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72주년 기획] 4.3피해 회복탄력성 인터뷰 (11) 홍춘호

김종민 전 국무총리소속 4.3위원회 전문위원의 최근 '4.3피해 회복탄력성' 연구는 길게는 27년전 인터뷰했던 4.3피해자를 다시 만났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강산이 세 번 가까이 바뀌는 동안 4.3피해자들의 몸과 마음은 얼마나 회복됐을까. [제주의소리]는 4.3피해 회복탄력성 연구 보고서에 이어 연구 과정에서 진행한 인터뷰 11건도 소개한다. 월요일과 목요일 매주 두 차례 씩 총 11회 게재를 통해 4.3피해자들의 피해회복 과정 전반을 생생한 목소리로 전한다. [편집자 주]

연구방법은 많은 사람을 도식화된 설문조사를 통해 계량화·도표화하기보다는 심층 인터뷰라는 질적 조사방법을 적용하였다. 특히 본 연구의 책임연구원은 과거 4.3피해를 경험한 대상자를 조사한 적이 있다. 즉 책임연구원이 제민일보 기자 시절 '4.3은 말한다'를 연재하기 위해 1990년대에 이미 만나 인터뷰를 했으며(11명의 인터뷰이 중 8명), 인터뷰 내용이 신문에 게재된 바 있다. 일반적으로 사회학에서는 사생활 보호를 위해 인명과 지명을 알아볼 수 없도록 익명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은데, 본 연구의 본문은 익명이지만, 부록으로 실린 구술내용에서는 모두 실명을 사용했다. 구술자들도 이에 적극 동의했으며 사진 촬영은 물론 동영상 촬영도 허락했다. 실명을 쓴 까닭은 구술 내용이 검증될 수 있어야 하고, 그래서 구술 내용이 훗날 역사의 사료로써 기능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물론 구술자들이 구술을 마친 후 ‘어떠어떠한 내용은 빼 달라’고 한 부분은 삭제했다. [필자 주]

11. 홍춘호(洪春好, 안덕 동광리)

2019년 7월 24일 안덕면 동광리복지회관에서 구술 채록

* 증언자 개인 정보
생년월: 1938년 9월
4.3 당시 가족관계: 7명(아버지 38세, 어머니 35세, 구술자 11세, 남동생 8세, 5세, 2세 등 3명, 사촌언니 16세)
현재 가족관계: 아들 3명, 딸 1명, 남편 작고
학력: 없음(초등학교 1학년)

* 군·경 토벌대에게 주민 1/3이 희생

“1948년 11월 15일 토벌대가 안덕면 동광리의 우리마을 무등이왓에 들이닥쳤다. 당시 토벌대에 의해 마을 사람 1/3이 죽었다. 며칠 뒤엔 우리 마을이 전부 불탔다. 우리 가족이 살던 집도 불에 타 한동안 숲 속에서 지냈다. 한곳에 모여 있다가 잡히면 몰살될 수도 있어 아버지와 나머지 가족들이 따로 지냈다. 

당시 우리가족은 아버지(38세), 어머니(35세), 나(11세), 남동생 세 명(8세, 5세, 2세), 그리고 사촌언니(16세)가 있었다.

아버지는 밤에만 만났다. 아버지는 토벌대가 마을에서 떠나면 마을 사람들이 살았던 여러 집터를 돌며 그곳에서 곡식을 구해오셨다. 아버지는 범벅을 만들어 가족들에게 나눠줬다. 그리고 누가 그날 죽었는지 설명해주시곤 했다. 언제 죽어도 이상 할 게 없는 시국이었다. 그땐 그래도 어머니, 아버지, 남동생들을 볼 수 있어서 위안이 되었다.”

* 남동생들 영양실조로 말라 죽어

“우리는 앞작지(마을 앞에 있는 자왈), 중통굴, 구석밭, 숨비나리, 뒷빌레, 원물오름 등 마을 근처에 있는 곶자왈을 옮겨 다니며 피신생활을 했다. 그런데 2살 남동생은 앞작지에서, 5살 남동생은 숨비나리에서 죽었다. 오랜 피신생활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해 굶어서 말라죽은 것이다. 남동생들이 죽은 뒤 침통해하셨던 아버지의 모습이 기억난다. 4대 독자였던 아버지는 아들들의 죽음에 많이 큰 상심을 느끼셨다.”

* ‘큰넓궤’ 속으로 피신

“‘큰넓궤’라는 굴속으로 피신해 들어간 때는 1948년 12월 25일로 기억한다. 마을에 불이 나고 한 달은 숲에서 숨어 지냈는데, ‘무등이왓’ 사람들끼리 더 안전한 곳으로 가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래서 큰넓궤 속으로 들어갔다. 들어가 보니 옆 마을인 ‘삼밧구석’ 사람들이 이미 들어와서 지내고 있었다. 무릎으로 기어 들어가 나무사다리를 타고 절벽 아래로 내려갔다. 절벽 바로 아래에는 삼밧구석 사람들이 지내고 있어서 우리 무등이왓 사람들은 더 안쪽으로 들어가 지냈다. 

몸을 숙여 팔과 무릎으로 기어 들어가면 넓은 공간이 나왔는데 그곳에서 지냈다. 목이 마르면 굴 위에서 똑똑 떨어져 돌 틈에 고여 있는 물을 마셨다. 누가 먼저 마실 건지 다툴 정도로 물이 많지 않았다. 억새를 빨대로 삼아 돌 틈에 조금 고여 있는 물을 빨아 마시기도 했다. 

억새는 동굴에서 생활하는데 크게 쓸모가 있었다. 억새를 바닥에 깔아 그 위에서 생활을 했다. 깨진 항아리 조각을 부딪혀 불꽃을 튀게 해 억새에 불을 붙였다. 억새는 불씨가 은근히 오래간다. 불씨가 남아있는 억새를 굴 바닥에 털어내면 어두운 동굴 속에서 길을 표시해 주었다. 

캄캄한 동굴에서 하루 종일 지내야 하는 생활이 너무나 답답했다. 토벌대가 마을을 떠난 밤이라도 나가서 하늘을 보겠다고 아버지에게 이야기했지만 한마디로 단념케 하셨다. 아버지는 ‘시국이 편해지면 나가자’고 나를 달랬다. 큰넓궤에서는 대략 40~50일 동안 지냈다.”

영화 '지슬' 속 장면. 군인들이 동광리 마을에 들어와 집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자 주민들은 마을 인근의 큰넓궤 동굴 속으로 들어가 40~50일가량 숨어 지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영화 '지슬' 속 장면. 군인들이 동광리 마을에 들어와 집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자 주민들은 마을 인근의 큰넓궤 동굴 속으로 들어가 40~50일가량 숨어 지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 은신처 큰넓궤, 토벌대에게 발각

“큰넓궤에서 나오게 된 것은 토벌대에게 발각 당했기 때문이다. 삼밧구석 사람들이 고추와 지푸라기 등을 태워 그 연기를 토벌대가 지키고 있는 동굴 밖으로 내보냈다. 연기가 매워서 토벌대는 들어오지 못하고 결국 퇴각했다. 하지만 토벌대는 동굴 밖으로 사람들이 나오지 못하게 큰 돌로 동굴 입구를 막았다. 그런데 인근 도너리오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굴 입구를 막고 있던 돌을 치워줘 동굴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결국 다른 피신장소를 찾아 나서게 되었다. 

동굴 속에서 지내다보니 작은 빛에도 눈이 예민해져 있었다. 동굴을 나온 것은 밤이었는데, 밖으로 나오니 대낮처럼 밝아보였다. 삼밧구석 사람들은 볼레오름 쪽으로, 우리 무등이왓 사람들은 미오름으로 피신했다.

삼밧구석 사람들은 피신하면서 남긴 발자국 때문에 토벌대에 잡혀가 죽었다. 다행히 토벌대가 우리 무등이왓 사람들은 찾지 못해 우리 동네 사람들은 겨우 목숨을 건졌다. 당시 미오름 정상에는 예전에 동광리 마을 사람들이 일제강점기 때 파놓은 인공 동굴이 있었는데, 그 속에서 지냈다. 그곳에서 마을사람 20~30여명이 있었다. 미오름이 화산 송이로 되어있었던 탓에 벽이 쉽게 부서졌고, 그 덕분에 조금씩 파서 공간을 넓힐 수 있었다.”

* 1949년 3월 토벌대에게 ‘자수’

“미오름에서 다음해(1949년) 3월 20일께 나와 앞작지 숲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8살이었던 동생 역시 영양실조로 죽었다. 

그런데 그 무렵 토벌대가 ‘산에서 내려와 자수하면 살려주겠다’며 선무공작 활동을 벌였다. 그래서 우리 가족도 막대기에 흰 천을 매달아 토벌대에게 ‘항복’해 산에서 내려갔다.”

* 토벌대 항복 이후 우리 가족은 ‘폭도자식’으로 살았다

“우리는 항복한 후 한 마을로 끌려갔다. 우리는 토벌대가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 쌓은 성 안에서 지냈다. 우리가 지낸 곳은 마을 사람들이 보초를 서는 곳 바로 아래였다. 우리는 ‘폭도자식’이라는 욕을 들었고 돌에 맞기도 했다. 너무 무서워서 그때 잡혀간 사람들이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함께 잡혀갔던 사람들과 ‘앞으로 그쪽으로는 오줌도 싸지 않겠다’고 다짐도 했다. 

이후 우리 마을 사람들은 화순지서로 끌려갔다. 그곳에는 사람들을 가두는 방이 두 군데가 있었다. 하나는 창이 없어 빛이 들어오지 않는 방, 또 하나는 빛이 들어오는 방. 우리는 빛이 들어오는 방에 감금됐다. 우리 방에는 무장대 가담 가능성이 덜한 노약자들이 많이 있었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방에는 젊은 남자들이 있었다. 우리가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 다른 방에 있었던 젊은 청년들은 보이지 않았다.”

* 서귀포 단추공장에서 감금생활

“화순지서에서 나와 우리는 작은 배에 탔다. 우리 마을 동광리에는 바다가 없기 때문에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바다를 봤다. 우리를 바다 속으로 빠트려 죽이려는 줄 알았다. 가족들과 부둥켜 울며 죽어도 같이 죽자고 말했던 게 기억난다. 배를 타고 한참을 가서 지금 천지연폭포 아래 항구에 배를 댔다. 이후 근처에 있었던 단추공장에 감금됐다. 민간인수용소였다.

민간인수용소를 지키던 경찰은 그 안에 있었던 몇몇 아이들을 다른 집의 식모, 애기업게, 양자, 양녀로 보내주었다. 어머니는 어린 내가 밥을 굶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나를 보내셨다. 우리 가족과 함께 있었던 사촌언니는 식모살이를 했다. 나는 다른 집의 애기업게(아기를 대신 돌봐주는 사람)으로 보내졌다. 그동안 어머니와 아버지는 여전히 단추공장에 갇혀있었다.”

* 시국은 나아졌어도 손가락질 당하며 ‘짐승처럼’ 살았다

“1949년 겨울, 어머니와 아버지가 단추공장에서 풀려나자 우리 가족은 다시 만나 화순에서 새로운 삶을 살았다. 내가 14살 되던 무렵 남동생이 태어났다. 하지만 아버지는 남동생을 얼마 보지 못하고 그해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어느 날엔가 일을 하다가 다쳐 함께 일하던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돌아오셨다. 평소 아버지는 덩치가 크고 건강하셨다. 결국 며칠을 앓다가 병원도 가보지 못한 채 엿새 만에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화순에서 어머니와 나, 그리고 남동생이 함께 살았는데 삶이 참 고통스러웠다. 다른 사람의 집을 빌려 살았다. 집 주인의 눈치가 많이 보여 먹는 것조차 마음이 편치 않았다. 눈에 거슬려 ‘폭도 자식’이라는 욕을 들을까봐. 생활이 곤궁해 이불 한번 덥지 못했다. 쌀이 없어 밀껍질을 구해다 삶아서 먹곤 했다.

이대로 살 수는 없을 것 같아 어머니가 동네 사람들의 손을 빌려 공터에 움막을 지었다. 나무로 벽을 만들고 억새를 이어 지붕을 만든 3~4평 남짓한 작은 움막이었다. 집이라기엔 초라하기 짝이 없었지만 손가락질하는 소리를 듣지 않게 되어 우리 가족은 참 기뻤다. 겨울철 눈이 내리면 지붕 사이로 눈이 떨어지는 집이어도 마음이 편했다.

7년을 움막에서 살았다. 내 나이 23살, 결혼을 하게 되어 가족들과 떨어져 살게 되었다. 동광리 남자를 만나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다. 결혼을 하고 2년 후에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 당시 남동생이 9살이어서 보호가 필요한 나이였다. 동생을 데리고 시집으로 왔다. 동생을 거둬 시집에서 키우려고 하니 죄인의 마음으로 살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남동생은 곧바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남편이 한라산에 나무를 베러가는 사이, 동생은 남편을 대신해 쇠테우리(소몰이꾼)로 일을 했다. 나 또한 제대로 학교에 다닌 적이 없었지만, 공부도 하지 못한 채 생활전선에 내몰린 동생을 생각하며 하루 종일 혼자 밭일을 하며 울었다. 

살아남는 것만이 가장 중요했던 시절이었다. 꽃다운 20대부터 30년간 먹고 살기 위해 아등바등 살았다. 내 나이 50살이 될 무렵부터 형편이 조금 나아졌다. 우리 가족들의 이름으로 된 밭을 사고, 소도 키우며 먹고 사는 걱정을 덜었다. 4.3로 가족과 집을 잃었던 나의 어린 시절을 딛고 가정 형편이 나아지자 서글프고 고통스러운 나날들이 끝났다.”

* ‘폭도자식’이라는 낙인이 지워졌다

“1980년대 후반부터 경제적인 상황은 나아졌지만 내 마음 속에는 ‘폭도자식’라는 낙인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그러다가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4.3에 대해 정부차원에서 진상규명을 하려는 시도가 큰 위안을 주었다. 4.3특별법 제정과 노무현 대통령의 공식사과, 위령제 참석 등이 나를 떳떳한 존재로 만들어줬다. 제주4.3평화공원에서 보여주고 있는 다양한 전시물들이 나 같은 사람들이 죄가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들이 나에게 큰 위로를 해준다.

한때는 나의 고향이 안덕면 동광리라는 사실을 떳떳하게 밝히지 못했던 세월도 있었다. 우리 마을이 ‘폭도마을’이라는 낙인이 찍혀 혹시나 사람들이 나를 안 좋게 볼까봐 말하지 못했다. 

유족회 활동은 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 마을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4.3 때 우리 마을과 내가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나 말고도 두 명이 함께 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날이 와서 기분이 좋다.

최근에 우리 부모님과 4.3때 세상을 떠난 동생 두 명(당시 8세, 5세)에 대한 피해자 신고를 마쳤다. 이름을 짓지도 못한 채 죽었던 동생(당시 2세)의 이름은 올리지 않았다.”

* “다시는 4.3과 같은 비극 되풀이 되지 말아야”

“아들이나 손자들에게 자세히 4.3을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물론 동생에게는 4.3때 어버지와 어머니, 동생을 키우면서 있었던 일들을 말해본 적은 있다. 기회가 있으면 우리 가족들에게도 4.3과 우리 가족들이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한번은 큰며느리가 가족들에게도 4.3 때 겪었던 일들을 말해달라고 하더라. 동광리 4.3해설사로 활동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앞으로 더 이상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되풀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젊은 세대들이 4.3을 많이 알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 끝

지난해 11월 17일 제주4.3특별법개정쟁취전국행동과 제주4.3희생자유족회,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가 제주시청 앞에서 4.3특별법 개정 쟁취를 위한 결의대회를 열고 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지난해 11월 17일 제주4.3특별법개정쟁취전국행동과 제주4.3희생자유족회,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가 제주시청 앞에서 4.3특별법 개정 쟁취를 위한 결의대회를 열고 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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