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제38회 대한민국연극제 제주예선대회 겸 제25회 제주연극제

대한민국연극제 제주 대표 극단을 선발하는 ‘제38회 대한민국연극제 제주예선대회 겸 제25회 제주연극제’(이하 제주연극제)가 17~18일 이틀 동안 무사히 치러졌다. ‘무사히’라는 표현이 다소 어색할 만큼 올해 제주연극제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라는 초유의 사태 속에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최초 계획했던 3월 일정이 한 달 뒤로 미뤄졌고, 주최·주관 단체인 제주연극협회는 발열 확인·마스크 필수 착용이란 조건으로 일반 관객 입장을 허용했다. 그러나 사회적 거리두기를 고려한 도청과의 이견으로 행사 당일, 연극협회 등 일부 관계자만 관람을 허용하는 비공개로 기준이 전격 바뀌었다.

관객이 없는 한적한 공연장은 코로나19로 움츠러든 공연 예술계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민간·공공 공연장 모두 두 달 넘게 개점휴업 상태지만, 현장에서 만난 몇몇 연극인들은 머지않은 시기에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고자 맹연습 중이라는 포부를 전하기도 했다. 연극을 사랑하는 관객들이 거리낌 없이 극장을 찾을 수 있을 만큼 코로나19 상황이 개선되길 바라는 마음은, 기자를 포함 이틀 간 한라아트홀 대극장을 찾은 모든 이들의 한 마음일 것이다.

올해 제주연극제는 극단 가람의 <울어라! 바다야>, 극단 파노가리의 <발자국> 두 작품이 경쟁했다. 결과부터 말하면 가람이 최우수상을 받으면서 제주 대표로 대한민국연극제에 참여한다. <후궁 박빈>을 공연한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최우수상이다. 우수상은 자연스레 파노가리에게 돌아갔다. 최우수연기상은 <울어라! 바다야>에서 해녀를 연기한 김금희 배우, 연출상은 가람의 이상용 대표가 받았다.

모처럼 만나는 연극 무대는 무척 반가웠다. 다만, 평소보다 불리한 여건이라는 조건으로 변명할 수 없는 완성도와 낮아진 생기(生氣)는 제주연극제가 해소해야 할 과제로 남았다.

# 극단 가람 <울어라! 바다야>

가람의 출품작은 지난해 말 초연했던 창작 악극 <가슴 아프게>를 연극으로 각색한 <울어라! 바다야>다. 섬의 비극, 제주4.3으로 부모와 생이별한 순이. 결국 두 동생을 부양하기 위해 해녀의 길을 선택하고 자상한 남편과도 가정을 꾸리며 작은 행복을 누린다. 하지만 한국전쟁에 참전한 남편은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채 돌아왔고, 이를 보는 시어머니마저 돌변하면서 순이는 생계를 위해 대마도행을 결심한다. 15년 넘는 고된 타지 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가족들은 서로의 이익을 우선시하며 순이를 대한다. 마음 둘 곳 없는 순이는 어쩔 수 없이 다시 대마도로 떠나 고독한 최후를 맞는다.

<울어라! 바다야>는 제주해녀를 위한 헌정 작품이란 원작의 모습을 사실상 그대로 따라간다. 등장인물의 마음을 대변했던 구성진 노래는 빠졌지만, 큰 변동 없는 출연진과 줄거리 덕분에 원작에서 느꼈던 비애를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넓게 보면 <울어라! 바다야>는 원작과 동일한 작품이라고 여겨질 만큼 무대를 잘 재현했지만, 여러 부분에서 변화를 확인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극 초반, 4.3에 대한 군·경과 무장대의 학살을 동일하게 묘사했던 연출은 이번에 무장대 부분을 아예 드러냈다. 쓰러진 순이 어머니를 군인 두 명이 끌고 가는 직접적인 묘사를 새로 더했는데, 4.3 학살의 주된 책임이 공권력에 있다는 보편적인 인식에 눈높이를 맞춘 시도라 해석된다. 

ⓒ제주의소리
극단 가람의 '울어라! 바다야'의 무대 인사 장면. ⓒ제주의소리

여기에 순이 남편이 ‘4.3 당시 희생된 파출소장 아들’이라는 설정은 ‘방앗간 주인 아들’로 바뀌었다. “빨갱이에게 죽임 당해”, “빨갱이라면 치가 떨린다”는 식의 남편 가족의 대사 역시 빠지면서 역사 인식에 대한 오해나 비판을 받지 않도록 상당한 수정이 이뤄졌다. 

하지만 순이 남편이 참전을 결심하는 과정이 통째로 빠지면서, 딸을 잉태한 순이에서 갑자기 전쟁터로 건너 뛰는 갑작스런 전개를 보였다. 일부 바뀐 작품 줄거리에 맞게 수정이 아닌 아예 삭제하는 선택은, 원작을 알고 있는 관객이나 그렇지 않은 관객 모두에게 낯설게 다가왔다고 본다. 

어색한 변화 시도는 이 뿐만이 아니다. 순이의 아들 철민 역은 김으로 배우가 연기했는데, 철민이라는 인물을 온전히 보여줬다고 보기에는 아쉬움이 컸다. 극 중 철민은 세상에 나왔지만 부모의 사랑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자란 인물이다. 아버지는 일찌감치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어린 자녀를 두고 대마도로 물질하러 떠났다. 비록 바다 건너 어머니가 꼬박꼬박 생활비를 보내주지만 부모 없이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에, 다시 만난 어머니 순이를 보며 분노하는 건 새삼 놀라지 않다. 이런 배경을 감안할 때 어머니와 조우한 철민의 감정은 단순한 분노가 아닌 애증에 가깝다고 봐야할 것이다. 

<가슴 아프게>에서는 이승준 배우의 연기와 노래가 더해지면서 이런 복잡한 철민의 내적 고뇌가 어느 정도 관객에게 전달됐지만 <울어라! 바다야>에서는 감정 묘사가 단순하게 느껴졌다. 본래 철민 역을 연기했던 이승준은 남편 철수로 옮겼고, 남편 철수를 연기했던 박세익은 비교적 비중이 떨어지는 군인2로 옮겼다. 일면 파격적인 연출자의 선택이 옳았다는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본선 무대를 앞두고 김으로의 노력이 꼭 필요해 보인다. 가람에서 주로 단역을 맡아온 김으로에게 <울어라! 바다야>는 한 단계 발전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원작에서도 어느 정도 느꼈지만 <울어라! 바다야>는 극 후반 들어 오열·호소하는 감정 일변도가 더욱 강해졌다. 타지에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나는 순이 소식에 딸 수민이 장면 건너 재차 감정을 쏟아내니 나중에는 그 효과가 반감 되서 다가왔다. 폭발하는 감정과 고요한 여운이 조화를 이루는 연출이 관객 마음에 더 오래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실감한다. 제주해녀의 정서, 문화를 보여주는 정보 제공을 감안하더라도, 악극이 아닌 연극으로서 2시간에 가까운 분량은 고민해볼 점이다. 아무리 상대가 학도병이라지만 적의 기습을 걱정하는 한 밤 전장에서 노래를 가르쳐주는 설정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남자 삼촌 역할을 맡은 이광후 배우의 모자, 신발은 고증에 있어 개선 사항이다.

순이가 처음부터 끝까지 의지하는 삼촌2 역에는 원작 윤정주 배우 대신 김금희 배우가 투입됐다. 김금희는 걸쭉한 사투리와 친근한 감성은 이전만큼 살려내면서 절제된 연기력을 추가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번 제주연극제에서 가람은 검증된 작품을 선택했다. 안전한 선택이었고 어느 정도 기대한 효과를 달성했다. 그러나 악극에서 연극으로 바꿨을 뿐 알맞게 최적화됐다는 인상은 주지 못했다. 본선까지 남은 기간 동안 해결해야 할 숙제라고 보여 진다. 

# 극단 파노가리 <발자국>

파노가리는 새 창작극 <발자국>을 들고 다시 제주연극제 무대에 섰다.

<발자국>은 아내를 찾기 위해 노숙자 마냥 떠도는 한 제주 중년 남성 문 씨의 기구한 삶을 그린다. 현금 다발과 사시미 칼, 그리고 산에서 우연히 주운 실탄 장전 권총까지 배낭에 챙긴 문 씨. 그는 집을 떠난 아내를 찾기 위해 제주에서 육지로 올라왔다. 이리저리 떠돌다가 노숙자 두 명에게 일명 ‘퍽치기’를 당하고 정신을 잃는다. 그는 이승과 저승 사이 언저리에서 자신을 ‘문 씨의 발자국’이라고 소개하는 한 남성과 만나면서 본인의 지난 행적을 되돌아본다. 화재 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나 혼백이 된 아내의 도움 덕분에 노숙자들의 범죄 사실도 밝혀내고, 눈물 어린 화해도 이룬다.

이 작품은 ‘발자국은 본인 삶의 흔적’이라는 철학적 인식을 밑바탕 삼아, 범죄의 발자국을 쫓아가는 서스펜스 장르를 표방한다. 공연 시작과 함께 문 씨와 발자국의 대화를 통해 과거를 돌아보는 설정은 호기심을 자극하고, 불에 타죽은 문 씨 부인이 사실상 남편의 복수를 대신 해주는 과정도 제법 긴장감을 자아낸다.

ⓒ제주의소리
극단 파노가리의 '발자국' 무대 인사 장면. ⓒ제주의소리

그러나 팽팽하던 줄이 한 순간에 툭 끊어져버리듯, 작품은 앞선 흐름과 너무나 상반된 결말로 치닫는다. 발자국의 정체가 생과 사를 결정하는 ‘생사감별사’이면서 동시에 문 씨 부인의 동생이라는 상상도 못한 정체 공개와 함께, 문 씨 부부간의 훈훈한 분위기는 서스펜스 범죄물을 순식간에 가족 드라마로 바꿔버린다.

지켜보는 관객 입장에서는 이 작품이 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연출자의 변에서 내비친 발자국에 대한 철학적·극적인 고찰은 허무한 용두사미로 끝난 건지 여러 생각에 허탈감까지 안겨준다. 굳이 애써 따뜻한 가족물로 끝내기 보다는 관객의 호기심을 이끌어낸 어두운 분위기를 이어가며 비참한 최후 속에 고독한 참회를 남기는 여운으로 매듭짓는다면 어떨까 생각이 들만큼, <발자국>은 관객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고 그것은 연극의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즐거운 혼란과 거리가 멀었다. 시도 때도 없는 인물들의 웃음소리는 진부한 클리셰로 다가왔다. 문재용, 오상준, 맹선아, 문재승, 현승림 등 젊은 출연진들의 의욕적인 연기는 인상에 남는다. 

돌이켜보면 파노가리는 지난해 제주연극제에서 창작 공포극 <하얀 초상화>를 들고 왔다. 제주 연극계에서 흔치 않는 장르적 도전은 높이 평가할 만 하나, 창작자 입장에 매몰되는 시야가 아닌 관객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하며 무대를 만들어간다면 머지않아 의미 있는 작품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올해 제주연극제 출품작 수는 지난해 3편보다 한 편 더 줄어들었다. 2편이란 숫자 자체를 놓고 보면 경쟁이란 의미에 힘이 빠지지만, 제주연극제 출품작이 3편을 넘는 경우는 근래 수년 동안 찾기 드문 게 현실이다. 가람을 중심으로 이어도, 세이레가 참여하는 경우가 가장 많았고, 파노가리는 지난해부터 동참하고 있다. 

지난해 통틀어 딱 한 편 막을 올린 정낭과 내부 정비 중인 세이레를 감안하면 제주연극제의 역동성을 위해 대안이 필요해 보인다. 이것은 비단 제주연극제만이 아닌 제주연극협회의 역동성이라고 불러도 그리 무리하진 않겠다. 다행인 것은 지난해 12월 퍼포먼스단 몸짓, 올해 4월 예술공간 오이가 신입 회원 단체로 등록했다. 

전국대회에 나설 지역 대표 극단과 작품을 뽑는 본래 취지만 놓고 보면, 제주연극제는 제주 연극인과 연극 애호가들의 축제이자 제주 연극의 현 주소를 가늠하는 시험대나 다름없다. 미증유의 코로나19 사태를 극복하고 난 뒤, 더욱 생동감 넘치는 즐거운 축제로서의 제주연극제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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