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詩 한 편] (47) 바다에서/김경훈

애월바다. ⓒ김연미
애월바다. ⓒ김연미

저 힘차게 파닥이는 생명을 보아라
덧붙이거나 빼거나 늘 그대로 있으면서
조용히 혁명을 예감하는
깊고 넓은 저 아름다운 사랑을 보아라
온갖 목숨 꾸밈없이 키우며
버려진 대로 갈라지지 않고
건강하게 한 혈맥으로 흐르는
저 밑바닥 백성의 마음들을 보아라
마른 이에게 가슴 열어 나누고
믿는바 노여워 살을 일으키고도 곧
평정을 되찾아 비밀하나 없이
어두울수록 빛나는 양심
저 우주적 진리를 보아라
멀리 혹은 가까이서 가
닿지 못하여 앓는 사람아

-김경훈, <바다에서> 전문-

중산간 마을에서 태어나 처음 바다를 인식했던 일곱 살 정도였던가... 그 때의 바다는 나를 쉬지 않고 밀어내고 있었다. 그 밀어냄의 존재를 파도라고 부른다는 걸 알게 된 건 한참 후의 일이었던 것 같고, 영문도 모르고 거리감을 느꼈던 바다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쉽게 친해지지 않았다.   

스무 살도 지난 어느 날, 용두암을 돌아 서쪽 해변에서 만났던 바다가 바람을 타고 넘어오고 있었다. 있는 대로 패악질 부리던 바다 앞에서 옆에 있던 동기가 시를 읊었다. ‘저 힘차게 파닥이는 생명을 보아라’... 얼어죽겠는데 생명은 무슨? 하고 몸을 움츠렸지만, 그 시를 읊던 동기의 표정을 보며 저 속에 담긴 의미가 뭘까... 생각을 했었다.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지만, 장면 하나, 냄새 하나, 혹은 문장 한 구절이거나,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평생을 관여할 때가 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나에게 바다는 ‘파닥이는 생명’이었다. 생각도 여물지 못하고, 살아온 것도 깊지 않은 나로서는 저 흔하디 흔한 바다에서 파닥이는 생명을 읽어낸다는 게 어떤 것인지 몰랐다. 그럼에도 그 싯구절 하나가 내 기억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을 이런 이유로 밖에 설명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본성은 저 깊숙이 숨겨 놓고, 겉으로 태연한 척, 명랑한 척, 제 몸의 한 끝자락을 풀어 파도의 손짓을 보내곤 하던 바다. 그 파도 뒤에 숨어 있는 바다의 진짜 얼굴이 무엇인지, 언뜻언뜻 알 것도 같다가, 도로 아무 것도 아닌 풍경에 머물러버리곤 하던 바다. 

30여 년 전에 나온 낡은 시집을 꺼내 다시 읽는다.

모든 의심을 자진 헌납하고 따를 수밖에 없었을 명령어 한 문장. “저 힘차게 파닥이는 생명을 보아라.” ‘조용한 혁명’을 ‘예감’하며 ‘덧붙이거나 빼거나 늘 그대로 있으면서’ 젊음의 혈기를 불태웠던 시인. 그 시인이 살아온 평생의 힘이 여기에 있었음을 깨닫는다. 

평생을 그렇게 불태웠으면서도 여전히 그 혈기 그대로인 시인에게 바다는 ‘아름다운 사랑’으로 손을 내밀고 있을까.

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 산문집 <비오는 날의 오후>를 펴냈다.

젊은시조문학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현재 오랫동안 하던 일을 그만두고 ‘글만 쓰면서 먹고 살수는 없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제주의소리>에서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연재를 통해 초보 농부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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