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160. 비엣 타인 응우옌,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부희령 옮김, 더봄, 2019.

제노사이드에 관심을 갖고 있는 나는 1965년 인도네시아 군부정권에 의해 자행된 대학살을 다룬 다큐멘터리 <침묵의 시선>(2014)을 우연히 보았다. 피해자 가족인 남성의 아버지는 그가 아주 어렸을 적 같은 동네 한 무리의 마을 사람들에게 처참한 죽임을 당했고, 그는 아버지의 죽음과 연루된 사람들을 찾아가 그 시절을 마주하도록 함으로써 좁게는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과 그 죽음의 충격으로부터 미처 헤어나오지 못하는 가족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고, 넓게는 아버지의 죽음과 흡사한 학살이 일어난 구체적 실상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도저히 이성적 인간으로서 수행할 수 없는 괴물과 다를 바 없는 비인간에 대한 인류적 반성을 촉구하도록 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나는 이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피해자의 유족과 가해자가 서로 얼굴을 대면한 채 지난 시절을 떠올리는 장면 하나하나가 그 어떤 역사 서술보다 생동감 있는 구체성을 띠는지 실감하였다. 인터뷰 과정에서 피해자의 아들은 최대한 담담하게 참혹한 시간과 공간 속으로 가해자를 인도한다. 물론 가해자는 처음부터 쉽게 그 시간과 공간으로 들어서지 않는다. 하지만, 그 시간과 공간에 발길을 들이민 순간 가해자는 기억할 수밖에 없다. 그 당시 군부정권에 적극 협력하여 무고한 피해자를 공산주의자로 일방적으로 간주한 채 대학살의 주동자로서 참여한 것을. 그런데 그는 어쩔 수 없는 정치 상황 논리, 즉 반공자유주의 국가를 수호하기 위해 그 같은 끔찍한 행위를 서슴없이 자행한 자신의 행동에 대한 역사의 면죄부를 부여한다. 그런데 시쳇말로 엽기적인 것은, 가해자로서 역사의 면죄부를 주장하는 그들의 말과 표정에는 그 숱한 억울한 죽음에 대한 양심의 가책과 반성적 윤리를 조금이라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들은 당시 벌어진 일을 증언한다는 것이 갖는 역사적 및 윤리적 의미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가운데 죽음을 재현하는 장면마다 자신이 얼마나 주도면밀하게 확실히 역사의 적으로 간주된 자들의 목숨줄을 끊었는지에 대한 확신에 찬 증언을 내뱉는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용단 있는 행동 때문에 지금의 반공산주의적 평화로운 일상을 살고 있다는 언어도단을 이어간다. 가해자들은 철저히 그들 중심으로 당시의 구석구석을 놓치지 않고, 그곳에서 가해자로서 역할에 얼마나 충실했는지를 실제 행위와 말을 곁들이면서 열심히(?) 증언한다. 그들은 백주대낮에 살고 있되 그들의 기억은 칠흑의 사위로 둘러싼 지옥도(地獄圖) 안에 갇혀 있다. 

이와 관련하여, 베트남계 미국인 비엣 타인 응우옌의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여러 생각거리를 준다. 이 책에서 가장 빈도수가 높은 단어는 ‘공정한 기억’이다. 기억이 공정하다? 이것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자가 ‘베트남계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베트남 전쟁 도중 남베트남에서 태어나 당시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이 함락된 후 해상 난민으로서 미국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정착하였다. 이후 그는 미국 주류 사회에서 인종차별과 민족차별을 겪으면서 이른바 베트남의 디아스포라로서 삶을 살고 있다. 

사실, 이 책을 통독하는 동안 베트남에 대해 갖고 있는 내 자신의 시선을 심각히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고백해야겠다. 베트남 전쟁을 거치면서 온전한 민족독립국가로 탄생한 베트남에 대한 모종의 동경심을 가졌다. 여기에는 베트남 특유의 역사적 혁명의 과정 속에서 세계의 제국들(미국, 프랑스, 일본, 중국)에 굴복하지 않은 해방의 정념과 그 역사적 승리가 큰 몫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베트남의 역사는 호치민을 중심으로 한 북베트남의 혁명주체에 무게중심이 실려 있었던 게 엄연한 현실이다. 그래서 자연스레 남베트남은 베트남의 해방 도정에서 시나브로 그 존재가 망각되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것은 자연스레 ‘남베트남=미국의 꼭두각시 정권=미국’이라는 반(反)혁명적 정치이념으로 수렴되면서 북베트남의 혁명주체의 부정적 면모들에 대한 역사적 성찰이 둔감하거나 아예 무시되곤 했다. 그래서 통일 베트남 이후 북베트남이 주도한 해방의 정념을 정책적으로 잘 수행함으로써 베트남 인민의 삶에 행복을 충족시켜주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가 종종 간과되곤 하였다. 여기에는 베트남 통일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적으로 간주된 남베트남 출신 또는 남베트남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교조주의적 접근도 쉽게 지나칠 수 없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의 저자는 베트남 혁명 과정과 그 이후 베트남 안팎에서 수행되었고 실행되고 있는 북베트남 중심의 역사에 대한 기억들이 어떻게 재현되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이 책이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학(戰爭學)’이라고 부를 정도로 베트남 전쟁에 대한 접근은 다양하고 그 성과 또한 방대하다. 그런데 저자의 근본적 문제제기는 지금까지 베트남 전쟁에 대한 접근과 성과들이 과연 ‘공정한 기억’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승자와 패자 중 어느 한 쪽 시각에서 편집된 기억을 중심으로 한 접근이 과연 얼마나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다루고 있는가에 대한 래디컬한 문제의식이 이 책의 핵심이다. 그래서 저자는 승자 또는 패자 중심의 시선은 그 중심으로부터 비껴난 숱한 타자들의 입장과 시선을 방기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진정한 전쟁 이야기는 하나의 병사뿐만 아니라 전쟁이 끝난 뒤 그나 그녀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말해야만 한다. 진정한 전쟁 이야기는 민간인, 난민, 적에 대해 말해야 하고, 특히 이 모든 것을 둘러싸고 있는 전쟁기계에 대해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250쪽)

‘공정한 기억’은 이렇듯이 전쟁의 직접 당사자인 (우군)병사만이 아니라 민간인, 난민, 적을 두루 포괄해야 한다. 이들의 입장에서 무엇이 어떻게 기억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세밀히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공정한 기억은 약자와 정복당한 자, 소수자, 적 그리고 잊힌 자들을 회상하는 것으로 부정적 정체성 정치에 반대”(31쪽)하기 때문이다. 특정한 정체성(인종, 민족, 종교, 성, 지역 등) 중심의 위계질서로 이뤄진 ‘부정적 정체성 정치’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공정한 기억’을 심화 확산시키는 것은 ‘평화’의 가치를 실현하는 셈이다. 그럴 때 승자 또는 패자 중심주의로 심각히 굴절된 역사와 일상을 바로 잡을 수 있는 내공이 생긴다. 이것은 지구촌 곳곳에서 호시탐탐 전쟁의 바이러스를 전파시키고 그것을 치유한다는 미명 아래 끊임없이 전쟁 관련 유무형의 기계를 생산하는 정치(세력)와 맞설 수 있는 항체를 생성시키는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물론, 이 ‘공정한 기억’을 연습하고 실제로 실현하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을 터이다. 이 글의 서두에서 인도네시아 군부정권의 대학살에서 역사의 면죄를 스스로 부여하는 학살 주동자의 기억이 그들이 자행한 죽음의 향연을 왜곡하거나 은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재현하였다고 ‘공정한 기억’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의 승자인 북베트남 중심의 혁명에 대한 기억과, 패자인 미국이 전쟁의 불모성에 대한 기억 등이 전쟁의 모든 당사자를 아무리 두루 포괄한다고 하지만, 그 기억에 관여하는 모든 것들이 과거의 기억을 자신의 방식대로 관리하고 분식하고 통제하는 한 ‘공정한 기억’은 역사에 대한 간교한 복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저자가 힘주어 강조하고 있듯, 잘못된 ‘공정한 기억’은 인간의 심연에 자리한 비인간성을 언제든지 순식간에 역사와 일상으로 소환함으로써 현재의 삶을 지옥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후 밑줄을 그은 다음과 같은 부분이 눈에 띈다. 내 방식으로 이해한다면, ‘공정한 기억’을 연마하기 위한 ‘평화 운동’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절실하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역사와 일상의 차원에서 얼마나 많은 기억들이 불공정한가. 당신의 기억은 공정하십니까?

평화 운동은 이러한 비인간성의 실체와 마주하라고 요구한다. 평화 운동은 정념에 근거를 두거나 혹은 모든 사람들이 모두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한다는 유토피아적 시각에 근거를 두지 않는다. 그보다는 사람들의 비현실적인 인간성과 잠재적인 비인간성을 모두 인식하는 동시적이고 냉철한 시각에 근거한다. (342쪽)

▷고명철 교수

1970년 제주 출생. 광운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1998년 <월간문학> 신인문학상에서 <변방에서 타오르는 민족문학의 불꽃-현기영의 소설세계>가 당선되면서 문학평론가 등단. 4.3문학을 전 지구적 차원에서 새로운 세계문학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연구와 비평에 매진하고 있다.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문학(문화)을 공부하는 ‘트리콘’ 대표. 계간 <실천문학>, <리얼리스트>, <리토피아>, <비평과 전망> 편집위원 역임. 저서로는 《흔들리는 대지의 서사》, 《리얼리즘이 희망이다》, 《잠 못 이루는 리얼리스트》, 《문학, 전위적 저항의 정치성》, 《뼈꽃이 피다》, 《칼날 위에 서다》 등 다수. 젊은평론가상, 고석규비평문학상, 성균문학상 수상. mcritic@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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