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주년, 한국전쟁과 제주] (1) 18세 학도병 고우석 용사, ‘6.25 무공훈장 찾아주기’로 화랑무공훈장 받게 돼

 

한반도가 한국전쟁 폐허로부터 다시 일어선지 70년이 흘렀습니다. 물론 제주는 한반도 최남단이라는 지리적 환경으로 6.25의 직접 피해지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 같은 환경은 6.25 전란 기간 동안 한국전쟁과 연관된 시설·기관들은 물론, 육지부의 피난민과 전쟁 포로들까지 대거 제주로 집중하게 하는 요인이 됐습니다. 4.3이라는 현대사의 비극을 치르고 있던 당시의 제주사회는 한국전쟁으로 유사 이래 정치·군사·외교뿐만 아니라 가장 큰 지역사회 격변까지 경험하게 됩니다. [제주의소리]가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전쟁기 육지에서 제주로 피난이 이뤄지는 과정과, 정부와 군에서 제주도를 적극 활용하면서 남긴 ‘사람과 장소’들을 재조명해보는 [70주년, 한국전쟁과 제주] 기획을 연재합니다. 전쟁의 실상과 전후의 변화상을 살펴보는 이번 기획을 통해 한국전쟁기의 제주역사는 물론 제주인들의 삶을 되돌아봄으로서 ‘항구적 평화’의 중요성을 미래세대에게 전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글] 

“내 나이 열여덟살. 육군 학도병으로 6.25전쟁에 나가서 전투할때 부상 당하고, 죽다살다 하면서 살아 돌아와서 감개무량한거지. 얼마나 고마운거야. 거기서 그렇게 악전고투했는데 살아나온 생각을 하면... 화랑무공훈장도 고맙고. 이런 사태(전쟁)는 다신 일어나지 말아야 돼. 진짜 다시는...”

70년 전 전쟁의 기억은 아흔을 바라보는 용사를 몹시도 힘들게 했다. 군번 0308016번. 1950년 6.25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9월1일 제주에서 학도병으로 참전한 고우석(88) 용사. 가장 끔찍한 동족상잔 비극의 현장, 한국전쟁을 경험한 그는 인터뷰에 응했지만 쉽게 말문을 떼지 못했다. 

“서로를 모략하고 서로를 죽이는 끔찍한 전쟁이다.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전쟁하지 말고 사이좋게 잘 살면 좋겠는데...”라고 말을 잇지 못했다. 

지리산 지구 전투부터 강원도 고성 884고지 전투, 월비산 261고지 전투에 이르기까지 치열하게 나라를 위해 싸운 그는 수많은 사람이 양분된 이데올로기로 인해 죽어가는 모습을 많이 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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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을 바라보는 노병(老兵)은 다시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되풀이 되어선 안된다고 역설한다. 18살 학도병으로 6.25 한국전쟁에 참전한 고우석(88) 용사다. 고 용사는 국방부 ‘6.25 전쟁 무공훈장 찾아주기’ 사업을 통해 월비산 261고지 전투 공적이 인정돼 오는 25일 제주 신산공원에서 열리는 한국전쟁 70주년 기념식에서 대한민국 화랑무공훈장을 받을 예정이다. ⓒ제주의소리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1950년 9월1일부터 1955년 2월15일까지 4년 5개월여간 나라를 위해 전쟁에 젊음을 바친 고우석 용사를 만났다.

고 용사는 국방부 ‘6.25 전쟁 무공훈장 찾아주기’ 사업을 통해 월비산 261고지 전투 공적으로 화랑무공훈장을 받게 됐다. 치열한 교전 끝에 자신이 이끈 1개 분대가 북한군 1개 중대를 격퇴하는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는 오는 25일 제주 신산공원에서 열리는 한국전쟁 70주년 기념식에서 대한민국 화랑무공훈장을 받을 예정이다.

고 용사는 1933년 삼양동서 태어난 제주 토박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것은 오현중학교를 다니던 18살 때. 그는 나라를 지켜야겠다는 일념 아래 총탄이 쏟아지는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나라가 없는데 너희가 어떻게 살 수 있느냐’며 가르침을 멈추고 군에 입대한 담임 선생님의 말씀이 그를 움직이게 했단다.

그는 1950년 9월1일 0308016 군번을 부여받고 제주 육군 제5훈련소 제3교육대대로 배치돼 훈련병 생활을 했다. 이어 일본 병원선인 ‘다카사고마루’호를 타고 9월 27일께 부산항에 도착해 대구서 보병 제11사단 9연대에 배속받고 지리산 지구 전투를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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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석 용사(사진 뒷줄 왼쪽 두 번째)는 1950년 9월1일부터 1955년 2월15일까지 약 4년 5개월간의 군 생활을 이등상사로 마쳤다. ⓒ제주의소리

고 용사는 수차례에 걸친 작전을 마치고 1951년 겨울 동부전선으로 가 어둠이 내려앉은 강원도 고성 월비산 동남쪽 261고지에 투입됐다. 261고지를 지키고 있던 국군의 피해가 심각하다는 소식이 들려와 투입된 것이다. 

출정 당시 소대장은 ‘일주일만 거기서 버텨달라’고 당부했단다. 월비산 261고지 전투 당시 이등중사였던 고 용사는 분대장을 맡아 GMC 트럭에 올라탔다. 새벽 5시께 월비산 261고지에 도착해 달빛에 의지한 채 분대를 이끌고 월비산 방향으로 향했다.

“불을 사용할 수 없으니 달빛으로 길을 확인하며 앞으로 갔다. 어떻게 들어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긴장됐다”고 투입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국군이 없을거라 생각하고 고지로 올라오는 북한군과 30분간 교전을 벌였다. 유탄과 수류탄, 빗발 같은 총탄이 오가는 가운데 M1소총 9개와 BR기관총에 의지해 치열하게 싸웠다. 그렇게 북한군 1개 중대를 격퇴하는 중에 난데없이 기관포 사격을 받기 시작했단다. 

월비산에 있던 북한군이 전투로 인해 위치가 드러난 국군을 향해 기총소사한 것이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고 용사는 분대를 이끌고 후방에 있는 콘크리트와 흙 등으로 만든 진지인 ‘토치카’로 후퇴했다.

부상자들을 토치카로 들여보내고 자신도 들어가고자 하는 찰나 북한군 포탄이 토치카 위로 떨어지며 파편이 날라와 목뼈를 스치고 오른 무릎에 박혔다.

고 용사는 부상으로 인해 전투에 임할 수 없어 대대본부 박격포 진지로 후퇴했다. 추운 겨울 벌겋게 흘러내린 피는 차갑게 얼어붙었고 출혈이 심한 탓에 정신이 희미해지던 그때 진지에 겨우 도착해 헬리콥터를 통해 야전병원으로 후송됐다.

“나중에 치료받고 물어보니까 우리 부대가 보름은 견뎠다더라. 소대장이 말한 일주일보다 더 버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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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방으로 나와 탄약관리를 하던 당시 고우석 용사(사진 오른쪽). 사진 왼쪽 아래 ‘탄약과’라는 한자가 눈에 띈다. ⓒ제주의소리
고우석 용사(사진 앞줄 오른쪽)가 군 복무를 하던 당시 사진. ⓒ제주의소리
고우석 용사(사진 앞줄 오른쪽)가 군 복무를 하던 당시 사진. ⓒ제주의소리

이후 야전병원에서 급하게 조치를 받고 부산에서 치료를 더 받은 뒤 경기도 안양 탄약정비중대와 부산 해운대 종합탄약보급소에서 녹슨 탄약 정비, 불발탄 처리 등 업무를 수행했다. 

이어 강원도 속초에 있는 제50병기대대로 옮겨 탄약 입출고를 담당했다. 1953년 5월엔 서울 동덕여고에 있던 미314 병기단에서 교육을 받고 그해 8월 505병기단 창설에 기여했다.

한국전쟁 당시를 이야기하던 그는 “제주 사람들이 강했다. 북한군조차 제주 사람이라 하면 덤비지 않을 정도였다”고 제주 사람이 모든 분야에서 뛰어났다고 했다.

“지리산 전투 당시 공을 세운 우리 9연대 주역 대부분이 제주 사람이었는데 북한군 16명이 우리를 쳐부수겠다며 김일성한테 혈서를 쓰고 침투한다는 첩보를 들었다. 소식을 듣고 잠복해 있다가 진짜 침투하는 북한군을 발견하고 총격을 가해 4명을 생포하고 11명을 죽였다”

제주 사람이 뛰어났던 이유를 물으니 “제주 사람은 예로부터 단체 활동을 많이 했다. 동네마다 단합된 힘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는 게 몸에 배 있으니 군에서도 잘해 장교나 부대에서 좋아했다”며 “당시 영관급들이 오면 제주 사람을 그렇게 좋아하고 자기 부대로 데려가려 하더라”고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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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석 용사는 사진을 바라보며 한국전쟁 당시를 기억했다. 돋보기를 통해 사진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선 복잡한 감정이 느껴졌다. ⓒ제주의소리

한국전쟁을 회상하며 이야기를 이어가던 고 용사는 살아와서 감개무량할 뿐이라며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학생들에게 강의하러 가면 늘 하는 이야기가 있다. ‘6.25는 가장 무서운 전쟁이고 다시는 있어선 안 된다는 것을 잘 깨우쳐라. 너네가 잘 살지 않으면 그보다 험악한 세상이 올 테니 명심하고 공부 잘 해라’고 한다”고 말했다.

대학생 손주가 ‘6.25 무공훈장 찾기’를 신청한 덕분에 훈장을 받게 된 그는 “전투 당시 죽을 고비를 겨우 넘겨 살아나왔는데 모르고 있던 훈장도 챙겨주니 기분 좋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있는 줄도 몰랐던 훈장이 수여된다 하니 그간 쓰러져간 전우와 전쟁 당시 모습이 아른거려 밤잠을 이루지 못했단다.

“전쟁서 죽은 전우들과 먼저 하늘로 떠난 전우들이 마음에 걸리지만 이렇게 훈장으로 우리가 고생한 것을 인정해주는 것 같아 고맙다”고 했다. 

고 용사는 훈장을 통해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전장을 누비던 먼저 간 전우에 대한 가슴 속 응어리진 한을 조금 덜어내는 듯했다.

그러면서 “어린 나이에 군에 갔는데 나처럼 나라를 위해 희생했던 사람들을 잊지 않고 찾아줘서 감사하다. 손주는 우리 할아버지 공로 많다면서 좋아하더라”고 했다.

올해는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0년이 되는 해다. 겨레의 분단 속에 자행된 동족상잔의 비극 앞에서 초연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분단의 현실을 극복하고 영구적인 평화가 깃든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는 고우석 용사의 말은 평범한 진리다.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을 맞는 올해 6월, 그 평범함이 그 어느 때보다 용사의 가슴에도, 우리들 가슴에도 무겁게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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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약 입출고를 담당하던 당시 늠름한 모습의 고우석 용사.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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