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적 인간] (40)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Alice In Earnestland), 안국진, 2014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포스터. 출처=네이버 영화.

벼룩신문이라는 말 누가 만들었을까. 벼룩시장이라는 말에서 나온 말일까. 지금도 뭐 뚜렷한 직장 없이 살고 있지만, 백수 시절에 살던 동네에는 정오가 되기 전에 벼룩신문이 동나곤 했다. 성실한 사람들의 동네였다. 가난한 동네였다. 요즘이야 인터넷이 있지만, 구직을 하기 위해서는 벼룩신문을 펼쳐야 했다. 백수의 특권을 누리며 늦잠을 자고 밖으로 나가면 벼룩신문이 없었다. 옥탑방을 사랑하던 사치스러운 백수였지. 

한 번은 바로 몇 미터 앞에 두고 한 아주머니와 동시에 돌진한 적도 있었다. 벼룩신문을 넣어두는 함에 하나 남은 신문. 그것은 사투였다. 저 신문을 놓치면 평생 취직을 못할 것처럼. 다다다다닷.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뛰었다. 아주머니가 그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아주머니도 생각했겠지. 슬리퍼 신은 채 빨리도 뛰네. 그 레이스의 승자는 아주머니였다. 아흑. 손끝에서 신문을 놓쳤다. 그 아주머니는 좋은 곳에 취직했을까.

눈앞에서 신문이 사라질 때 순간 멍했다.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성실하면 청력을 잃게 된다. 성실한 사람들은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 자본주의 구조에서는 가난한 사람에게 성실함을 요구한다. 성실하게 살면 안 된다. 아무리 성실하게 살아봐야 좌절을 느낄 뿐이다. 그러니 적당히 살자. 열심히 일하다 보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된다. 그렇게 자주 듣던 라디오도 점점 듣지 않게 되었다.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한 적 있다. 그곳에서는 라디오를 들었지만, 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기계음과 다르지 않게 들렸다. 나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음악을 듣고 싶다고 생각했다.

새해가 되면 다이어리를 선물하는 사람들이 있다. 새해를 맞아 다이어리를 선물하는 마음이 아름답다. 새해 첫 해를 보기 위해 몇 시간의 정체 구간을 견디는 사람들이 있다. 첫 해를 보기 위해 몇 시간을 기다리는 마음은 아름답다. 그 아름다운 성실이 오래가면 좋겠다. / 현택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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