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오페라 ‘순이삼촌’ 갈라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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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열린 오페라 '순이삼촌' 무대 인사 모습. ⓒ제주의소리

[기사 수정=6월 21일 오후 7시 55분] 제주 공연 예술계에서 올해 가장 주목 받는 작품을 꼽으라면 오페라 ‘순이삼촌’이 빠질 수 없다. 4.3예술의 선구자 격인 ‘순이삼촌’이란 무게감과 함께, 종합예술 오페라 장르와 소설 원작이 과연 어떤 만남을 보여줄 지 기대를 갖게 한다.

대략 지난해 말부터 준비 작업에 착수한 이후, 공식적으로 대중들에게 첫 선을 보이는 오페라 <순이삼촌> 갈라콘서트가 20일 제주아트센터에서 열렸다. 코로나19를 고려해 유튜브 생중계로 소개했고, 현장은 부득이하게 제작진, 언론 등 소수에게만 공개했다. 오페라 <순이삼촌>은 제주시와 제주4.3평화재단이 공동 주최하고 제주아트센터 기획제작공연 시리즈의 일환이다.

중요 부분만 소개하는 갈라콘서트 성격에 맞게, 시간은 본래 2시간 30분에서 휴식 시간을 제외하고 절반 정도인 70분으로 줄였다. 무대 장치나 소품은 아직 채우지 않았지만, 노래의 숙련도를 포함해 공연의 기본 틀은 갖춰져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번 공연이 '예고편'임을 감안할 때, 원작 소설 <순이삼촌> 저변에 흐르는 감정을 오페라는 과연 어떻게 살려냈을 지 여부가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가장 큰 관심사였다. 그 감정이란 책에 인쇄된 단어 그대로 “음울”이다.

고향을 생각하면 반가움 보다 가슴이 답답해지는 주인공, 매해 음력 섣날 열 여드렛날이면 곡소리가 울리는 마을, 군인들에 의해 집이 불타고 주민들이 학살당한 역사, 우여곡절 살아남았지만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던’ 순이삼촌의 비참한 최후까지. 소설을 다 읽고 나면 가슴 한 구석이 눌리는 듯 답답해지는 감정은 비단 주관적이지 않을 터.

흥미롭게도 오페라 <순이삼촌>은 이런 감정선을 최대한 이어받으면서 충실하게 한 편의 비극을 추구하고 있었다. 일말의 여유까지 4.3에 집중하는 구성은, 원작에 못지 않은 묵직한 서사를 관객에 안겨주려는 의도로 읽혔다.

“피 말리는 슬픔과 아픔”을 설명하기란 “인간의 언어는 너무나 부족하다”는 프롤로그 곡, 극도의 긴장·불안감을 유발하는 서곡 <레드 아일랜드>. 상반된 느낌의 두 곡은 피해자의 고통, 가해자의 잔혹함이 공존할 줄거리를 예고한다.

오페라 <순이삼촌>은 소설 속 화자인 ‘상수’나 주인공 ‘순이삼촌’에 쏠리지 않고, 지난 역사를 각자 살아온 등장 인물들의 목소리를 최대한 고루 들려주려 노력한다.

고향에 대해 울분과 한숨을 섞어가며 “예나제나 죽은 마을”이라고 내뱉는 상수의 아리아, 순이삼촌의 숙명을 한 마디 ‘옴팡 밭’으로 정의 내리는 큰아버지, 서북청년회 활동을 당당하게 외치는 고모부, 북촌리 주민들 앞에서 “피의 사냥”을 외치는 군 장교,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살아가라고 보듬는 할머니, 그리고 사무치는 순이삼촌의 아리아까지. 작품은 모든 음악과 연기가 오롯이 주제로 향하는 집중력 있는 구성을 보여준다. 원작 문구를 가져온 대사와 새로 만든 대사들도 전반적으로 메시지에 맞게 잘 배치됐다.

"어미 없이 그 먼길 어찌 갈까, 너희들만 그 먼길 어찌 갈까."

강혜명의 순이삼촌 아리아는 어미로서 자기보다 먼저 떠난 자녀들에게 전하고 싶은 솔직한 심정을 차분히 긴 호흡에 실어 보냈다. 

"이 섬 출신이거든 아무라도 붙잡고 물어보라."

소설 <순이삼촌>의 상징처럼 쓰인 구절로 부른 전체 합창 <이름 없는 이의 노래>는 공연의 피날레를 장식하기에 손색 없다.

문학에서 오페라로 장르 전환하면서 원작과 달라진 '창작의 영역'은 생각할 거리를 안겨준다. 대표적으로 고모부와 장교가 있다.

소설에서 고모부는 4.3 당시 서북청년회 출신 군인이었던 과거를 지녔다. 제삿날 말싸움 도중 4.3과 제주에 대한 극우적 시선을 순간 내비친다. 그러나 조카인 상수가 “언제나 반죽 좋은 고모부는 곧 섬사투리로 돌아온다”고 느낄 만큼 나름 눈치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본인 역시 “성님, 서청이 잘했다는 말이 절대 아니우다. 서청도 욕먹을 건 먹어야 헙주”라며 집안 어른들의 반응을 살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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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상 앞에 모인 상수 집안 가족들. 서북청년회 출신 고모부(맨 오른쪽)를 불편하게 여기는 어른들의 표정이 인상적이다. ⓒ제주의소리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고모부라는 캐릭터는 내부인이자 동시에 외부인이라는 독특한 매력을 지닌다. 너스레로 극 분위기를 충분히 유연하게 만들 수 있는 효과적인 장치이기도 하지만, 오페라 <순이삼촌>은 고모부의 유한 부분을 대부분 삭제하고 이북 출신 전직 서북청년회 단원으로서 강인한 부분만 남겼다.

고모부가 등장하자마자 집안 어른들이 못마땅한 듯 고개를 돌리고, 고모부가 어른들을 향해 “나 아니었으면 영정 사진에 오를 뻔 했다”는 무척 대담한 말은 소설에 없는 설정이다. 4.3 때 서청의 활약(?)을 “미군정이 인정했다”며 “위대한 이승만 박사”를 찬양하며 “자유대한 조국의 역사는 바뀌지 않는다”고 외치는 아리아를 감안하면 고모부는 사실상 원작에 없는 새로운 인물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인물 성격이 단편적으로 바뀐 이유가 진지한 극 전체 분위기를 위한 것이라면 충분히 이해된다.

학살 장면에서 사살 명령을 내리는 장교 역시 오페라에서 창작한 인물이다. “모조리 쓸어버려야 우리 임무가 완성”된다는 장교에게서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 뿐”이라며 4.3 강경 진압에 나선 미군 로스웰 브라운을 떠올렸다. 나아가 장교 캐릭터를 통해 일방적인 학살의 주된 가해자인 군경과, 학살의 진범으로 지목 받는 미군정을 겨냥하는 것으로 느꼈다.

각색·연출자의 판단을 존중하면서, 장교 캐릭터의 경우 보다 냉정하면서 서슬 퍼런 광기 어린 학살자의 면모가 더 드러난다면 고모부와 성격이 차별화되겠다.

학살 직전 군인과 주민들의 대치 역시 마찬가지. 등장하자마자 군인들이 주민들에게 총을 겨누며 위협하는 전개는 무난하지만 소설 <순이삼촌>을 기억하는 관객의 눈높이에는 부족하다. 장대 두 개로 주민들을 몰아가면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지고 장대에 걸린 사람들은 빠져나오려고 허우적거”린 원작이 더욱 역동적이고 생생하게 다가오지 않을까. 그저 총을 겨누고 공포에 떠는 모습은 여러 4.3 작품에서 익숙하게 봐 왔기에 긴장감이 떨어진다.

학살의 광풍이 끝나고 남은 생존자들이 교실에 모여 추위와 공포로 벌벌 떠는 소설 속 장면은, 무대 위 배우 5명으로는 오페라에서 체감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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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 마을 학살의 생존자들. 시체 더미에서 순이삼촌(맨 왼쪽)이 구사일상으로 살아돌아왔다. ⓒ제주의소리

오페라 <순이삼촌>은 막이 바뀔 때마다 4.3 영상, 음성들이 등장한다. 공연 시작과 함께 4.3 70주년을 맞아 한재림 영화감독이 제작한 광고 영상 일부가 나간다. 북촌 학살 피해자의 실제 증언, 4.3특별법 속 제주4.3의 정의, 현기영 산문집 <소설가는 늙지 않는다> 가운데 일부 구절 등도 나온다.

짧은 순간까지 4.3을 알리고 싶은 의도는 십분 공감하고 일부는 작품과 어우러지기도 하나, "수류탄" 등 군경의 잔혹한 학살 방법을 설명하는 음성을 비롯해 산문집 낭독, 전통 소리 등은 오히려 흐름과 이해를 방해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맥락을 알기 힘들거나 설명이 부족하기 때문인데, 차라리 피해자 실제 증언을 하나 씩 떼서 나눠 배치하는 게 더 안정적이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로 중간마다 나오는 콘텐츠는 통일성을 가지고 단순화 시킬 필요를 느꼈다.

옴팡 밭에서 숨을 거두는 순이삼촌 옆에 한 남자가 등장한다. 기메를 매단 나뭇가지를 흔들고 걸쭉한 소리를 뽑는 모습은 천상, 망자를 위무하는 역할이다. 순이삼촌과 남자가 각각 구분돼 막이 내리는 마무리 대신, 다른 엔딩을 그려본다. 순이삼촌의 두 아이가 등장해 기다렸던 엄마와 조우하고, 앞장서서 퇴장하는 남자 뒤를 따라 함께 저승으로 향하는 연출이라면 관객의 감정을 더 흔들지 않을지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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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 학살 희생자들이 잠든 옴팡 밭에서 죽음을 앞둔 순이삼촌의 아리아. ⓒ제주의소리

앞서 강조했지만 오페라 <순이삼촌>은 미완성 임에도 원작에 깔린 음울함과 먹먹함을 오페라 예술의 풍부한 감정 표현에 힘입어 색다르게 만날 수 있었다. 갈라콘서트에 임하는 출연진들의 열정이나 준비 상태는 이미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다.

지적에도 못 미치는 사족을 기사에 남겼지만, 9월 본 공연에서는 갈라콘서트보다 1시간가량 분량이 더해질 예정이다. 장점은 살리고 모자란 부분은 채워서 도민 앞에 서리라 예상한다. 원작보다 더욱 깊고 철저한 비극으로 만났으면 하는 개인적인 소망도 슬쩍 내민다.

기사가 나가고 난 뒤, 기자의 사족 상당수가 본 공연 계획에 포함돼 있다는 주최 측의 설명을 덧붙인다.

타 예술 장르에서 ‘순이삼촌’이 겪었던 안타까움을 오페라 <순이삼촌>이 만회할지, 9월 25~26일 제주아트센터 본 공연을 기다려본다. 10월 24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도 잡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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