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72주년 기획] 4.3피해 회복탄력성 인터뷰 (6) 문순선

김종민 전 국무총리소속 4.3위원회 전문위원의 최근 '4.3피해 회복탄력성' 연구는 길게는 27년전 인터뷰했던 4.3피해자를 다시 만났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강산이 세 번 가까이 바뀌는 동안 4.3피해자들의 몸과 마음은 얼마나 회복됐을까. [제주의소리]는 4.3피해 회복탄력성 연구 보고서에 이어 연구 과정에서 진행한 인터뷰 11건도 소개한다. 월요일과 목요일 매주 두 차례 씩 총 11회 게재를 통해 4.3피해자들의 피해회복 과정 전반을 생생한 목소리로 전한다. [편집자 주]

연구방법은 많은 사람을 도식화된 설문조사를 통해 계량화·도표화하기보다는 심층 인터뷰라는 질적 조사방법을 적용하였다. 특히 본 연구의 책임연구원은 과거 4.3피해를 경험한 대상자를 조사한 적이 있다. 즉 책임연구원이 제민일보 기자 시절 '4.3은 말한다'를 연재하기 위해 1990년대에 이미 만나 인터뷰를 했으며(11명의 인터뷰이 중 8명), 인터뷰 내용이 신문에 게재된 바 있다. 일반적으로 사회학에서는 사생활 보호를 위해 인명과 지명을 알아볼 수 없도록 익명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은데, 본 연구의 본문은 익명이지만, 부록으로 실린 구술내용에서는 모두 실명을 사용했다. 구술자들도 이에 적극 동의했으며 사진 촬영은 물론 동영상 촬영도 허락했다. 실명을 쓴 까닭은 구술 내용이 검증될 수 있어야 하고, 그래서 구술 내용이 훗날 역사의 사료로써 기능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물론 구술자들이 구술을 마친 후 ‘어떠어떠한 내용은 빼 달라’고 한 부분은 삭제했다. [필자 주]

# 문순선(文順善. 제주시 연동)

1차 증언(증언자 문순선의 시어머니 고난향 취재): 1993년
2차 증언(문순선과 고난향, 함께 취재): 1999년 6월 28일
3차 증언(문순선): 2019년 8월 29일
 
▲ 문순선 인적사항
* 생년월: 1933. 3.(실제 1930. 3.)
* 본적지(출생지): 제주 연미마을
* 현주소: 제주시 연동


* 1차 증언(문순선의 시어머니 고난향의 증언)
* 고난향(高蘭香): 
- 1907년 2월 11일생
- 1993년 증언 채록(당시 86세)
- 제주시 오라동

* 4.3당시 가족상황

“남편과 나는 일제 때부터 일본에 돈 벌러 갔었는데 해방 후 남편은 일본에 남고 우선 내가 아들 넷을 데리고 홀로 살던 중 4.3이 발생했다.”

* ‘오라리 방화사건’ 직후 대동청년단 단원에게 구타 당해

“대동청년단이 마을에 들이닥쳐 불을 질렀다. [책임연구원 주: 1948년 5월 1일 우익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단원들이 오라리 연미마을의 일부 가옥에 대해 불을 지른 사건을 말함]

당시 나는 남편도 없고 어린 아이들만 데리고 살 때인데, 대동청년단원들이 마을에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문을 꼭 잠그고 있었다. 그런데 이웃사람이 와서 ‘대청원들이 불을 지르고 있다. 어서 나오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집을 나와 시누이가 ‘도노미’(정실)에 사니까 그곳에 가서 하루를 지냈다. 다음날 집에 와보니 궤고 이불이고 모두 밖으로 내쳐져 있었고 집들은 불에 탔다. 

하루는 대청원들이 ‘어우눌’(오라리의 한 자연마을)을 포위해 있다가 보이는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잡고 때리고 하다가 내가 보이니까 내게 와서 ‘이집에 폭도들이 숨지 않았느냐’고 따졌다. ‘나는 폭도는 모릅니다’라고 했더니 마구 구타를 하면서 ‘폭도새끼가 폭도를 모르느냐. 너 폭도들에게 밥해 줬지?’라고 억지를 쓰면서 계속 때렸다. 얼마나 맞았는지 지금도 쑤신다.”

* 1948년 6월 9일(음력 5월3일) 사건

“토벌대가 고태조 등 3명을 처참하게 죽였다. 죽일 때도 아주 잔인했다. 우린 아무 죄가 없다고 해도 죽였고, 고태조는 ‘살려줍서. 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라고 애원하니까 그들은 불 지른 소나무 숲을 가리키며 ‘살고 싶으면 저쪽으로 뛰라’고 했다. 고태조가 그 불 속으로 뛰어들 때 등 뒤로 총을 쏴 죽였다. 고석규는 내 오라방 아들이다. 또 그날 토벌대는 사람들을 모아 그중 어느 하르방은 말이 되어 엎드리게 하고 어느 할망은 그 위에 태운 후 기어가게 하는 등 마을사람들을 모욕했다.”

* 1949년 7월경 전주형무소…함께 간 막내아들 형무소에서 사망

“동척회사(주정공장)에 많은 사람들이 갇혀있었는데, 그 때 같이 있던 아들이 설사를 심하게 해서 경황이 없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내보낼 사람은 이름을 불러 내보내고, 못나갈 사람은 또 그들대로 분류했었다고 한다. 그러던중 ‘고난영!’ 하고 부르는 소리가 났다. 그래서 ‘예’하고 대답하곤 아기를 데리고 그들에게 달려갔더니 ‘고난영은 이미 나갔수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정신이 아찔해 ‘이름을 잘못 들어서 사람이 잘못 분류됐다’고 하소연했으나 그들은 ‘바꿔지고 뭐고 이젠 필요없다’고 말했다. 

그 후 나머지 갇혀있던 사람들이 전주형무소로 갔는데, 그때 여자만 80여명 됐다. 이 말을 하려니 가슴이 떨려 말을 못하겠다. 배가 고파 속옷을 뜯어 입에 넣어 굶주림을 속였다. 그런 세상이 또 있을까. 너무 배가 고파서 얼른 징역이라도 보내주면 밥이라도 먹여줄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전주교도소에 가니 소장이 말하길 ‘당신은 이름이 바꿔어져 온 사람 같은데, 형량이 2~3년쯤 되면 바뀐 사람을 불러들이고 당신을 풀어줄 텐데 형량이 10개월 정도 남았으니 여기서 수양이나 하다가 가라’고 했다. 너무나 기가 막혔다.

전주교도소에는 아기(막내아들)와 같이 갔었는데, 10개월 갇혔다가 나올 무렵 아기는 결국 그곳에서 잘 먹지 못하고 병에 걸려 죽어버렸다.

또 출옥해 와 보니 셋째 아들(당시 13살)는 작은 동서가 돌봐주고 있었는데 물에 빠져 죽어 있었다.

또 큰 아들은 아무 죄가 없는데도 경찰에 끌려가 죽었다. 비행장에 실려가 구덩이 파서 매장당했다. 죽은 날은 음력으로 8월 10일이다. 

이 사태를 생각하면 가슴이 떨려 잠 못 이룬다. 그 꼴을 보고 이곳에서 오래도 살았지.

결국 아들 넷 중에 둘째아들만 현재 살아남아 서울에 살고 있다. 둘째 아들은 내가 징역간 후 이모네 집에서 얻어먹고 지냈다. 친정집은 씨멸족 해서 제사와 명절지낼 남자 하나 없어졌다. 너무 기가 막힌 일이다. 오빠 고석규, 오빠아들 고치규, 오빠의 딸 고춘옥이 모두 토벌대에 의해 학살당했다.”

* 며느리 문순선의 고초…주정공장에 감금돼 있을 때 유복자 낳아

“우리 며느리(문순선)는 시집온 지 1년 만에 남편(큰아들)이 죽어 20살 때 청상과부가 됐다. 그런데 아들이 죽기 전 며느리 뱃속에 아기가 있어서 유복자로 아들을 낳았다. 

하루는 토벌대가 공회당 마당에 마을사람들을 모두 끌고 간 날인데, 그들은 우리집에 와서 ‘네 서방 어디갔냐. 폭도질 하러 갔냐’고 윽박질렀다. 내가 ‘남편은 일제 때부터 돈 벌러 일본에 갔고 지금도 일본에 있다’고 말하자 그들은 ‘이 빌어먹을 년, 일본이라니…’라면서 때렸다. 

그때 며느리를 골방 속에 숨겨놓았는데, 그들은 결국 며느리를 찾아냈다. 그리곤 공회당으로 끌고 갔다. 그리곤 며느리를 걸상 위에 눕힌 후 임신한 배 위에 긴 널빤지를 깔아놓고 두 놈이 나무 양쪽에 앉아 널뛰기를 하면서 ‘네 서방 어디갔느냐’며 고문했다. 며느리는 ‘난 모릅니다’고 애원했지만 그들은 ‘모르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어멍에겐 말 한 해도 각시에겐 말한다. 폭도질 하러가지 않았느냐?’면서 고문했다. 나는 며느리가 다칠 까봐 ‘이 아인 모릅니다. 놔 줍서, 놔줍서’ 하면서 애원했다. 그랬더니 그들은 내 뺨을 때리고는 계속 그 짓을 했다. 그런데도 그 속에 있던 아기가 살았지. 그 손자가 살아 지금 44살이다. 이름은 송승문이다.

며느리도 같이 살고 있다. 며느리가 내게도 잘하고 제사 명절도 잘하고. 우리 며느리는 비석 세워줄 사람이다. 20살 때 청상과부가 된 건데…. 며느리는 나와 같이 주정공장에 같이 끌려갔었다. 며느리는 그곳에서 아이를 낳은 것이다. 내가 받았다. 주정공장에는 꽤 오래 살았는데 그러다보니 다른 사람들도 아기를 많이 낳았다. 그런데 우리 며느리는 뒤늦게 낳다 보니 쌀도 안주고 담요도 안줬다.” 


# 2차 증언
문순선(文順善. 1999년 70세)
- 1999. 6. 28. 자택에서 구술 채록. 시어머니 고난향과 같이 사진촬영.

* 시어머니 고난향에 대해

“시어머니는 현재 93세이다. 그러나 귀가 멀어 의사소통이 안된다. (그러나 고난향은 책임연구원이 기자 시절 과거 자신을 찾아와 취재했고, 사진도 찍었다는 사실을 기억했음) 시아버지는 내가 결혼하기 전에 ‘아들 장가보낼 때 사용할 옷감을 끊어오겠다’며 일본으로 간 후 사태가 어지러워지자 돌아오지 못했다. 그 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내가 결혼 때도 없었다.

내 친정은 오라리 ‘연미마을’이고, 시집은 약간 남쪽인 ‘어우눌’이었다. 당시 시어머니는 연미에 살고 계셨다.”

* 남편 송태우(宋太佑, 19) 공항 부근에서 토벌대에게 희생

“남편 죽은 날도 정확히 모른다. 음력 8월 10일에 제사지낸다. 혹시 생일이 아닐지···.”

(생일이 아니다. 다른 사람도 대개 그때 제사지낸다)

“글쎄. 혹시 시어머니가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신도 찾지 못하고 죽은 날도 정확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남편은 1948년 5월 이후 계속 도피생활을 했다. 그 후 산에서도 만나지 못했다. 내가 결혼할 때도 다소 어지러울 때이다. 아무튼 결혼생활을 채 1년도 하지 못했다.”

* 1948년 6월경 임신한 몸으로 토벌대에게 고문

“남편이 사라지니까 토벌대가 와서 숨어있던 나를 찾아냈다. 이때 이미 젊은 남자들은 마을에 없었다. 내가 임신한 지 얼마 되지 않을 때이다. 난 숨었으나 곧 끌려나와 토벌대가 내 배 위에 널빤지를 얹어놓고 위에 올라탔다. 시아버지는 당시 일본에 있었으나 시어머니에게 ‘남편 찾아내라’며 고문했다. 그리고 도망치지 못한 남자 한 명과 나와 나보다 몇 살 위인 여자 등 세 명은 숨었던 죄로 제주경찰서에 끌려가 약 일주일 살다 나왔다.

난 당시 별 고문을 받지 않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모진 고문을 받았다. 코에 물을 넣으며 두드려 패면서 ‘바른대로 대라’고 했다.”

* 젊은 남자들 도피생활

“아무튼 젊은 남자는 집에 있지 못했다. 잡아가면 무조건 쏘아부니까. 온다 하면 무조건 숨었다.

당시 20대 남자 중 재수 좋은 사람을 빼고는 거의 다 죽었다. 처음부터 잘 했으면 몰라도 무조건 두드려 패고, 쏘아대니 죄 없이 이리저리 쫓겨 도망다녔다. 너무도 억울한 죽음들이다.”

* 연미마을과 어우눌 방화···오라3동 ‘궤랑’으로 소개

“날짜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토벌대가 아직 날이 밝지 않은 새벽에 와서 집집마다 불 질렀다. 그런데 이날은 학살하지 않은 것 같다. 물론 남자가 없으니까. 처음엔 우리에게 밭에 가 있으면 조금 후 죽일 거라 했는데, 불을 지른 후 죽이지는 않고 친척집 등을 찾아 내려가라고 했다.

우린 오라3동 ‘궤랑’이란 곳으로 갔다. 그러나 얼마 후 그곳도 불을 지르니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임시 피한다는 생각으로 산으로 올랐다. 골프장 윗쪽이다. 열안지오름 부근에서 숨어 살았다.”

(혹시 산사람들이 입산을 권유했는가?) 

“아니다. 숨으면 살아질까 하여 우리끼리 오른 것이다. 읍내에 친척이 있는 사람은 내려가는 사람도 혹시 있었을지 몰라도 대개는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책임연구원 주: 증언자는 1933년생이다. 그러면 1948년 당시엔 만 나이가 아닌, 우리나라 식의 나이로 쳐도 불과 16살이다. 그런데 그렇게 일찍 시집갔는가? 또한 남편 송태우는 1931년생이니 1948년 당시 18살이다.]

“그건 옛날에 호적신고를 하며 제대로 못해 그런 일들이 발생했을 것이다. 난 올해(2006년) 77세이다. 18살에 결혼했고, 19살에 4.3사건을 만났다. 그리고 아들을 낳은 것(1949년)은 20살 때이다. 그리고 남편은 나보다 1살 위였다” [책임연구원 주: 그렇다면, 증언자의 실제 생년은 30년생이다. 그리고 남편 송태우는 29년생임]

* 피신생활(‘혹담밭’에서 열안지오름 남쪽 ‘가매왓’ 등지로 피신)

“1948년 12월경(구술자는 ‘1948년 11월’이라고 했는데, 이때가 양력인지, 음력인지 잘 기억하지 못함. 그런데 증언자가 대개 음력을 기준으로 하여 진술하는 것으로 보아 음력일 가능성이 높음. 그렇다면 1948년 12월임) 토벌대가 집을 불태워버리자 우리 가족들은 현재 오라골프장 오른쪽 속칭 ‘혹담밭’이란 곳으로 피신했다. 혹담밭에는 당시 민가가 몇 채 있던 곳이다. 그 집들 중 한 곳을 빌어 몸을 의지한 것이다. 피난갈 때는 시어머니(고난향), 남편(송태우), 나(문순선), 시아주버니 2명(7살, 3살), 시누이(6살) 등 6명이 함께 피난 갔다. 

한편, 남편 바로 아래 남동생(당시 14살)은 읍내에 있는 시이모(시어머니 고난향의 여동생) 댁에서 살고 있었다. 즉 시어머니에게 자식이 많으니 시이모가 언니를 돕느라 한명 데리고 산 것이다.

그리고 피난 당시 나는 임신해 있을 때이다. 전에 이야기했듯이 난 피난 전에도 토벌대가 서방 내놓으라며 임신한 내 배 위에 널빤지를 깔아 널을 뛰며 고문을 했었다. 

아무튼 우리 6식구가 혹담밭에 있는 한 민가를 빌어 생활하던 중 토벌대가 그곳까지 와서 집들을 또 불태웠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가매왓’이라는 곳으로 피난 갔다. 가매왓은 혹담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열안지오름 뒤쪽(즉 제주시 방향에서 본다면 오름 남쪽)으로 피신했다. 가매왓은 민가가 없는 곳이라 그 겨울에 밤을 지내려니 너무 추웠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위 때문에 제대로 걷기조차 힘들었다. 가매왓에 있을 적엔 우리 식구 외에도 오라리 주민 5~6가호 30명 가량이 함께 피신해 있었다. 그런데 자꾸 더 토벌이 심해졌다. 토벌대가 다가오는 것 같으면 부리나케 뛰어 도망쳤다. 고씨 집안의 사람 한 명은 도망치다 총에 맞아 죽었다.

이처럼 토벌이 점점 심해지자 시어머니는 남편에게 ‘너 한 명이라도 살아야 한다. 그런데 이처럼 여자와 아이들을 이끌고 피신하다가는 모두가 몰살당한다’면서 남편에게 혼자 피하라고 했다. 사실 그 무렵 도망치다가 여기저기에서 총 맞아 죽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에 우린 다 죽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남편 혼자 떠나보냈다.

그 후엔 ‘토벌대 온다!’는 소리가 나면, 난 5살 난 시누이를 업고, 시어머니는 2~3살 난 시아주버니를 업고, 7살난 시아주버니는 혼자 뛰면서 도망다녔다. 주로 열안지오름 부근의 굴속에 살았다. 또는 움막을 지어 살기도 하고. 어떻게 해서 살아졌는지 모르겠다. 

4.3 생각하면 기가 막히다. 그런 세상 다시 온다면 자살하지. 목숨은 참으로 질긴 것이다”

강요배의 작품 '이승과 저승 사이', 종이에 목탄, 58x49cm, 1991.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강요배의 작품 '이승과 저승 사이', 종이에 목탄, 58x49cm, 1991.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 귀순(1949년 4월)과 주정공장 수감 중 아들 출산

“남편과 헤어진 지 1달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인 1949년 음력 3월에 오라리에 살고 있는 외삼촌댁으로 갔다. 난 만삭의 몸이었고, 어린 시아주버니들은 도저히 먹을 것이 없으니 살 수가 없었다. 그러다 내려오면 살려준다는 소문에 내려오게 된 것이다. 외삼촌에게 ‘우리가 내려왔다고 경찰서에 신고해 달라’고 했다. 곧 경찰이 왔고, 우리는 모두 경찰 차에 실려 주정공장으로 끌려갔다.

주정공장에서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빽빽하게 갇혀 살아서 우리 일 외로는 잘 모른다. 너무도 배가 고팠고 물이 그리웠다. 주정공장에 갇힌 지 1달 만에 아기를 낳았다. 시어머니가 받아줬다. 거기서 애기 낳은 사람도 여럿 있다. 음력 5월 그믐께 풀려났다. 아들은 음력 5월생이다. 애기 낳으니 기저귀 하라고 헌 천을 조금 주었다.”

* 시어머니 고난향과 시아주버니와 함께 전주형무소(시아주버니 사망)

“주정공장에서 아기를 낳고 얼마 지나자 일부는 풀어주고, 일부는 형무소에 보냈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이름이 잘못 불려 전주형무소로 가게됐다.(수형인명부에는 ‘고난향(高蘭香). 42세. 농업. 제주읍 오라2구. 무죄주장. 유죄판결. 징역1년. 언도일자 1949. 7. 7. 복형장소 전주형무소”라고 기재돼 있음)

시어머니는 형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형무소에 계실 때 함께 업고 갔던 시아주버니는 결국 형무소에서 돌아가셨다.”


# 3차 증언
문순선(文順善. 2019년 90세)
-3차 증언(문순선): 2019년 8월 29일 자택에서 구술 채록

* 임신한 몸으로 토벌대에게 고문받아…노인들에게 ’말태우기‘ 모욕

“오라2동 회관(연미마을 회관)에 끌려가보니 할머니 위에 할아버지를 태우고 운동장 마당을 기면서 돌게 하는 것을 봤다. 12명쯤 있었고 70세 넘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구부리고 타면서 운동장을 강제로 돌고 있었다. 그런 꼴을 본 적이 없다. 줄줄이 운동장 마당을 기면서 돌고 있었다. 

나도 끌려간 상태라 정신이 없었는데 우익청년단원들이 나무토막을 내 배위에 올려놓고 그 위에 올라타서 밟았다.”

* 3달 동안의 피신 생활

“처음 혹담밭으로 피신갈 때는 그 동네 어른들 집 마루에서 2~3일 살았다. 그런데 그 동네도 불을 지르니 냇창의 돌을 의지해서 하룻밤 자기도 했다. 

겨울에 가서 봄에 내려왔는데 3달 동안 피신생활은 먹지 않아도 밥 먹을 생각은 없었다. 사흘 정도는 굶은 수가 있는데 혹담밭 이후부터는 무서운 생각뿐이었다.”

(‘혹담밭에서 닷새 살 때는 음력 11월쯤이다. 그 다음해 봄에 내려왔는데 석달 동안 어떻게 지냈는가?’ 라는 질문에 증언자는 ‘무서운 생각 뿐이었다’는 말만 반복하였음) 

* 주정공장 석방 이후 ‘진올레안’에서의 생활

“내 시집은 어우눌이고 친정은 연미마을이다. 주정공장에서 석방된 후 돌아와 보니 집은 토벌대가 불태워버려서 갈 데가 없었다. 그래서 친정어머니를 찾으니 친정마을인 연미마을도 불타버려서 친정어머니도 오라2동의 ‘진올레안’(긴 올레)의 친척네 집으로 간 상태였다. 그곳에서 어머니는 마루에, 작은방에는 친척네가 살았다. 다른 피난민들도 있었다. 원래 그 집 주인은 제주읍내에 살았고 밖거리는 집 주인의 친척이 살고 있었다. 구들방에는 자보지도 못하고 마루에서 지내다가 2년쯤 지나니 그곳에 살던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가니까 그때부터 그 집을 차지해서 살았다.”

(그 때는 무엇을 먹고 살았는가?) 

“강냉이 가루를 범벅해서 먹거나 밀쭈시를 사다가 범벅해서 먹었다.(밀범벅), 진올래안에서 일곱 해 넘게 살았다. 아들도 진올래안에서 초등학교에 다녔다.”

* 연미마을에서 양철집을 짓고 생활…땔나무 팔아 생계 유지

“다시 연미마을로 돌아왔는데 그때까지도 밤도 제대로 못 먹고 살았다. 곶자왈 가서 나무를 해서 양철집을 지었다. 사태가 완화되니 지붕 할 양철과 시멘트를 지원해주니까 정식으로 연미마을 서쪽 아래로 가서 집을 지었다.

그때는 해볼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산에 가서 땔나무를 모아 읍내에 가서 팔며 살았다. 그땐 연탄과 기름도 없던 시기라 땔나무를 해서 주로 식당에 팔았다. 민오름 뒤 목장, 혹담밭 부근의 곶자왈 가서 땔나무를 해서 왔다. 잔잔한 나무를 모아서 베에 져서 내려왔다. 땔나무를 사는 식당 사람들이 ‘아무 날이나 나무해옵써. 팔아줄테니’라고 해서 땔나무를 팔 수 있었다. 

아무튼 주 수입은 나무 땔감이었다. 장사도 못하고 농사도 지을 수 없었다. 조농사는 비료 안 해도 되지만, 보리농사는 반드시 퇴비를 만들어 거름을 주어야 되는데 퇴비를 마련할 힘이 없으니…. 퇴비거름은 들에 가서 촐을 베어다 썩혀서 만들어야 되는데 일을 할 사람이 없어서…. 

밭가는 거는 다른 사람 빌려서 했다. 밭가는 일꾼을 빌리는 방법은 돈을 준 적도 있고 일로 갚은 적도 있다. 여자들이 김매기는 할 수 있지만, 밭을 갈 수가 없으니 밭갈쇠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 ‘우리 밭을 갈아 달라’고 하려면 돈을 주든지, 아니면 며칠 동안 그 집의 일을 해줘야 했다. 돈을 못 주는 경우 보통 5일은 김매기를 해줘야 하루 밭갈이가 해줬다. 농사도 제대로 못 짓고 보리농사 못 짓고 주로 땔나무를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땔나무를 팔아서 조나 보리 범벅을 해서 먹었다.”

* 시아버지가 일본에서 보내준 돈으로 경제적 안정 찾아 

(남편은 돌아가셨지만, 재산은 있지 않았나?)

“남편 명의로 재산은 있었지만 많지 않았다. 일본에 사시는 시아버지가 돈을 보내줘서 집을 지었다. 마흔 살 이후부터 시아버지가 일본에서 돈을 보내준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일본에 계시는 시아버지가 ‘제주도에 사람이 다 죽었다. 아들들도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화병이 났다. 시아버지는 자신은 몸이 아파도 절약해 돈을 모아 제주도로 보내줬다. 그 돈으로 이 땅을 사고 밭도 샀다. 시아버지는 내가 70살이 되던 쯤에 일본에서 돌아가셨다. 일본에서 시아버지가 지원해 준 것이 사는 데에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다.”

* 4.3 이후의 삶 

(아들은 어느 학교를 다녔나?)

“농업학교를 졸업했다. 농업학교 학비를 대기 위해 산에 가서 나무해 오고 곗돈을 부었다.”

(2004년도에 장한 어머니상을 받았다. 4.3로 인해 화병이 났을텐데, 대략 언제부터 한이 풀렸나?)

“아직도 풀린 것 같지 않다. 살아온 생각을 하면…. 갑자기 토벌대가 집에 불붙이고. 그래도 아들이 사고치지 않고 곱게 자라줘서 다행이었다. 아버지도 없다고 깡패짓이나 하면 속이 탔을 텐데, 어릴 적부터 얌전하게 지냈다. 우리 아들이.”  

(한이 풀리지 않았다 하시는데 어떻게 하면 한이 풀릴 것 같나?)

“속에 묻고 내가 죽으면 그때야 한이 풀리겠지.” 

(추념식에 가는 것이 위로가 되는가?)

“위로가 된다. 4.3특별법으로 공원도 만들고, 대통령 사과로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완전히 풀리지는 못했지만, 노무현 대통령도 사과했고, 문재인 대통령도 사과했다. 대통령들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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