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시선] 모든 구성원 떳떳하게 살아가는 기본 토대 필요하다 / 김효철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마라’

1980년대 민주화운동 현장이나 노동운동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귀에 익었을 노랫말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노동자는 일하는 사람들이며 신성한 노동에서 행복과 삶을 누리고 있다고 믿어왔다. 노동을 신성시해오던 사상은 고대 중국 문헌이나 성경에도 찾을 수 있고 마르크스도 노동은 인간을 이루는 본질이라고 했다. 노동이 곧 생산이며 생존을 결정하던 시대에 일하지 않는 자는 사회구성원으로부터 지탄을 피하기 어렵다. 

하지만 어느덧 노동이 주는 행복과 신성함은 어디 가고 노동자에게는 노동할 의무만 남아있다.

ARBEIT MACHT FREI,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독일 나치가 만든 아우슈비츠 수용소 정문에는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하리라’는 문구가 커다랗게 붙어있다. 수용자들을 강제노동에 동원하며 쓴 말이다. 나치 파시즘은 갔지만, 이제는 자본이 자유란 이름 아래 노동과 노동자를 억압하는 시대다.

일해야 한다는 사람 구실 하는 거라는 강박 아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나라 가운데 두 번째로 많은 노동시간을 자랑해야 하고 그러면서도 해마다 2000명이 산재로 죽는 노동 지옥을 겪고 있다. 

사회복지 정책도 이러한 노동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젊고 건강한 사람들이 가난한 것은 나태함과 게으른 탓이며 주변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아왔다.

최초 공공부조 정책인 조선구호령(1944)과 이를 이어받은 생활보호법(1961)도 수혜대상은 어린이거나 노약자, 아픈 사람, 임산부였다. 노동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한정적으로 국가가 생활을 돕는 제도였다.

이에 대한 첫 전환은 2000년 시행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다.

외환위기 과정에서 쏟아져 나온 실업자나 실직자들을 위한 사회복지 제도로 만들어진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은 나이가 젊고 노동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국민으로서 누려야 하는 기본 행복을 보장토록 했다. 이로써 노동능력이 있는 사람들도 처음으로 사회보장을 받게 됐으나 이 역시 자활사업 참여를 통해 노동을 해야 한다는 조건이 달려 있다. 

올해 전 세계를 휩쓰는 코로나19는 처음 겪는 수많은 일 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여러 사회변화 가운데 하나는 처음으로 모든 국민이 국가로부터 노동이란 조건 없이 돈을 받는 새로운 경험이다.

선거 때면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 입에서 나오긴 했으나 아직은 먼 다른 나라 얘기처럼 들리던 기본소득을 현실로 끌어올린 것은 코로나19 위기 속에 맞은 총선이라는 정치 지형이다.

경제위기 속에 선거를 앞두고 정부나 지방자치단체는 경기부양과 복지 정책으로 지원금 지급을 꺼냈다. 여기에다 미래통합당 황교안 전 대표마저 전 국민 50만원 지급 공약을 내세우면서 대세가 된 것이다.

모든 국민 대상 조건 없는 지원금 지급이라는 정책이 갖는 중요성에 비해 논의와 합의는 부족했다. 재난기본소득과 재난지원금, 재난긴급생활지원금, 재난긴급생활비로 불리며 이름도 개념도 혼돈스럽다. 여기에다 기본소득이냐 지원금이냐를 놓고 정명(正名)논쟁까지 이어졌다. 경기도가 지급한 재난기본소득이 모든 경기도민에게 소득과 노동 여부 조건을 묻지 않고 지급했다는 점은 기본소득을 갖추고 있으나 일회성이고 금액도 10만 원임을 볼 때 상시지급이냐 충분한 금액이냐를 따질 때 재난소득 구성요소를 갖추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기본소득이니 재난지원금이니 논쟁을 넘어 이번 정부나 지자체 지원금은 국민에게 대가 없이 현금성 지원을 했다는 점에서 코로나19 뒤에 오는 우리 사회 문제해결에 많은 시사점과 과제를 남기고 있다. 

그동안 선별복지와 보편복지를 둘러싼 쟁점 중 하나인 행정 효율면에서는 모든 국민에게 조건 없이 지급하는 정부 재난긴급지원금이 이점을 보였다. 제주형 재난긴급생활지원금을 비롯해 대상자를 선별해 지급하는 지원금은 선별과정에 들어가는 행정력과 선별기준에 따라 발생하는 사각지대 문제가 곳곳에서 드러났다. 지원금 지급기준에 대한 불만에서 보듯이 기초생활수급자나 최저임금수준에도 공공분야 노동자란 이유로 지원대상에서 제외되는 일이 있으며 지자체마다 서로 다른 지급기준도 논란을 불렀다. 부정 수령이나 기준 초과자를 걸러내 환수하는 사후 조사 계획이 준비과정에 있었으나 행정력 부담을 이유로 철회한 것도 선별지급이라는 제도가 갖는 한계와 어려움을 보여준다.

재난지원금은 코로나19 뒤에 오는 우리 사회 문제해결에 많은 시사점과 과제를 남기고 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재난지원금은 코로나19 뒤에 오는 우리 사회 문제해결에 많은 시사점과 과제를 남기고 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이에 비해 정부 지원금은 일부 제도설계 문제가 나타났지만, 신청과 동시에 전국적으로 지급과 사용이 가능하고 사각지대가 없다는 점에서 큰 강점을 보였다.

처음으로 받아보는 정부 지원금에 심리안정과 소비촉진이라는 긍정 신호도 나타난다.

대기업 지원을 통한 경제 활성화 정책이 아니라 실질 소비자인 국민에게 현금을 지원함으로써 자영업을 중심으로 경기 회복이라는 긍정 효과가 뚜렷하다.

그럼에도 처음 경험하는 정부 지원금이 낯설거나 퍼주기식 정책에 대한 우려도 있다. 지원금이란 이름까지 붙었으니 괜히 남이 준 돈을 쓰듯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이는 정부가 당초 국민 70% 지급에서 100% 지급으로 확대하면서 보수 야당과 언론 비판을 걱정했는지 고소득층 기부운동을 제안하면서 혼란을 준 탓도 있다. 나아가 대통령에 이어 원희룡 지사도 기부했다고 알리고 나서니 괜스레 지원금 쓰기가 불편해졌다. 

하지만 이제 기본소득이든 지원금이든 정부가 모든 국민에게 조건 없이 주는 돈을 받는데 불편함이 아니라 당당함이 필요한 때다. 지원금이나 기본소득 지급은 공동체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한 사회경제 자본을 분배하는 일이며 모든 재원은 사회 공유자원과 노동에 바탕을 둔다. 

4차 산업혁명이 우리에게 안겨줄 사회는 높은 생산성과 줄어드는 노동수요다. 제레미 리프킨이 ‘노동의 종말’에서 예고했듯 급속한 정보화는 노동력을 점차 필요로 하지 않으며 4차 산업혁명 수혜를 받는 기업이나 개인은 높은 생산성으로 엄청난 부를 갖는 반면 일자리는 줄어들고 실업은 만연할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과거처럼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며 노동을 강요할 수도 강요해서도 안 되는 사회가 오고 있다.

김효철 (사)제주사회적경제네트워크 상임대표 ⓒ제주의소리
김효철 (사)제주사회적경제네트워크 상임대표 ⓒ제주의소리

공장 노동자가 사라진 곳에 새로운 억압을 벗은 자유로운 노동과 삶이 채워져야 한다. 노래하고 그림을 그리고, 시를 지으며 사는 문화 생산자도 있다. 다가오는 가장 큰 위협인 환경문제 해결을 위해 평생을 바치며 사는 사람도 있다. 공동체 농업을 하며 생태계를 지키는 사람도 있고 먼 앞날을 위해 나무를 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제 공동체 사회를 이루는 모든 구성원이 떳떳하게 살아가는 기본 토대가 필요하다.

기본소득이 현실이 되기까지는 어떻게 수백조에 이르는 재원을 마련하는가에 명확한 답을 찾아야 한다. 기본소득 도입이 장애인이나 저소득층 등 취약계층 복지를 후퇴시키지 말아야 하는 과제도 있다. 새로운 시대를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다. / 김효철 (사)제주사회적경제네트워크 상임대표

* 소리시선(視線) /  ‘소리시선’ 코너는 말 그대로 독립언론 [제주의소리] 입장과 지향점을 녹여낸 칼럼란입니다. 논설위원들이 집필하는 ‘사설(社說)’ 성격의 칼럼으로 매주 수요일 정기적으로 독자들을 찾아 갑니다. 주요 현안에 따라 수요일 외에도 비정기 게재될 수 있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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