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왓 칼럼](5) 하지만 자신의 삶을 결정할 권리는 있다. / 권오상 제주장애인권익옹호기관장

편견으로 무장한 이들이 사회적 약자들에게 여전히 반인권적 발언과 행동을 주저하지 않는 일들을 우리는 종종 목격하곤 합니다. 존재 자체로 차별받는 사회적 약자들이 있어선 안됩니다.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난민 등 대상은 다르나 일상 곳곳에서 여전히 차별이나 혐오, 폭력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인권문제를 다룰 '인권왓 칼럼'을 격주로 연재합니다. 제주평화인권연구소왓을 중심으로 인권활동가들의 현장 목소리를 싣습니다. [편집자 글]

우리 사회에서 일컫는 장애인에 대한 법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장애인”이란 신체적·정신적 장애로 오랫동안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에서 상당한 제약을 받는 자를 말한다(장애인복지법 제2조). 다시 말해 ‘신체적·정서적 장애 때문에 소위 신체 건강한 사람과 달리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에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비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을 위해 구성한 사회생활 구조에서 장기적인 불편을 겪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러한 불편이나 제약이 일상적인 생활에서만 발생하고 있는 것일까?
 
“국민은 그 말을 한 사람을 정신장애인이라고 말한다”(18.12.28 홍준표 자유한국당 전 대표)
“정치권에는 정상인가 싶을 정도로 정신장애인이 많이 있다”(18.12.28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 
“삐뚤어진 마음과 그릇된 생각을 가진 사람이야 말로 장애인!”(2020.1.15. 박용찬 자유한국당 대표)

국민의 대변인으로서 우리 사회에서 최고의 권력 집단 중 하나인 국회의원들의 발언이다. 때때로 그들은 ‘장애인’을 정쟁의 도구로 활용하기도 한다, 표를 위해 필요할 때만. 하지만 그들의 발언 속에서 장애인은 아무 말이나 막하고 모자라고 불쌍하며, 삐뚤어지고 잘못된 사람이다. 장애인에 대한 기본적 인식은 매우 저급하고 혐오적이기도 하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장애인에 관한 모든 사회적 논의는 장애인 당사자의 주체적 권리가 보장되는 방식으로 고민돼야 한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또 한편,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장애인 학대 기사. 선거철만 다가오면 수년째 같은 양태로 반복되는 장애인 정책공약들, 그리고 수십년째 변하지 않는 장애인시설 보호 위주의 제도들, 그런 모든 것들 안에서 실제 장애인들의 삶에 대한 고민이 너무나 부족하다. 장애인들은 자신들의 욕구가 반영되지 않고 오히려 수용되고 관리되는 현실 사회의 한계를 절절히 느끼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장애인들은 이에 대한 저항도 쉽지 않다. 기본적인 이동권 조차도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이도 저도 못하면 장애인들은 집 안에 갇혀 지낼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실에 비추어 보면, 장애인은 장애를 갖는 그 순간부터 사회로부터 동정의 대상으로 규정된다. 그리고 소위 ‘정상 생활’에 대한 진입장벽은 더욱 견고해진다. 장애인들의 의사결정권은 보호자에게 양도되고, 장애인들의 주체성은 점점 모호해지고 만다. 인간은 그 자체로 존엄하고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세계인권선언은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장애인들은 장애인으로 규정되는 순간 과정 그들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점점 희미해져 가는 과정을 밟게 된다.

그리고 온 사회는 장애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내(우리)가 먹여주고 재워주는데...’, ‘나이를 떠나 부모의 동의 없이는 시설 퇴소는 어렵습니다.’, ‘장애인은 특수학교로 가야지... 왜 여기다녀...’. 그리고 장애인과 동행하는 비장애인을 보며 전후 사정을 따지지도 않고“고생하시네요! 보호자 분이시죠?”라고 살가운(?) 인사를 건넨다. 날짜와 요일이 안 맞고 진술을 자세히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법조인들은 당연하듯이 이야기한다. “진술을 확신할 수가 없네요!” 장애인은 성에 대한 이해와 결정능력, 그리고 그것에 대한 책임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편견에 가득 찬 시선은 강제적인 자궁적출을 정당화했다. 한편, 오랜 기간 시설에서 생활하는 장애인들은 억압감을 느끼면서도 시설 종사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한다. 어떻게든 그 안에서 살아남으려는 삶의 분투가, 선택지가 없는 삶이 결과적으로 장애인 당사자를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사회적 존재로 만드는 것은 아닐까? 

이렇듯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은 단지 일상적인 생활인이 아닌 부적합한 존재, 비사회적인 존재이며, 누군가에게 의존해야만 하는 부속적인 존재이다. 장애인은 그런 존재로 차별당하고 강요당한다. 결국 장애인은 이 사회에서 사회 혹은 가족이 책임져야 동정과 배려의 대상이 된다. 장애인의 삶의 문제는 사회 또는 가족이 책임져야 할 문제일 뿐이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그리고 너무도 당연하게 그러한 생각 틀에 갇혀 버린 것은 아닐까? 

권오상 제주장애인권익옹호기관장
권오상 제주장애인권익옹호기관장

얼마전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자폐성장애를 가진 청소년과 엄마가 함께 죽음을 맞이한 비극적 기사가 보도 되었을 때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어려운 사회 환경 속에 자폐성 장애를 가진 자녀를 돌보던 그 어머니의 힘겨운 삶에 공감한다. 그리고 장애인에게는 당연히 보호자의 보호가 의심의 여지없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부모의 결정으로 예기치 못하게 죽음을 맞이한 장애인 당사자의 사연은 누가 공감해주고 있을까? 장애인 자녀를 가진 부모의 어려움, 즉 비장애인의 어려움을 개선하려는 관성이 현재의 정책과 사회적 시각이 아닐까? 바로 장애인, 바로 그 당사자를 중심에 둔 당사자 권리의 문제로 정책과 사회적 시각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장애인에 관한 모든 사회적 논의에 있어서 장애인 당사자의 주체적 권리가 보장되는 방식을 새롭게 고민해야 한다.

인권은 상호적이고 연관적인 속성이 있음에 대해 인식하고 소수자의 인권이 동정이 아닌 존엄으로 존재할 때 우리사회는 모두가 잘 어울려 사는, 사람 사는 세상이 될 것이다. / 권오상 제주장애인권익옹호기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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