋아버지의 아들은 인천소년형무소에 수감됐는데 그 후 행불이다. 셋째인 말젯아버지는 아들이 없었다. 그러니 나는 사촌 없이 살았다. 

남의 집 경조사에 가면 가족과 근친이 많아 북적이는데, 우리는 잔치하려고 해도 일가가 없어서 외로움을 느꼈다.

학생 수가 몇 명 되지 않는 보목초등학교만 다녔으니 남들이 중·고교 동창회 간다고 하면 부럽다.

나에게 닥친 4.3의 불행은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노동이 힘들 때면 나도 부친이 살아있었으면 그래도 공무원이라도 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 26살에 결혼하면서 불우했던 삶 극복…7남매 모두 대학교육 시켜

“가구공장 다니던 마지막 해인 26살에 결혼을 했다. 당시 기술직을 알아주지 않았고, 내 처지가 땅 한 평 없는 완전 빈손인데다가 집도 없이 남의 집에서 살아서 배필 구하기가 어려웠다. 다행히 상대방 부모님을 설득해서 결혼을 했다.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니 그때부터 우울했던 마음이 많이 사라지고 새 삶이 시작되었다.

내가 형제나 사촌도 없이 외롭게 살았기 때문에 자식을 많이 낳았다. 7남매(1남 6녀)를 낳았다. 아내도 ‘당신은 근친이 없으니 자식을 많이 낳자’고 했다.

건설업으로 큰돈을 번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7남매를 모두 4년제 대학 보냈다. 그 중 네 명은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다. 아이들에게 아르바이트 한 번 안 시키고 대학을 보냈으니 그 정도면 만족한다.”

* 평생 죽을 고비 5번 넘겨, 4.3 영령 덕이라 생각

“회고해보니 죽을 고비도 많았다. 그때마다 가족, 이웃 등 누군가의 뜻하지 않은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4.3 영령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첫 고비는 7살 때 보목리로 이주해오자마자 동네 바다에서 놀다가 익사 직전에 놓였다. 그때 해산물을 캐고 가던 동네 누나의 도움으로 살 수 있었다.

두 번째 고비는 내가 경기도 맹호부대에 있을 때 월남전 파병을 위해 한 달 교육을 받고 있었을 때다. 월남 파병하면 돈을 많이 준다 해서 참전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파병을 얼마 앞두고 고향에서 매형이 여러 차례 전보가 왔다. 어머니가 위독하니 월남 파병은 절대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 즈음에 사격 연습을 하다가 실탄을 맞을 뻔 한 일도 있었다. 두 가지 계기로 월남 파병은 포기하였다. 

세 번째 고비는 30대 후반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사고로 의식을 잃고 쓰러져있는 것을 이웃이 발견하여 병원으로 이송해 준 덕분에 살 수 있었다. 

네 번째 고비는 2010년도 공사 현장에서 포크레인으로 머리를 다치고 쓰러졌는데 역시 또 살아났다. 

다섯 번째 고비는 작년 11월에 나무를 자르다가 전기 톱날이 튕겨 발등에 떨어지면서 발과 다리가 크게 다친 적이 있다. 밤에 다행히 수술을 받아서 살 수 있었다.

이 모든 게 4.3 때 숨진 조상님들이 살펴준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 4.3특별법 제정, 대통령의 사과에 큰 위로 받아

“4.3특별법이 제정돼 진상규명이 이뤄지고 노무현 대통령이 희생자와 유족들에게 사과한 것에 큰 위로를 받았다.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도에 오셔서 사과하는 걸 직접 봤다. 큰 위로가 되었다. 대통령이 사과하니 ‘우리 유족들도 이제 살 길이 트였구나’ 라는 희망이 보였다. 정신적으로 큰 희망이 되었다.”

제공=김종민. ⓒ제주의소리
고한조 씨의 대통령 표창장. 제공=김종민. ⓒ제주의소리

* 다음 세대에 바란다…불우했던 어린시절 떠올리며 자원봉사(대통령 표창 수상)

“저 개인사를 떠나서 4.3관련 단체에서 4.3의 세대 전승 하는 많은 일을 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제민일보처럼 언론 매체가 앞장서서 4.3의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해 준 점에 늘 고맙게 여긴다. 제민일보가 4.3연재나 관련 기사를 잘 써주었기 때문에 난 사무실이든 농협이든 어딜 가든 신문철에 여러 신문이 꽂혀 있어도 늘 제민일보만 보았다.

어린 시절 가시밭길을 걸었으니 어려운 처지에 놓인 다른 사람에 대한 연민이 많다. 건설업을 하다보니 안 가는 데가 없다. 돌아다니면서 보니까 너무나 열악한 주거 환경이 많았다. ‘고쳐주고 갑써’ 라고 부탁이 들어오니까 1996년에 서귀포건축기술자원봉사회를 조직해 봉사활동하고 있다. 라이온스클럽에도 가입해 25년째 불우이웃 돕기를 하고 있다. 어려웠던 시절을 뼈저리게 느끼기 때문에 어려운 사람들의 입장을 알고 있고, 내가 도울 수 있는 방법으로 봉사하려고 한다. 그렇게 하다 보니 2007년에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 어머니 없이 11살부터 홀로 생활한 누나, 10대에 자취, 취업, 육지로 물질생활 

“보목리에 간 후 1년만에 누나는 11살 나이에 남원리 이모집에 맡겨졌다. 누나는 10대 초반부터 남원리 이모집에서 가사일 도우며 어린 나이부터 물질을 배웠다.

그러다 누나도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자 13살 나이에 남원리 이모집을 나와 혼자 자취하면서 전분공장(신효리)에 취업해 살다가 20살에 보목리로 시집을 갔는데, 8남매를 낳아 모두 잘 키웠다. 

누나는 결혼 후에도 살림에 보태기 위해 보목리에서도 쭉 물질을 했고, 경상도인지 강원도인지 ‘양남’이라는 곳에까지 물질을 나갔다.[책임연구원 주: 검색해보니 ‘양남’은 ‘경상북도 양남면’으로 추정됨] 누나는 물질을 10대 초반부터 30대 초반까지 한 것으로 기억된다.” (대부분의 증언은 고한조가 했으나, 고한조의 누나 고신하는 이 부분에서 “난 물질을 아주 잘했다. 그걸로 밭도 사고 8남매를 키웠다.”고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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