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詩 한 편] (50) 다시 길에서 / 김민정

하늘을 배경으로 선명한 야자수 ⓒ김연미
하늘을 배경으로 선명한 야자수 ⓒ김연미

들끓는 햇살들의 한여름 대낮처럼
빛을 건넌 그림자가 오래도록 선명하다
안과 밖 나의 경계가 까닭 없이 흔들린다

내 생을 끌고 가는 그것은 무엇일까
금강 같은 신념인가 구름 같은 약속인가
생각이 생각을 안고 한참을 망설였다

-김민정 <다시 길에서>전문-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경계선을 지워가는 것인가. 선명하게 그어졌던 나와 세계 사이의 경계, 나와 나 사이의 경계, 세계와 세계 사이의 경계. 모래 먼지 같은 시간이 지나고 발자국처럼 남겨진 생각들이 까끌거리다 어느덧 보면, 조금씩 무너져 가는 경계선. 내 안에 내가 들어와 있고, 나인 듯 내가 세계인 듯 모호해진 세상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길을 걸으며 보았던 풍경, 길을 걸으며 만났던 사람, 그 길에서 돌발사고 영상처럼 맞닥뜨렸던 생각들은 산화되어 녹빛을 띠고, 내게 날 선 눈빛을 내려놓으라 한다. 돌아보면 구멍 숭숭한 허점들. 나는 녹빛에 기대어 아주 나를 없애고도 싶어지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얼마나 나를 무겁게 하던가. 아주 살짝 들여다본 안과 밖, 그 모습만으로도 나는 이미 나약한 가슴이 되어 들었던 칼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고, 흔들리고 흔들리다 결국 무거운 입술을 다물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길 위에 서고, 그 길 위에 설 때마다 방향을 가늠한다. 내 삶의 옳은 쪽은 어느쪽일까, 매일 같이 되물으며 이만큼 살았으면 한 번쯤 제대로 방향을 잡을 수 있어야 한다고 다짐하지만 여전히 자신이 없다. 그래도 여기까지 걸어왔다. 모든 것들이 다 괜찮다고 말하고 싶지만 괜찮지 않으면 또 어쩌랴. ‘까닭 없이 흔들’리고, ‘한참을 망설’이면 또 어쩌랴. 경계선이 지워진 곳에선, 방향도, 앎도, 시작과 끝도 모두 한 점으로 뭉쳐 ‘금강 같은 신념’도, ‘구름 같은 약속’도 다 필요 없을 지도 모른다. 단지 우리는 서서히 산화되어 갈 뿐이고, 결국 녹빛에 이르면 나는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은 또 다른 내가 되어 있을지 모를 일이지 않겠는가.

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 산문집 <비오는 날의 오후>를 펴냈다.

젊은시조문학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현재 오랫동안 하던 일을 그만두고 ‘글만 쓰면서 먹고 살수는 없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제주의소리>에서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연재를 통해 초보 농부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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