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별세...한국 생태주의 사상의 등불

생태사상가 김종철 <녹색평론> 편집인 겸 발행인(전 영남대 영어영문과 교수)이 지난 25일 향년 74세로 별세했다. 생태사상의 불모지인 한국에서 ‘공생공락(共生共樂)의 가난’을 말하며 1991년 녹색평론을 창간하고, 생태사상을 뿌리 내리게 하는 데 큰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는 21세기 벽두에 한국 사회를 향해 “21세기는 환경과 평화의 세기가 돼야 한다”고 외쳤다. 그의 전망은 현실화되고 있고, 우리 사회는 아직 갈 길이 멀다.

김종철의 <녹색평론>, 한국 사회에 생태주의를 뿌리내리게 하다
김 발행인은 1947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나 마산에서 초·중·고교를 나온 뒤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영문학과에 진학했다. 졸업 후 숭전대학교, 성심여자대학교 등에서 가르치다 1980년부터 영남대에서 교편을 잡았다.

일생 동안 이어져 간 김 발행인의 생태주의에 대한 관심은 영남대에 재직하던 1980년대 초 미국 진보지 <뉴욕 가디언>에서 독일 녹색당의 의회 진출과 관련한 글을 보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 발행인은 이후 1983년 논문을 쓰기 위해 뉴욕주립대에 1년여 체류하는 동안 생태주의자들의 사상을 많이 접했다. 한 인터뷰에서 김 발행인은 이 시절 "'핵무기에 반대하려면 먼저 뉴욕시의 자동차 문명에 반대해야 한다'는 반핵활동가 루돌프 바로의 강연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한국에 돌아온 김 발행인은 사재를 털어넣어 격월간 <녹색평론>을 창간했다. 1991년 11월 <녹색평론> 창간호가 대구의 한 인쇄소에서 처음 세상에 등장했다. 그 사이 수많은 잡지가 생겼다 사라졌지만, <녹색평론>은 2020년 5~6월 172호까지 29년 동안 결호 없이 발행됐다. 이 ‘급진적’ 잡지가 29년 동안 지속될 지는 아무도 몰랐으리라. 그러나 ‘반역’을 꿈꾼 이 잡지는 살아 남았고, 많은 지식인들에게 등불이 됐다. 그리고 ‘급진적'이란 세간의 불온한 딱지와 다르게 우리 삶의 가장 근본적인 일들을 다뤄온, 극도로 현실적인 잡지였다. 2004년부터는 대학 교원을 그만두고 <녹색평론>의 편집과 발간에 열중하며 생태주의 사상과 운동의 확대에 힘썼다. 

2012년에는 한국 최초의 생태주의 정당인 '녹색당' 창당에도 참여했다. 당시 김 발행인은 '녹색당 전임강사'를 자처하며 사람들에게 녹색당을 알리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다. 녹색당 창당 발기인 30명의 녹색당 가입 이유를 담은 <녹색당 선언>의 머리말을 쓰기도 했다. 

김 발행인의 저서로는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 <간디의 물레>, <근대 문명에서 생태 문명으로> 등이 있다. 헬레나 노르베라 호지의 <오래된 미래>, 더글러스 러미스의 <경제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등을 우리말로 옮기기도 했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프레시안(손문상)

경제성장 논리 극복, 기본소득 도입 등 주장한 생태사상가 
김 발행인은 현대 산업문명에 대한 비판의 선봉에 선 사상가였다. 생전 김 발행인은 "경제성장은 하면하고 말면 마는 것이지 적당한 게 있을 수가 없다"며 생태학적 위기를 불러온 자본주의, 산업주의 논리를 완전히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발행인의 저술과 사상은 각종 사회제도에 대한 근본적 성찰과 아이디어로 뻗어가기도 했다. 김 발행인은 2010년대 초중반부터 "경제성장이 멈춘 세상에서 인간이 품위를 지키며 살 수 있는 긴요한 방책"으로 기본소득을 지지했다. 2017년 촛불시위가 한창일 때에는 정치에서 보통 사람의 힘을 강화하기 위해 추첨을 통한 시민의회를 구성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생전 마지막으로 <한겨레>에 발표한 칼럼에서는 코로나 환란 앞에 '당장의 기술적 해법만이 아닌 보다 근본적인 대책을 찾을 필요가 있다'며 "생태계 훼손을 막고, 맑은 대기와 물, 건강한 먹을거리를 위한 토양의 보존과 생태적 농법, 그리고 무엇보다 단순·소박한 삶을 적극 껴안"아야 한다고 열변했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공생의 윤리를 부정하는,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면역력을 체계적으로 파괴하는 탐욕이라는 바이러스"라고 이야기했다.

김 발행인은 2008년 5월 19일 <녹색평론> 100호 발간을 기념하는 <프레시안> 인터뷰에서 생태주의가 ‘현실과 괴리 돼 보인다’는 주장에 대해 “그것이야말로 역설적으로 한국 지식사회의 나태함을 증명하는 것인지 모른다. 정작 심각한 문제가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그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채 관념적 논쟁만 해온 게 바로 한국의 지식사회 아닌가?”라고 지적한다. 

김 발행인은 “<녹색평론>이 다뤄온 문제들, 지구 온난화가 야기하는 기후 변화, 광우병·조류독감(AI·Avian Influenza)처럼 먹을거리 산업화가 촉발한 전 지구적 전염병 사태, 황우석 사태로 확인된 현대 과학기술의 위기, 한미 FTA로 대표되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에너지 위기, 식량 위기 등은 지금 모든 매체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가장 '현실적인' 문제들이다”라고 지식인 사회의 나태함을 꼬집었다. 

되레 그는 가장 현실적인 지식인이었고, 가장 실천적인 지식인이었다. 최근 논의가 활발한 기본소득 역시 김 발행인이 사실상 처음으로 제대로 된 논거와 실천 운동을 한국에 소개했다. 당시 ‘기본소득은 비현실적’이라는 일부 비판이 있었지만, 지금 기본소득 논의는 차기 대권 주자들까지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가 돼 있다. 

특히 김 발행인은 농민 기본소득을 강조해 왔다. 생명의 뿌리이자, 인류 역사의 뿌리인 ‘농업’이 사라지고 천대받는 시대에 인류가 생명을 지켜갈 수 있는 근본 수단에 대한 고민 없음을 지적해 왔다. 그는 생전에 “(내가) 정말 '징그럽게' 농업, 농촌, 소농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더라. 글 한 편, 한 편 쓸 때마다 내 글을 처음 보는 사람을 생각해서 중요한 대목을 계속 강조하다보니, 결국은 비슷한 주장이 계속 반복되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 결과 <녹색평론>은 끊임없이 농업, 농촌, 소농을 강조하는 유일한 잡지가 되었다”고도 말했다. 

“21세기는 환경과 평화의 세기가 돼야 한다” 김종철의 제안은 여전히 유효 
21세기에 들어서고 대한민국 역사상 첫 ‘시민 정부’인 노무현 정부가 탄생한 시기, 그는 <프레시안> 2003년 10월 15일 인터뷰에서 현재 인류가 겪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 정확히 지적했다. 

그는 “지금 자원 고갈, 생태계 오염 등 심각한 문제들이 우리 앞에 산적해 있다. 이런 생태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인류 문명의 존속 자체가 불가능하다. 특히 '지구 온난화'는 파국의 징후이다. 나는 이 문제들이 21세기 전반에 해결되지 않으면 인류 문명은 파멸한다고 생각한다"며 “우리의 생활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 없이 평화만 얘기하는 것은 허망한 얘기다. 21세기는 '환경과 평화의 세기'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김 발행인은 “지구는 닫힌 시스템이다. 지구가 가진 자원은 유한하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해도 잠시 시간을 연장할 수 있을지언정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리는 제한된 자원을 고르게 나눌 수밖에 없다. 그래야 평화와 환경을 유지할 수 있다. 내가 <녹색평론>을 펴내면서 일관되게 고르게 나누는 사회를 지향해 온 것도 이 때문”이라고 밝힌다.

김 발행인은 “10년 전에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이 지금 상식이 된 것처럼, 지금 생각하지도 못한 또 다른 움직임들이 나와 근본적인 사회의 문화 변혁을 꿈꿀 것이다. 그것이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하나의 거대한 기운이 될 것이다. 지금은 막연하게 느껴지고 미약한 것 같지만, 이런 단초들이 전체적으로 절망으로 빠져드는 집단 자살 체제 속에서 하나의 출구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프레시안(손문상)

김종철 선생에 대한 추모 이어져 
김 발행인의 별세가 알려지자 SNS상에서는 시민들의 추도가 이어졌다. 

김 발행인과 녹색당 창당을 함께했던 하승수 변호사는 김 발행인의 부고와 빈소 등을 전하며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어서 어떻게 소식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께서 평안히 가실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썼다. 

김 발행인의 책인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를 출판한 ‘삼인’의 홍승권 대표는 생전 고인과의 추억을 회상하며 "내가 시골에서 되도록 '자급자족'의 삶을 살려고 하게 된 것도, 녹색당 당원이 된 것도 선생의 영향이 적지 않다"고 썼다. 이어 "자주 찾아뵙지 못한 게 못내 한스럽다"며 "선생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평안히 쉬십시오"라고 적었다.

박권일 사회평론가는 "몇 번 뵙진 못했으나 선생님의 글과 말은 제게도 큰 이정표였습니다"라며 "어려운 환경에서도 끝까지 지식인의 아니 인간의 품위를 잃지 않으신, 드문 어른이셨습니다. 손 모아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전했다.

녹색당은 애도 논평을 통해 “인간을 소외시키고 자연을 약탈하는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성장근본주의에 매서운 비판과 성찰의 눈을 거두지 않으셨던 선생님의 가르침에 각성하고 깨우칠 수 있었다. 기후위기와 불평등으로 고통이 일상이 되는 시대에 선생님이 열어주신 녹색 사상은 남은 이들의 길잡이가 될 것”이라며 “공생과 자치, 순환과 치유라는 선생님의 뜻을 길이 이어가야 할 녹색당의 사명을 잊지 않겠다”고 했다. 

고인의 빈소는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됐다. 발인은 27일이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태언 씨와 아들 김형수 씨, 딸 김정현 씨가 있다.

※ 이 기사는 프레시안 제휴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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