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72주년 기획] 4.3피해 회복탄력성 인터뷰 (5) 김필문

김종민 전 국무총리소속 4.3위원회 전문위원의 최근 '4.3피해 회복탄력성' 연구는 길게는 27년전 인터뷰했던 4.3피해자를 다시 만났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강산이 세 번 가까이 바뀌는 동안 4.3피해자들의 몸과 마음은 얼마나 회복됐을까. [제주의소리]는 4.3피해 회복탄력성 연구 보고서에 이어 연구 과정에서 진행한 인터뷰 11건도 소개한다. 월요일과 목요일 매주 두 차례 씩 총 11회 게재를 통해 4.3피해자들의 피해회복 과정 전반을 생생한 목소리로 전한다. [편집자 주]

연구방법은 많은 사람을 도식화된 설문조사를 통해 계량화·도표화하기보다는 심층 인터뷰라는 질적 조사방법을 적용하였다. 특히 본 연구의 책임연구원은 과거 4.3피해를 경험한 대상자를 조사한 적이 있다. 즉 책임연구원이 제민일보 기자 시절 '4.3은 말한다'를 연재하기 위해 1990년대에 이미 만나 인터뷰를 했으며(11명의 인터뷰이 중 8명), 인터뷰 내용이 신문에 게재된 바 있다. 일반적으로 사회학에서는 사생활 보호를 위해 인명과 지명을 알아볼 수 없도록 익명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은데, 본 연구의 본문은 익명이지만, 부록으로 실린 구술내용에서는 모두 실명을 사용했다. 구술자들도 이에 적극 동의했으며 사진 촬영은 물론 동영상 촬영도 허락했다. 실명을 쓴 까닭은 구술 내용이 검증될 수 있어야 하고, 그래서 구술 내용이 훗날 역사의 사료로써 기능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물론 구술자들이 구술을 마친 후 ‘어떠어떠한 내용은 빼 달라’고 한 부분은 삭제했다. [필자 주]

5. 김필문(金弼文, 제주 영평)

- 1차 방문: 2019. 8. 16. 김필문 자택에서 구술 채록

▲인적사항
* 생년월: 1947. 6.
* 본적지(출생지): 제주읍 영평리
* 현주소: 제주시 영평동
* 학력: 광양초등학교, 제주일중, 제주농고 졸업
* 사회 활동 경력: 영평동 4H 회장, 영평동 청년회장, 영평동 새마을지도자, 제주시 농촌지도자연합회장, 제주도 농촌지도자부회장, 영평동 마을회장, 제주시 4H 후원회 청소년 사무국장, 
* 현재: 제주4.3행불인유족회장, 4.3평화합창단장, 4.3 명예교사

* 증언자 부친 김경행에 대한 군법회의 수형인명부 내용

* 증언자의 누나(김을생), 최근 4.3군법회의 재심청구(이하 재심청구서 내용)

“재심청구인 김을생은 피고인 김경행의 딸입니다. 

김경행 피고인은 제주4.3사건 당시 고향인 제주시 영평동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다가 군경에 의해 집이 불타는 바람에 제주시에 있는 오현단(제주시 이도이동) 옆의 주택을 빌려 잠시 이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사를 오고 나서 일주일 정도 지날 무렵 경찰 3명이 집에 들이닥쳐 피고인 부부와 피고인 모친을 영장도 없이 체포하여 경찰서로 연행하여 갔고, 피고인의 모친은 이틀 만에 집에 돌아오고 피고인의 처는 5일 정도 있다 집에 돌아왔는데 김경행 피고인만 영영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경찰에 잡혀 갔던 피고인의 처에 따르면 경찰로부터 조사를 받으면서 여러 차례의 고문과 학대를 받았다고 하였는데, 특히 전기취조(전기고문)를 받을 때에는 너무 괴로워 바닥에서 계속 뒹구는 바람에 몸이 성한 데가 없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또한 경찰은 자신들이 원하는 말을 들을 때까지 체포된 사람들을 거꾸로 매달아 코에 물을 붓기도 하는 등 취조가 너무나 독했다고 하였습니다. 피고인의 처는 전기고문의 후유증으로 젖이 나오지 않아 어린 아이에게 젖을 물리지 못해 아이를 키우면서도 갖은 고생을 다해야 했습니다.

김경행 피고인은 1948. 12. 8. 징역 15년의 형을 선고받고 목포형무소로 가 수형생활을 하면서 가족들에게 편지를 두 번 보내오기도 하였고, 그 후로는 소식이 끊기고 말았습니다.”

* 아버지 김경행(金景行, 1948년 당시 38세), 농업학교에 1차 감금

“내가 2살 때 일이라 기억하지 못하지만, 어릴 때부터 누나와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로부터 아버지가 끌려가던 상황을 들었다.

우리 가족은 영평리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는데, 토벌대가 마을을 불태우니까 오현단 부근에 있는 먼 친척 집으로 소개했다. 아버지는 소개해 살던 집에서 1948년 9연대 주둔지인 농업학교로 끌려갔다가 육지 형무소로 보내진 후 행방불명됐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전에 먼저 한차례 농업학교 천막수용소에 감금됐다가 풀려난 적이 있다. 아버지가 농업학교로 끌려가 있을 때에 군인들이 우리 마을을 불태우는 초토화작전이 벌어졌다. 그러자 우리 가족은 대나무밭으로 급히 숨었다. 그때 나는 할머니 품에 안겨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머니는 군인들이 집과 함께 마당에 쌓아놓은 곡식들을 불태우니까 숨어있던 대나무숲에서 홀로 뛰어나와 ‘식량만은 태우지 말아달라’고 애원했다. 그러자 한 군인이 총 개머리판으로 어머니의 머리를 쳤다. 어머니는 머리에 구멍이 날 정도로 부상을 당해 피를 많이 흘렸다. 그 군인은 ‘이년 죽여버리겠다’고 했는데, 다른 군인이 ‘피가 나니 더럽지 않느냐’고 말려서 그냥 가버렸다. 군인들이 가버리자 걸레 같은 천으로 급히 어머니 머리를 싸매어 피를 멈추게 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농업학교에 감금돼 있던 아버지에게 전해졌다. 아버지는 고향마을이 불에 타고 아내가 큰 부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식사도 안하고 단식투쟁을 했다. 자살 기도를 한 것이다. 그러자 간수 역할을 하는 한 군인이 상관에게 ‘어떤 자가 밥을 먹지 않는다’고 말했다. 상관이 아버지를 데려오게 한 후 밥을 먹지 않는 이유에 대해 물으니까 아버지는 ‘노부모가 살아계시고 어린 자식들도 있는데, 마누라가 죽게 되었으니 나는 더 이상 살아남을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상관은 ‘가족들을 잘 보살피라’며 아버지를 풀어주었다. 아버지는 마침 좋은 군인을 만난 덕분에 풀려난 것이다.”

* 아버지, 소개지에서 끌려가 농업학교에 2차 감금…어머니도 고문받아

“아버지가 풀려난 때는 우리가 소개지(남문로 오현단 부근)에서 살 때이다. 비록 영평리 고향 집이 불에 타고 어머니가 큰 부상을 당했지만 아버지가 돌아와서 다행이었다.

그런데 한 달 후쯤 경찰이 소개민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수색을 벌여 잡아들였다. 아버지는 위험을 직감해 숨어있었다. 그런데 경찰은 숨어있는 사람들을 유인하기 위해 ‘먹을 것을 배급하기 위해 사람들을 찾는 것이다’라고 속였다. 할머니는 이 속임수에 넘어가 ‘우리 아들도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은신처에서 잡혀 경찰서로 끌려갔다.

어머니도 함께 끌려가 전기고문을 받았다. 그래서 손톱 색깔이 변했고 앞서 머리 부상을 당한 데다가 다시 전기고문까지 받으니 젖이 나오지 않아 내게 젖을 먹이지 못했다. 경찰은 어머니에게 ‘너 폭도지? 산에 붙었지?’라고 다그치며 모진 고문을 했다고 한다.”

* 아버지, 대구형무소에 수감 중 행방불명

“어머니는 풀려나왔지만 아버지는 형무소로 갔다. 아버지는 형무소에서 엽서를 2~3번 보냈다. 아버지는 무학(無學)이어서 남의 손을 빌어 엽서를 썼다. 그런데 그 후 소식이 끊겼다. 대구형무소에서 싹 죽여버린 것이다. 이번에 군법회의 재심신청을 한 큰누나가 당시 15살이어서 이 모든 내용을 내게 말해주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40대 때 과부가 되었다. 어머니는 시어머니와 누나 셋(당시 15살, 11살, 8살), 그리고 2살인 나를 건사해야 하는 역할을 했다. 누나들도 고생을 많이 했다. 어머니는 78세 때 돌아가셨다.”

사진=김종민. ⓒ제주의소리
김필문 씨가 받은 각종 표창장. 사진=김종민. ⓒ제주의소리
사진=김종민. ⓒ제주의소리
증언하고 있는 김필문 씨. 사진=김종민. ⓒ제주의소리

* 아라동에서 10년간 소개 생활…소개지와 고향마을 오가며 농사

“아버지가 끌려간 후 우리 가족은 아라동(‘간드락’ 마을)에 마련된 함바집에 살았다. 박성내 근처라서 큰 비가 와 내가 터지면 집으로 물이 들어왔다. 그러면 그릇으로 물을 퍼내며 살았다. 

집안 한가운데에 기다란 삼나무를 눕혀 놓았는데, 그걸 경계로 한쪽엔 솥을 걸어 부엌으로 삼고, 다른 한쪽은 방이 되는 셈이다. 그 삼나무는 가족 모두의 베개이기도 하다. 땅 바닥에 짚을 깔아 눕고 삼나무를 베개로 삼아 잤다. 누더기 걸쳐서 잤다. 함바집 둘레로 성담을 쌓았고 밤마다 보초를 서면서 수상한 물체가 들어오는 걸 감시했다. 사람들은 돌아가면서 당번을 맡아 경찰지서에 밥을 해갔다. 당번할 때 쌀 구해 밥하고 고등어 굽고 감자로 반찬을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먹을 게 너무 없어서 들나무를 캐다 먹으며 굶주림을 견뎠다.

한창 커야할 시기에 점심을 못 먹었다. 회충이 많았는지 트림하면 고약한 냄새가 났다. 옷 입은 모양도 각설이가 따로 없었다. 신발부터 옷 입은 모양새까지 성내 아이들과 우리는 한 눈에 구분이 되었다.

그리고 아라동 함바집과 고향 마을인 영평동을 오가며 농사를 지었다. 즉 호각 소리가 나면 영평동으로 가서 농사를 짓고, 호각 불면 아라동 함바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는 간드락마을 함바집에 살았고, 초등학교 5학년 때 고향인 영평동으로 돌아왔다. 2살 때 떠났다가 12살에 돌아왔으니 10년 만에 고향 마을로 복귀한 것이다.”

[책임연구원 주: 여기서 말하는 ‘함바집’이란 토벌대에 의해 마을 전체가 불에 타버리는 바람에 갈 곳 없게 된 사람들을 거주시키는 일종의 ‘수용소’인 셈이다. 맨땅에 돌로 대충 낮은 벽을 쌓고 나뭇가지를 돌 벽 위에 걸친 후 그 위에 짚을 덮어 지붕을 만들었다. 토벌대는 이런 함바집들을 여러 개 만들게 한 후, 식량을 구하기 위해 침입하는 무장대를 막기 위해 주변 전체를 빙둘러가며 높은 돌담을 쌓게 했고 수용자들에게 매일 보초를 서게 했다.
또한 당시 경찰은 수용자들에게 마치 금고형을 받아 형무소에 수감된 사람들처럼 아무 일도 시키지 않은 채 식량만 제공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4.3사건이 완전히 종결되기 전이라 수용자들이 마음대로 고향마을로 가서 농사를 짓게 할 수도 없는 상황에 놓였다. 그래서 경찰은 매일 아침 호각을 불어 수용자들을 집합시킨 주민들을 고향 마을로 인솔해 가서 농사를 짓게 하고, 어두워질 무렵이 되면 다시 호각을 불어 집합시킨 후 수용소로 돌아오는 일을 마을 복귀사업을 마무리할 때까지 반복했다.]

* 아버지 없이 농사짓기 어려워…중학교 1학년 때부터 밭갈이

“아버지가 2대 독자라 가까운 친척도 없고 나는 너무 어렸으니 집안에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었다. 누나들이 있었지만 큰누나는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니까 아주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갔고, 둘째누나도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시집을 갔다. 막내누나는 그 무렵 인천에 있는 방직회사에 일하러 갔다. 

그러니 나는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도와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방학 때는 매일 밭에 가서 김을 맸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는 밭을 갈았다. 하지만 밭을 가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밭갈쇠’가 아니라 길들여지지 않은 ‘생소’는 제멋대로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밭을 갈기 어렵다. 

집안에 아버지와 장성한 형이 있는 경우엔 농사짓는 게 쉬었다. 하지만 어머니와 어린 나만 있는 우리는 참으로 힘이 들었다. 결국 ‘밭갈쇠’가 있는 남의 밭에 가서 4~5일 김을 매주면 밭갈쇠를 하루 빌어 밭을 갈 수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밭갈이 하며 농사일을 도왔지만 등록금 내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내가 학교 다닐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죽기 살기로 일했다. 

3000~4000평 정도의 밭을 농사지었지만 우리 힘만으로 농사를 지을 수 없어 다른 사람의 품을 빌리다보니 실제 수익이 얼마 되지 않았다. 남의 땅 빌려서 농사를 짓기도 했는데, 땅주인과 우리가 수확의 50%씩 나눠 갖는 경우도 있었고, 심할 때는 수확량의 70%를 땅주인이 가져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본격적으로 농사를 했는데 일반 밭농사 즉 보리, 조, 고구마는 가격이 별로 안됐다. 유채는 좀 돈이 되었다. 22살 때부터 감귤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즉 1968년부터 1970년까지 해마다 조금씩 감귤나무를 심었다.”

* 3대 독자의 외로운 삶…30살 때부터 자신감 회복

“4.3로 인해 아버지를 잃자 남은 가족은 연약한 여자들 뿐이고 나는 너무 어렸다. 게다가 누나 세 명이 시집을 가거나 직장을 구해 인천으로 가버리니 우리 집은 힘이 없었다.

당시엔 야만적인 점도 있던 때라서 힘이 센 사람은 잘 살고 약한 사람은 천대받았다. 그런 면에서 내가 많이 시달렸다. 학교갈 때 선배들 책가방 들고 다녀야 했고, 이유없이 그들에게 매를 맞기도 했다. 

만일 아버지가 2대 독자가 아니어서 친척이 많이 있으면 남들이 우리를 그렇게 함부로 무시하지 못했을 텐데, 내겐 형도 없으니 멸시를 많이 받았다. 약한 집안이라 무시당하면서 살았다. 아버지도 형도 친척도 없는 나같은 사람들이 서러움을 많이 받았다. 22살에 결혼했는데 그 후에도 멸시를 당했다. 20대 후반까지는 아무런 이유 없이 매도 많이 맞았다. 형제가 쟁쟁하고 친척도 수십 명이 있다면 그러지 못했을 텐데 세력이 없어서 함부로 당했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 힘을 키웠다. 어릴 때 제대로 못 먹어 키는 작았지만 축구 등 운동을 잘했고, 힘을 키우니 웬만한 돌담도 한 번에 휙 넘을 수 있었다. 나는 술도 마시지 않으면서 체력단련을 했다. 그래서 서른 살이 될 무렵엔 마을에서 힘으로 나를 당할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리고 마을 일에 적극 봉사하다보니 서른 살에 마을 청년회장이 되었다. 그때부터는 멸시 당하지 않고 마을 지도자급이 되어 당당하게 살 수 있었다. 

또한 영평동 4H 회장, 제주시 4H 후원회 청소년 사무국장, 영평동 새마을지도자, 제주시 농촌지도자연합회장, 제주도 농촌지도자부회장, 영평동 마을회장을 역임했다.

47세부터 60세까지는 비료 회사인 ㈜풍농 제주출장소장으로 일했다.”

* 2000년 이후 경제적 안정

“농사로 살림이 펴지기 시작한 것은 2000년도 쯤인 것같다. 지금 노지감귤은 안 하고 모두 만감류만 재배한다. 2005년 이후 경제적으로 완전히 펴진 듯하다. 이젠 경제적으로 시달리지 않는다.”

* 수형인명부 발굴 후 유족회 활동…4.3특별법, 대통령 사과에 위로 받아

“군법회의 수형인명부가 발굴됐다는 소식을 듣고 옛 도립병원 옆에 있던 4.3관련 단체를 찾아갔다. 거기에서 아버지의 형량이 15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너무나 억울해서 만일 누가 시비를 걸어온다면 그때 기분으로는 누구라도 죽이고 싶을 정도였다. 도대체 뭐를 잘못했다고 15년이냐? 백보양보해서 15년형이 정상적인 것이라도 15년이 훨씬 지났으면 풀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아버지는 학교도 다닌 바 없는 무학이었고 산에 오른 적도 없는 분이다.

곧이어 2000년 4.3특별법이 제정되자 비로소 4.3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 전엔 ‘죄 아닌 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살았지만, 4.3특별법 제정과 진상조사 결과를 놓고 노무현 대통령이 사과를 한 이후엔 누구에게도 지지 않고 4.3에 관해 논쟁할 수 있게 되었다. 특별법과 대통령의 사과로 위로를 받게 되었고 맺힌 한도 조금이나마 풀렸다.

지금까지 유족회 활동을 15년 정도 했으니 2000년대 초반부터 활동한 셈이다. 우선 행방불명인유족회 영남위원장을 6~7년 했다.”

[책임연구원 주: 증언자가 말한 행불인유족회 ‘영남위원장’이란 대구(영남)지역으로 끌려간 희생자들의 유족들의 대표라는 뜻이다.군법회의 수형인명부(受刑人名簿)가 발굴되자 유족들은 비로소 형무소로 끌려간 후 행방불명된 가족이 몇 년 형을 선고받아 어느 형무소에 수감됐던 것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대개 15년형은 대구형무소, 7년형은 대전형무소, 미성년자는 인천소년형무소, 무기징역과 20년형은 마포형무소, 여성은 전주형무소, 1년형 등 일부는 목포형무소에 수감됐다. 그래서 행불인유족회는 그 산하에 형무소 소재지역을 중심으로 ‘경인위원회’, ‘영남위원회’, ‘대전위원회’, ‘호남위원회’ 등을 두었다. 4.3평화공원에 세운 ‘행방불명인 표석’도 형무소 소재지를 중심으로 했다.]

* ‘자식의 도리’ 다하려고 유족회 활동에 열중

“현재는 제주4.3행방불명희생자유족협의회장, 4.3평화합창단장, 4.3명예교사 역할을 맡고 있다. 4.3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만큼 열심히 하려고 앞장서고 있다. 

자식의 도리로서 비참하게 돌아가신 원혼을 달래고 싶다. 그래서 아버지가 하늘에서 ‘우리 아들 잘하고 있다’고 주변에 자랑이라고 할 것은 아닌가 하면서 4.3 일에 나서고 있다.”

* 4.3특별법 개정돼 군사재판 무효화하고 보상해야

“4.3특별법이 하루빨리 개정돼 보상은 물론, 군법회의를 무효화해서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해야 한다. 국가가 공권력으로 피해를 입혔으니 국가가 처리해줘야 한다. 제주도를 ‘평화의 섬’이라고 하는데, 억울함이 풀리지 않아 속에 농이 가득 차 있는데 외부에다가 ‘평화의 섬’만 운운하면 무슨 소용인가. 진정 평화의 섬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4.3군법회의를 무효화시키고 배·보상이 이뤄져야만 한다. 

그리고 4.3에 쓰이는 이런저런 예산이 많은데 정작 유족에게 쓰이는 돈은 미약하다. 유족의 아픔을 제대로 생각하지 않는 예산인 것이다. 합창단, 임원회도 스스로 돈을 내면서 하고 있고, 유족회 직원들은 봉급도 제대로 못 받고 있다.”

* 4.3교육에 힘써야

“우리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아낌없이 주는데 자식들은 부모의 아픔을 잘 모른다. 4.3도 모르고 부모의 고통도 모른다. 학생들이 4.3의 진상과 역사를 알 수 있도록 교육이 앞장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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