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 제주경찰 새로운 과학수사법 첫 적용...간접증거인 미세증거 증명력 인정 안돼

제주 경찰의 뼈아픈 치욕으로 남았던 보육교사 미제 사건의 종착지는 결국 무죄였다. 대법원의 판단이 남아 있지만 11년 전 사건의 진실은 또 다시 미제로 남을 가능성이 커졌다.

광주고등법원 제주제1형사부(왕정옥 부장판사)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강간등 살인)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박모(51)씨에 1심과 같이 무죄를 8일 선고했다.

법정에서 피고인과 마주한 수사검사와 공판검사, 같은 시간 재판 결과를 보고 받은 제주지방경찰청 장기미제수사팀에도 암울한 분위기가 전해졌다.

경찰이 범행 발생 후 9년이 지난 2018년 1월 보육교사 사건을 다시 들춰낸 이유는 새로운 수사기법을 통한 범죄의 재구성에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제수사팀은 피해자 이모(당시 27세.여)씨의 시신이 발견된 제주시 애월읍 고내리 배수로에서 개과 돼지 사체를 이용한 동물 체온변화 실험을 진행했다. 국내에서 첫 시도였다.
 
2009년 2월8일 오후 1시50분 하의가 벗겨진 채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피해자의 사망 시점을 두고 혼선이 빚어지자, 이를 과학적 방식으로 특정 짓기 위한 노력이었다.

실제 실험 결과 무스탕을 입힌 돼지의 사체 내부 온도가 대기 온도보다 낮아졌다가 다시 높아지는 이상 현상이 나타났다. 일반적 법의학 상식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경찰은 이씨의 사망시점을 당시 부검의가 언급한 2009년 2월7일 아닌 2월1일로 특정 짓고 2018년 5월16일 경북 영주시에서 유력 용의자였던 박씨를 긴급 체포했다.

체포의 배경에는 미세증거가 있었다. 과거 경찰의 수사기법에는 족적과 지문 등이 일상이었다. 이후 과학수사가 등장하면서 DNA와 영상·음성분석 등이 새로운 핵심증거로 떠올랐다.

수사기법이 발달 할수록 범죄자들은 증거를 남기지 않는 또 다른 범행으로 진화해 갔다. 미세증거 분석은 기존 DNA와 지문 등으로 확인할 수 없는 새로운 형태의 입증 방식이다.

보육교사의 사체와 옷 등에서 범인의 DNA와 지문은 없었다. 미제수사팀이 섬유조각을 파고든 것도 이 때문이다. 범인과 피해자가 함께 있었다는 점을 미세증거로 증명해 내려 했다.

경찰의 수사내용을 토대로 검찰은 수사검사까지 투입해 공소사실 유지에 총력을 기울였지만 재판부의 판단은 무죄였다. 간접증거가 갖는 증명력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대법원은 부산지역 대표적 장기미제 사건인 일명 ‘태양다방 여종업원 살인사건’에 대해서도 유죄의 원심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2019년 11월 검찰의 재상고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태양다방 사건은 2002년 5월 부산의 한 다방에서 퇴근하던 당시 22세 여종업원이 괴한에 납치돼 흉기로 살해 당한 사건이다. 9일 만에 마대에서 시신이 발견됐지만 직접증거는 없었다.

13년만에 재수사에 나선 부산 경찰은 2015년 당시 유력 용의자였던 양모(50)씨를 체포했지만 유일한 간접증거였던 동거녀의 진술이 오염됐을 가능성에 법원은 결국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은 살인죄 등의 경우 직접증거 없이 간접증거만으로도 유죄를 인정할 수는 있다고 밝혔다. 다만 간접사실의 모순이 없고 논리의 경험칙과 과학법칙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주 보육교사 사건 역시 이처럼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하지는 못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오히려 검찰이 피고인을 범인임을 전제로 사건을 추적한 것으로 보인다며 의구심을 보였다.

항소심 무죄 판결로 제주경찰은 당장 인권 문제에 대해서도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한 과정이었지만 무죄 판결을 받은 피고인은 또 다른 피해자가 됐다.

박씨는 재판이 끝난 후 대법원 확정판결이 나오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나서겠다는 뜻을 밝혔다. 변호인을 통해 형사보상 청구도 이미 예고했다.

선고 직후 박씨는 심경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언론과 검찰, 경찰 모두가 나에게 족쇄였다. 그것들이 나의 모든 것을 잃게 했다. 너무 힘들다. 그만하자”며 고개를 떨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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