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161. 최영화, ‘감염된 독서’, 글항아리, 2018.

출처=알라딘.
최영화, ‘감염된 독서’, 글항아리, 2018. 출처=알라딘.

저는 다른 이야기보다 질병을 다루는 소설들을 찾아 읽은 적이 많습니다. 문학 연구 가운데서도 특히 ‘문학과 의학’(literature and medicine)이라는 분야에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문학은 인간 곤경의 기록이다’라는 가오싱젠의 말”(5쪽)처럼 삶의 여러 고통을 이야기하는 소설이 질병을 예외로 두지 않기도 해서입니다. 인간의 삶이 생노병사(生老病死)로 이루어지는 만큼 질병은 이야기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어서죠. 그런데 질병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직접 몸이 아프거나 병에 걸릴 때만큼은 아닐지라도 읽는 것 또한 꽤 힘든 게 사실입니다.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매번 듣는 것도 고역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질병의 문학주제학(literary thematics)을 오랫동안 깊고 넓게 연구한, 어느 연세가 지긋한 명예교수님은 이제는 사랑과 행복과 같은 문학적 주제를 연구하고 싶다고 고백하신 적도 있었지요. 하나둘씩 세상을 뜨는 당신의 지인과 친구들의 소식을 듣거나 병과 약 이야기가 주 화제가 되는 노년의 삶에서 문학과 연구에서만큼은 다른 주제에 귀 기울이고 싶으셨던 게죠. 

그런데 ‘질병은 어떻게 이야기가 되는가’라는 부제를 단 <감염된 독서>의 저자 최영화 교수의 책을 읽다보면, 질병과 죽음을 늘 가까이 해야 하는 의사와 의료인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감염내과 의사인 저자는 이 책에서 병을 다룬 문학과 책에 관한 독후감을 주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문학과 의학’에 관련된 책인지라 관심에 두고 먼저 한국 소설에 관한 대목부터 읽었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터지기 전에 비행기에서 조금씩 읽었다가 다시금 책을 펼쳐 끝까지 읽어보았습니다. 

질병과 고통을 다루는 의사가 쓴 서평집인지라, 당연히 이 책의 많은 독후감과 글에는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게다가 때때로 저자는 죽음을 맞이한 동료 의사의 편지를 다시 꺼내어 읽거나, 죽음을 상대로 의인화하여 한 편의 글을 부치기도 합니다.

사실, 질병과 죽음이란 주제는 무겁고 어둡습니다. 하지만 이 책의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무겁거나 어둡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밝고 경쾌합니다. 저자의 빼어난 위트와 유머 덕분입니다. 그것은 문학도를 꿈꾸었던 만큼 넓은 독서와 문장력에서 나온 것이겠지요. 글쓰기가 주업인 웬만한 작가들보다 뛰어나다는 게 읽고 따지기로 일을 삼는 제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 재치는 기교가 아니라 넉넉한 마음씨 덕분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타고난 능청에 가깝고 때로는 지적인 촌철살인에 가깝습니다. 또 그것은 겸손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고는 감염내과 의사라고 뭐 달리 걱정할 건 없노라 여기고 10여 년을 지냈는데 제가 굴린 잔머리가 얼마나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것이었던지, 2002년 사스가 오고 2005년 조류인플루엔자가 뜨는 바람에 신종 감염병의 첨병으로 백신도 없을뿐더러 약은 있을락 말락 한 상황을 남보다 먼저 맞아야 하는 처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약 없는 사스에 지정의사가 되라는 문서를 받았을 때는 불현듯 과거 그 완벽해 보였던 검토에서 실은 신종 감염병이 빠져 있었음을 깨달았고, 제가 수천 쪽의 책장을 넘겼어도 결국은 부처님 손바닥 위였음을 한탄할 수밖에 없었지요. 운명은 늘 생각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81쪽)

웃음의 원리 가운데 하나는 격하(格下)인데, 타인을 향한 비판과 공격이 가해질 때 그것은 풍자가 되겠지요. 하지만 이렇게 자신을 낮추는 웃음의 자세에는 넉넉한 여유와 겸손의 미덕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스와 메르스 유행 때 감염내과 의사로서 헌신했던 공로를 두루 인정받은 의사라지만 저자는 언제나 의사로서, 교수로서 자기 자신을 낮추어보곤 합니다. 제가 보기에 그것은 오히려 전문인으로서의 성찰적 직업 윤리이자 자긍심으로 보입니다. 의사와 의대 교수로서 일상적 삶의 소박한 세부들을 소소하고 수다스럽게 늘어놓을 때도 그 안에는 따뜻한 시선이 담겨 있었습니다. 

대체 감염병 의사의 삶이란 어떨까요? 의사였던 서머싯 몸의 <인생의 베일>이란 소설을 원작으로 삼아 만든 영화 <페인티드 베일>에 등장하는 감염병 의사(infectious disease specialist) 주인공의 일상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우물을 살피고 강물도 따라가보고(현장 방문과 역학조사), 물을 떠다가 현미경으로도 보고(실험), 환자도 보고(진료), 조수도 가르치고(교육), 밤늦게 책도 읽고(연구), 부인과의 사이는 안 좋고, 잠은 엎드려 자고, 감염 의사로서 완벽합니다. 제 친구들이 다 그러거든요. (122쪽)

이 책의 2부 ‘책으로 떠나는 감염병 오디세이’는 저자의 전공을 잘 살려서 ‘감염병’을 다룬 문학 작품과 책들을 주로 다루었습니다. <삼국지>와 <데카메론>과 같은 고전도 있고, <허삼관 매혈기> 같은 현대소설, <전라도 길ㅡ소록도 가는 길>(한하운 시집과 대조해본 결과, 인용 출처가 없는 이 시의 전문 내용은 아주 사소하지만 원작과 다릅니다.)과 같은 한국 시, <굿모닝 버마>와 <푸른 알약> 같은 만화책(그래픽 노블)까지 다양합니다. 

<데카메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는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까지 이야기하게 되는데, 페스트가 돌면 어떨 지 저자는 상상해 봅니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이미 그런 상황에 살고 있는 것 아닐까요?”(100쪽)라고 되묻습니다. 시간이 빨리 돌려보면 우리 모두 그 상황 속에 산다고, 죽음은 누구에게나 필연이라고 말합니다. 코로나19의 팬데믹 상황에서는 더욱 음미할 만한 문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헤밍웨이의 짧은 작품인 <인디언 캠프>의 한 장면을 읽을 때는 의대 교수로서 저자의 눈이 예리하게 빛납니다. 인디언 여자가 이틀 동안 산고를 겪지만 아기를 낳지 못해 백인 의사를 부릅니다. 의사는 온갖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인디언 여자의 출산에 성공합니다. 유능한 의사, 경험 많은 의사가 곤경 속에서 어떻게 성공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함일까요? 하지만 저자는 이 소설에 나오는 의사를 곱게 보지 않습니다.

“의사는 아들을 데리고 가서 등산용 칼로 제왕절개를 하고 낚싯줄로 봉합까지 해서 경기 끝나고 탈의실에 온 축구 선수처럼 뿌듯함에 수다스러워졌지만 사실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산모에게 한마디 말도 건네지 않았고, 아이는 꺼냈지만 침상 위 남편이 그사이 목에 칼을 긋고 자살할 정도였는데 한 것이 없으며 본 것도 없습니다. 집에서 키우는 짐승이 새끼를 낳을 때도 이렇게 하지는 않습니다.” (241~242쪽) 

실습 학생들에게 ‘환자를 본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일러주는 대목입니다. “인간이라는 주체 즉 고뇌하고 고통받고 병과 맞서 싸우는 주체를 중심에 놓기 위해서는 병력을 한 단계 더 파고들어 하나의 서사,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 필요가 있다.”(246쪽) 저자는 역시 신경과 의사였던 저명한 작가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인용합니다.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의 산문을 읽으면서, 그가 폐렴 환자로 입원했을 당시 의사와 학생들에게 일본의 ‘표본’이 되었을 당시 경험을 쓴 글을 들추어낸 대목도 동일합니다. “한마디 말, 한 번의 눈길”(251쪽)을 환자에게 건넬 것. 그것이, 의사와 학생들이 환자를 인간으로 대하며 소통하는 방법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지금의 급박한 바이러스 위기 속에서도 감염내과 의사인 저자가 부디 건강과 여유를 잃지 않기를, 그리하여 환자들과 따뜻한 한마디 말과 한 번의 눈길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 노대원 교수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신문방송학 전공, 동대학원 국문학 박사과정 졸업
대산대학문학상(평론 부문) 수상 
201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
제주대학교 국어교육과 조교수 재임.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