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162. 봄비는 잠이 오는 비, 여름 비는 개역 비

* 잠비 : 잠이 오는 비
* 개역비 : 비숫가루를 먹게 하는 비

봄비와 여름비, 봄과 여름이라는 계절에 내리는 비인데 봄비야 봄에 내리니 봄비라 하는 것이겠지만, 여름비에는 제주도만의 특이한 풍속과 농촌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오롯이 담겨 있다.

농촌은 봄비에 깨어난다. 밭갈이하고 씨를 뿌리게 하늘이 비를 내려준다. 양파, 마늘, 감자, 고구마도 심어야 한다. 만물이 소생하는 생명의 계절에 내리는 비이니 봄비는 푸른 계절에 내리니 녹우(綠雨)요, 감우(甘雨, 단비)다.

한 해의 농사가 시작되니 농촌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진다. 바빠 죽을 지경인데 하늘이 비를 내리질 않는가. 안 그래도 춘곤증으로 온몸이 나른해 눈에 졸음기가 주렁주렁하던 참이다. 제 아무리 바쁘기로 앉은 자리에서 스르륵 한잠 붙이지 않을 수 있으랴. 몇 분 동안 얼른 자다 깨는 쪽잠이고 새우잠이다. 그 몇 분 눈 붙인 잠, 그 꿀맛 같은 잠 뒤가 참으로 상쾌하다. 정신이 번쩍 든다. 일을 할 맛이 난다. 하는 일에 능률이 오르는 것이다. 바쁠수록 돌아가라 한다.

이미 옛적에 우리 제주 선인들이 체득한 데서 얻은 것이라 벌써 한소리 한 것이다. 노곤해 한잠 자는 여유를 놓치지 않던 생활의 지혜가 아닐 수 없다.

‘요름빈 개역 비’라 한 데는 1950~1960년대까지만 해도 보편적으로 이뤄지던 제주 고유의 풍속이었다.

한여름엔 조팟의 검질(조밭에 김)을 매어야 한다. 뙤약볕 아래 바람 한 점 없는 불볕더위에 사래 긴 밭에 앉아 마른 밭을 골갱이(호미)로 잡초를 매는 고된 일이다. 그런 중 비가 오면 하루 이틀 집에서 고단한 몸을 쉬게 된다.

여름 한철 비 오는 날이면 쇠솥뚜껑을 화덕에 엎어 놓고 보리를 볶았다. 그걸 맷돌에 놓아 갈고 빻아 만든 것이 ‘보리개역(미숫가루)’이다. 보리개역은 여름철 농촌사람들이 즐겨 먹던 별미였다. 식은 보리밥을 버무려 먹기도 하거니와, 목이 마를 때 대접에 몇 술 떠놓고 냉수를 펑펑 부어 휘저어 들이켜면 더위까지 단숨에 내려갔다. 이런 별미가 있으랴. 보리개역 만들려고 보리를 볶을 때면 볶는 냄새가 앞마당을 가로질러 골목까지 진동했다. 지금도 한여름 비 오는 날 어머니가 보리를 볶던 모습이 어른거리고 보리 볶던 구수한 냄새를 흠흠 맡게 된다. 농촌에서 자란 사람들에게 이만한 추억이 있으랴 싶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개역. ⓒ김정숙

‘봄에 잠비, 요름엔 개역비’

앞뒤 두 구절에 나오는 ‘비’ 둘 다 바쁜 가운데 잠시 ‘쉬어 가게’ 했다. 졸리니 잠깐 눈을 붙였고, 한여름 날에 비가 오면 오랜만에 집에 들어 쉬면서 개역을 만들어 가족들과 함께 나눠 먹는 즐거움을 누렸던 것이다. 개역을 뻥튀기처럼 부풀려 가루로 만들어 밥에 버무려 먹거나 냉수에 불려 마셨다. 모리쌀 몇 됫박이면 되니, 쪼들리는 살림 형편에도 개역만은 만들어 먹었을 정도다. 제일 경제적인 먹거리였다. 얼마나 지혜로웠던지 아잇적엔 몰랐는데, 어른이 되고 나서 깨달아 놀라웠다.

요즘 봄비엔 졸음 겨워하나, 여름비에 개역을 만드는 집은 거의 없으리라. 연세 드신 어르신들이 옛날식으로 능히 할 수 있을 것이지만, 먹거리가 풍성하다. 보리개역 같은 것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대신 쌀을 볶아 만든 ‘미숫가루’는 상품으로도 나오지만…. /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자리>, 시집 <텅 빈 부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