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詩 한 편] (48) 동행 / 권영오

형제섬 앞 동행. ⓒ김연미
형제섬 앞 동행. ⓒ김연미

시간이 흘러 흘러 당신이 늙어지면
손끝이 마르고 씨방이 마르고
나 또한 늙어 늙어서 남은 시간 빤히 보이는 날

씨주머니 다 비우고 쏟아놓은 말뿐인데
그 말 단물 다 빠지고
찐득찐득 질긴 사랑만이 남아
최후의 발끝에 달라붙을 때
이 먼 길 오느라 수고했노라
마주 잡으면 다시 불꽃이 일 것 같은
마른 손으로 서걱서걱 볼 비비며
토닥토닥 삭정이 같은 등 두드리며
우리가 함께 늙어
가까운 곳도 먼 곳도 분간하지 못하고
오로지 마주 보는 얼굴만 그렁그렁 넘칠 때
꽃조차 힘이 세져 좀처럼 꺾이지 않고
천신만고 끝에 꽃을 꺾어
그대 귀 뒤에 꽂아주리라

청춘의 기억 같은 꽃을 덮고 함께 누워
인생도 좀 쉬고 사랑도 좀 쉬고
두 손에 풀기 말라도 꼭 잡은 그날까지

-권영오 <동행> 전문-

동행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참 아득하다. 가슴이 아련해지고, 무조건 마음을 다 드러내어 그 사람 어깨 한쪽에 머리를 기대고 싶어진다. 더구나 이렇게 아름다운 동행이라니... 반짝반짝 빛나던 젊은 날들을 지나 가시밭길도 함께 지나 ‘청춘의 기억 같은 꽃을 덮고 함께 누워’ ‘인생도 좀 쉬고 사랑도 좀’ 쉴 때까지 함께할 동행이라니...

지난 해 가을부터 겨울까지, 제주도를 걸었다. 다 안다고 생각했던 지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여행이었다. 다 안다는 생각은 얼마나 많은 허점을 드러내는 것인지. 아래로만 내려서는 그 앎의 지점을 순순히 받아들이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제주도에서 나고 자라, 이제는 살아갈 날들이 살아온 날들보다 더 적게 남아 있는 지점까지 봐 온 제주였지만, 많이 달랐다. 도대체 안다고 생각했던 근거는 어디에 있었던 걸까...

같이 걸었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내가 동경했던 사람들, 내가 하고 싶었던 일들 속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생각과 현실은 많이 달라서 그 간극만큼 주어지는 슬픔의 양이 버겁기도 했지만, 돌이켜 보면 그것마저 아름다웠던 시간. 따라갈 수 없었던 열정과 현명함, 그리고 성실성 앞에 무너지기를 수차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같이 걷는다는 것은 나도 몰랐던 내 길 위의 행운 같은 것. 내길 어디에 이런 행운이 숨겨져 있었던 걸까...

나비처럼 어느 날 문득 내가 걷는 길 위로 날아와 가벼운 날개짓 몇 번 하다 훌쩍 날아가 버린, 또 날아가 버릴 사람들. 그 작은 바람이 일으킬 파장을 생각한다. 그 파장이 나를 여기까지 걸어오게 한 것이며 앞으로 내가 걸어야 할 길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 결국은 나와 같이 걸었던 그 많은 사람들이 나를 다듬어 내는 것임을. 그들이 있어 나는 행복했고, 슬펐고, 더 외로웠으며 더 익어가는 것임을 안다. 내 ‘청춘의 기억’속에 또 하나의 동행을 저장한다.

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 산문집 <비오는 날의 오후>를 펴냈다.

젊은시조문학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현재 오랫동안 하던 일을 그만두고 ‘글만 쓰면서 먹고 살수는 없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제주의소리>에서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연재를 통해 초보 농부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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