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공항서 아버지 유해 찾은 양춘자씨 사연 담은 편지에 추념식장 곳곳 눈물
"'증조 외할아버지'라는 말은 어렵고, 왠지 낯설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할아버지를 '똑똑이 할아버지'로 부르기로 했습니다. 똑똑이 할아버지의 외동딸인 할머니는 늘 '우리 아버지는 신촌국민학교 선생님이었는데, 동네에서도 알아주는 똑똑이었대'라고 말씀하셨거든요. 할아버지 얘기만 하면 눈물부터 보이는 우리 할머니가 유일하게 활짝 웃으며 하는 얘기셨어요."
3일 오전 10시 제주4.3평화공원에서 봉행된 제72주기 제주4.3희생자추념식에서는 김대호(15.아라중) 군의 편지로 많은 참석자들이 눈시울을 적셨다.
김군은 72년전 아버지를 잃은 양춘자(75)씨의 손자다. 양씨의 아버지는 1949년 봄 제주시 조천읍 신촌국민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토벌대에 의해 연행됐고 불법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아 그 해 10월 현 제주국제공항인 정뜨르비행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양씨는 오랜기간 아버지의 시신을 찾지 못하다가, 작년 진행된 공항 유해발굴을 통해 아버지의 유해를 찾았다. 김 군의 편지에는 지난 1월 발굴유해 신원확인 보고회를 향하는 할머니의 애틋한 마음이 그대로 담겨있다.
"똑똑이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기 전날 밤, 할머니는 아버지를 만난다는 생각에 밤잠도 설쳤어요. 그렇게 긴장한 할머니 모습은 저도 처음 봤어요. 72년 만에 만난 똑똑이 할아버지 유골함 앞에서 할머니는 세 살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처럼 한참을 엉엉 우셨어요"
김군은 마지막으로 '똑똑이 할아버지'와의 약속을 언급했다. 4.3을 널리 알리는 교사가 되겠다는 다짐이었다.
"제 꿈이 선생님이라고 하니 할머니가 똑똑이 할아버지 얘길 하면서 좋아했었는데, 이담에 제가 커서 똑똑이 할아버지처럼 훌륭한 선생님이 되면 제자들에게 4.3에 대해 얘기해주고 싶어요. 끔찍하고 아픈 역사지만 모두 제주 4.3을 깊이 알고 공감해서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그리고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얘기해줄 거예요 제 꿈을 이루는 모습 하늘에서 지켜봐 주실거죠?"
덤덤하게 편지를 읽어내려가는 손자의 모습을 보며 양씨는 연신 눈가를 훔쳤다. 이날 추념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은 편지 낭독을 마치고 단상에서 내려온 김군을 안고 다독이기도 했다.
[편지 전문]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흐릿한 흑백 사진으로만 봐왔던 할아버지께 편지를 쓰려고 하니 ‘할아버지를 어떻게 불러야 하지?’ 하는 고민이 먼저 들었어요.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증조 외할아버지라고 하던데 저에게 ‘증조 외할아버지’라는 말은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할아버지를 ‘똑똑이 할아버지’로 부르기로 했습니다. 똑똑이 할아버지의 외동딸인 할머니께선 늘 “우리 아버지는 동네에서 알아주는 할아버지 얘기만 하면 눈물부터 보이셨던 우리 할머니가 똑똑이 할아버지 자랑을 하실 때면 활짝 웃으시는 모습에 저도 할아버지가 너무 궁금하고 보고 싶었습니다. 저와 할머니 마음을 아셨는지 얼마 전 할아버지께서 돌아오셨습니다 할머니 평생 소원이 할아버지를 만나는 거라고 하셨는데 할아버지께서는 할아버지를 찾기 전 4.3희생자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그리고 얼마 후 아버지를 찾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다음 날 저희 가족은 할아버지를 만나러 갔습니다. 72년만에 만난 똑똑이 할아버지 유골함 앞에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할머니 나이는 3살 신촌초등학교 교직원 단체사진에서 찾은 할아버지의 모습이 어려서부터 아버지라고 부르는 게 소원이었다는 할머니 똑똑이 할아버지 어렸을 때부터 4월이면 할머니와 부모님을 따라 평화공원에 가긴 했는데 아버지께서 들려주신 4.3 이야기를 듣고도 아무런 죄도, 아무런 이유도 없이 할아버지는 또, 얼마나 억울했었을까 똑똑이 할아버지, 끔찍하고 아픈 역사지만 모두 제주4.3을 깊이 알고 공감해서 제 꿈을 이루는 모습 하늘에서 지켜봐 주실 거죠? 똑똑이 할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를 찾아주신 모든 분들에게 똑똑이 할아버지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2020년 4월 3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