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긋나고 뒤틀린 사랑에 당할 수밖에 없던
어긋나고 뒤틀린 사랑에 당할 수밖에 없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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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詩 한 편] (46) 파도 / 허유미
부풀어 터질듯한 바다. ⓒ김연미
부풀어 터질듯한 바다. ⓒ김연미

철썩
뺨에 파도가 쳤다 생각하기로 했다

다시 한번 뺨을 향해 달려오던 파도는
옆으로 꼬꾸라졌다

고름이 부풀어 터질 듯한 바다
게들처럼 줄지어 선 배들은
며칠째 포구에 묶여 정박 중이고

기름때 덕지덕지 묻은 아버지 등 너머
바람에 요란스럽게 부딪치는 술병들도
며칠째 마루에 정박 중이다

바다도 아빠도 나도
모두 아픈 밤이었다

- 허유미 <파도> 전문-

삶의 목적이 행복에 있다면 그 행복을 충족시켜 주는데 가장 필요한 조건은 가족이 아닐까. 파도가 몰아치는 날 고래 뱃속 같은 골목을 돌아다니면서도 서로에게 등대가 되어 주었던 자매[자매], 늦게까지 일을 하고 돌아온 오빠의 잠을 위해 숨죽여 먹는 아침밥, 학교에 가서 가방을 열어보면 안에 있던 귤 두 개, 오빠와 동생이 서로에게 보내는 응원이다. [응원이다] 

세상은 늘 위험하고 그 험한 세상으로부터 울타리가 되어주는 가족이라는 이름, 그러나 그 이름조차 때로는 상처가 되기도 했던 현실. 어긋나고 뒤틀린 사랑 앞에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었던 어느 유년. 그 상처 입은 유년을 바라보는 우리 가슴이 따뜻한 눈물로 차오를 수 있는 것은 뒤틀린 사랑 속에 숨어 있는 본질을 올곧게 바라보는 순수한 영혼의 아름다운 시선 때문일 터. 

어린이날이 있고, 어버이날이 있고, 스승의 날이 있는 오월. 이름표가 붙여진 대로 이벤트를 생각하다가, 이름표에 걸맞는 이벤트 비용을 계산하다가, 가족이란 이름 앞에서도 메마르고 팍팍하기만 한 가슴에 촉촉이 젖어드는 시편을 읽으며 가만히 머물러 보는 시간이다.

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 산문집 <비오는 날의 오후>를 펴냈다.

젊은시조문학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현재 오랫동안 하던 일을 그만두고 ‘글만 쓰면서 먹고 살수는 없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제주의소리>에서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연재를 통해 초보 농부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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