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댁, 정지에書] (1) 메밀조배기 / 김진경 베지근연구소 총괄디렉터 제주음식연구가

밥이 보약이라 했습니다. 바람이 빚어낸 양식들로 일상의 밥상을 채워온 제주의 음식은 그야말로 보약들입니다. 제주 선인들은 화산섬 뜬 땅에서, 거친 바당에서 자연이 키워 낸 곡물과 해산물을 백록이 놀던 한라산과 설문대할망이 내린 선물로 여겼습니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김진경 님은 제주 향토음식에 대해 공부하고 있는 젊은 연구자입니다. 격주로 '제주댁, 정지에書'를 통해 제주음식에 깃든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글]       

제주여성 중에 이 음식을 알고 있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을 구별하는 기준은 딱 하나다. 아이를 출산했거나 혹은 그렇지 않거나!

제주음식 중 가장 기쁘고 축복이 넘치는 음식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로 꼽을 수 있는 혼례 때 먹는 음식이 아닐까 싶다. 제주의 혼례는 다른 지역과는 다른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일단 명칭이 다른데, 가문잔치, 일뤳잔치라고 부른다. 가문잔치는 집안의 잔치라는 뜻이며 일뤳잔치는 잔치를 치르는 기간이 7일(일뤠)이라는 뜻이다. 이 긴 기간 동안 가장 중요하게 여긴 음식은 돼지고기와 술이다. 제주의 전통혼례문화에 중심이 되는 사람 중, 돼지도감과 술도감이 있는데 ‘도감’이라 하면 지금의 헤드셰프같은 느낌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돼지고기와 소주(고소리술)를 따로 관리하는 사람이 있는 이유는 그만큼 이 두 식재료가 제주전통혼례에서 중요한 음식임이라는 의미이다.

돼지를 추렴하여 남녀노소 누구나 똑같이 공평하게 수육 석 점, 돗수애(피순대) 한 점, 마른두부 한 점을 올린 반(접시)을 함께 나누는 괴깃반 문화는 다양한 제주 음식문화 중에서도 제주만의 독특한 음식문화로 손꼽힌다. 때문에 제주에서는 제주의 혼례문화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토종돼지, 우리가 알고 있는 재래흑돼지를 집안의 중요한 행사를 대비하여 집집마다 돗통시(제주재래식화장실)에서 정성으로 키웠다. 그리고 이 역할은 대부분 며느리 혹은 어머니의 몫이다.

하지만 돗통시는 지금 민속촌이나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다. 근대를 거쳐 현대로 오면서 7일 잔치로 치러졌던 제주의 잔치는 3일 잔치 혹은 이틀 잔치로 축소되었으며 최근에는 당일 잔치로 호텔이나 웨딩홀에서 진행된다. 마을 사람 모두를 설레게 했던 솔문도 자취를 감추어 버렸고, 육지부의 폐백상을 대신할 수 있는 신랑상 신부상도 희미해졌다. 결혼식 도감들도 이제는 거의 사라졌다.

이렇게 제주잔치문화는 점점 희미해지고 있지만 그중 아직 강렬하게 남아있는 또 하나의 가장 기쁘고 축복이 넘치는 음식이 있다. 바로 제주 여성들이 출산 후 먹는 그것, 메밀이다.

“출산하면 시어머니가 따뜻한 물에 메밀이랑 꿀을 풀어줘나서. 그럼 그걸 후루루 마셔. 지금은 돌아가신 시어머니가 막 보고파”

-서귀포시 서광리 김 씨 할머니(75) 이야기 中-

"딸, 조배기는 국물까지 다 먹어야 돼. 그래야 젖이 잘 돌고 궃은 피가 몸에서 나간다. 남기지말고 꼭 다먹어야 된다" ⓒ이로이로

필자가 지금까지 만난 제주의 70-80대 할망들 중 꽤 많은 분이 해산 후 어머니(혹은 시어머니)가 해 준 첫 번째 음식으로 이 뜨거운 물에 풀어낸 메밀꿀물을 꼽으신다. 숙취 후 꿀물로 아린 속을 달래주듯이 해산 후 따끈한 메밀꿀물로 해산 후의 고통을 달래주었던 이 음식은 지금도 제주 할망들의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제주여성들만을 위한 음식이다. 메밀도 귀하고 꿀도 귀했던 시절이라 꿀을 넣지 않고 먹은 어르신들도 있었다.

알다시피 제주사람은 메밀은 궂은 피를 삭혀주는 데 탁월한 음식이라고 믿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당연히 메밀가루는 요리를 해서, 즉 익혀서 먹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뜨거운 물에 그냥 타서 후루룩 마셨다는 점이다. 또 다른 할망은 출산하자마자 시어머니가 제주의 전통주인 오메기술에 메밀가루를 타서 들이키라며 한 대접 줬다고 한다. 귀했던 오메기술에 귀한 메밀가루라……. 출산에 대한 제주인의 경외와 감사가 담긴 할망들의 음식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고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제주음식을 거의 다 먹어보았다고 자부하는 필자도 서른 살이 넘도록 접하지 못했던, 아니 정확하게는 무슨 음식이었는지도 몰랐던 제주음식이 하나 있었다. 바로 메밀조배기.

모멀조베기, 모물조배기, 메밀배기, 궁둥조배기. 마을마다 집집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이 음식은 앞서 이야기했던 윗세대가 먹었던 메밀꿀물을 요리로 승화시킨 음식인 듯 보인다. 메밀조배기를 언제부터 먹었는지는 아직은 정확히 알려지지는 않았다. 해산 후 메밀꿀물과 메밀조배기를 같이 먹었었는지, 메밀꿀물만 먹다가 이후 메밀조배기로 요리를 해서 먹었는지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해산 후 먹은 메밀음식을 여쭤보면 지금의 60~70대 이상 제주의 할망들의 기억에는 주로 메밀꿀물을 이야기하는 반면, 지금 30대~50대의 기억에는 메밀조배기가 남아있다. 언제부터 제주여성의 해산음식으로 메밀이 선택되었는지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필자가 32살에 첫 아이를 출산하고 집에 들어온 날, 식탁 위에는 난생처음 보는 알 수 없는 음식이 올라와 있었다. 회색빛이 도는 탁한 국물에 둥둥 떠 있던 몽글몽글한 수제비, 그리고 무와 약간의 미역이 들어간 낯선 음식.

출산한 딸을 위한 엄마의 비밀레시피 메밀조배기. ⓒ제주의소리
출산한 딸을 위한 엄마의 비밀레시피 메밀조배기. ⓒ제주의소리

오합주부터 돼지고기엿, 새끼보회까지 제주 음식 미식가 아버지 덕분에 어려서부터 제라진 제주음식은 다 먹어보며 커왔다고 자부했는데 이 음식은 낯설어도 너무 낯설다. 출산하고 힘들게 식탁에 앉았는데 옥돔미역국, 성게미역국도 아닌 뜬금없는 수제비가 뭔 말이냐 하며 한술 떠 보았는데 세상에, 생각했던 밀가루의 쫀득함은커녕 너무나 부드럽게 잘리면서 술술 목으로 미끄러지듯 넘어간다. 여기에 허한 속을 꽉꽉 채워주는 폴폴한 뜨끈함까지 배어 있다. 쌉싸래하고 구수한 메밀 향과 어우러지는 달큰한 무와 바다 향 가득한 미역의 조합은 자청비가 제주의 자연을 그대로 담아 제주의 여성에게 주는 출산선물처럼 느껴진다. 그렇기 때문에 이내 바닥을 싹싹 긁어내게 된다. 

벌어진 뼈와 치아에 무리가 가지 않게 수제비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방법도 육지의 그것과 다르다. 메밀가루에 물을 개어 숟가락으로 섞어 제법 묵직하게 반죽이 되었다라고 느낄 정도로만 반죽한다. 육지의 수제비의 맛은 수타식이라면, 제주의 메밀조배기의 맛은 ‘숟타식’이라고 칭할 수 있겠다.

옛날방식을 따르면 따로 육수도 내지 않은 물에 무만 넣고 끓이다 이 묽은 메밀반죽을 숟가락으로 뚝뚝 떼어 넣는다. 이때 숟가락에 반드시 육수 물을 묻혀가며 메밀반죽을 떼어내야 숟가락에서 미끄러지듯 육수로 들어가는 재미있는 모습도 관찰할 수 있다. 메밀반죽이 묽을수록 산모의 치아에 무리가 가지 않는 부드러운 메밀조배기가 완성이 된다. 여기에 약간의 미역과 간장만 들어간 메밀조배기는 제주를 대표하는 제주여성들의 해산음식이 된다. 따로 조미료가 들어가지 않아도 자연이 준 천연 MSG로도 충분히 감동적인 한 그릇이 된다. 심지어 제주의 산후조리원에도 이 메밀조배기는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꼭 나온다. 그만큼 제주 여성들에게 이 음식은 산후보양식으로 중요하다.

내 인생 첫 메밀조배기를 만나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문득 든 생각은, 친정엄마는 이 메밀조배기를 왜 하필 그날, 딸이 출산한 다음 집에 온 날 처음 만들어 상에 올렸던 걸까?

메밀조배기는 제주여성들에게 평상시에는 보여주고 않고 꼭꼭 숨겨 두었다가 딸이 출산을 하면 가장 먼저 정성으로 꺼내는, 할머니가 된 엄마가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히든카드 같은 건 아니었을까?

집안의 혼사가 정해지면 제주여성들이 자릿도새기(새끼돼지)를 마련해 돗통시에서 정성으로 키워 결혼을 준비한 것처럼 출산일이 정해지면 제주도에서 가장 좋은 메밀을 집으로 들여와 정성으로 마련해두었던 제주의 할망들은 각각의 집에 들어 온 여신, 자청비이다. 

엄마가 해 준 음식 중, 여러분을 위한 가장 소중한 음식은 무엇인가요? 오늘은 엄마의 부엌에 들어가서 엄마를 위한 나만의 가장 소중한 음식을 지어보세요.

* 자청비 : 제주 신화 중 세경본풀이에 나오는 농사의 신 중세경. 농경의 신 자청비로 많이 알려져 있고, 천상에서 오곡종자를 가지고 왔는데 그 중 하나가 메밀로 알려져 있다. / 김진경 베지근연구소 총괄디렉터, 제주음식연구가

김진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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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에 찾아온 성인아토피 때문에 밀가루와 인스턴트 음식을 끊고 전통음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떡과 한과에 대한 공부를 독학으로 시작했다. 결국 중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던 일도 그만두고 전통 병과점을 창업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제주전통음식으로 영역을 확장해 현재 베지근연구소에서 제주음식 연구와 아카이빙, 제주로컬푸드 컨설팅, 레시피 개발과 쿠킹랩 등을 총괄기획하고 있다.

현재 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박사과정을 밟으며 제주음식 공부에 열중이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 어멍의 마음으로 제주음식을 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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