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詩 한 편] (51) 칡술 / 변현상

바닥을 기어가는 칡. ⓒ 김연미
바닥을 기어가는 칡. ⓒ 김연미

죽도록 일만 하다 잡혀 죽은 두더지다
저리 쉽게 잡힐 건데
왜 깊숙이 내려갔나
어둡고 딱딱한 땅속 길 있을 리 없는데

주인 위한 그 노동이 죄 아닌 죄가 됐나
강철이 된 언 땅까지
괭이질로 터널 뚫던
잠시도 쉼 없는 생은 차라리 꽃이었다

언제나 당하는 건 제일 아래 계급이지
뭘 더 뺏으려고
술 감옥에 가둬놓나
두더지 굵직한 몸이 미라로 앉아있다

-변현상 <칡술> 전문-

변현상의 시는 날것의 냄새가 난다. 그의 길은 휘거나 돌아가는 일 없이 직선적이다. 한 번 목표가 정해지면 곁눈을 두지도 않는다. 앞뒤를 재거나 하는 것에도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다는 걸 넘어 그런 세상을 아예 모르는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시는 통쾌하다. 뭔가 주저하던 것을 확 저질러버린 듯한 느낌. 그의 시 앞에서는 비유와 상징도 다 소용없을 듯 보인다. 돌려까기 같은 것도 필요 없다. 난 이렇게 생겨먹었으니 생긴 대로 살겠다는 투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 스스로 너무 작아진다는 생각이 들 때 그의 시를 찾아 읽는다. 그의 우렁우렁한 목소리는 내게 평안을 준다. 대리만족이란 이런 것이다. 

시인을 본적도, 만난 적도 없다. 그런데도 그의 주량은 두보나 이태백에 버금갈 것만 같다는, 근거 없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칡술’은 그의 시 소재로서 맞춤이다. 두주불사에게 술의 종류를 가리는 건 예의가 아닌 것. 칡술이면 어떻고, 깡소주면 어떠랴. 누군가와 마주앉은 술상에서 거하게 술잔을 들면 그만이다. 

오늘도 누군가와 술상을 앞에 놓고 앉아 술잔을 들려는 순간, ‘두더지 굵직한 몸’ 같은 칡뿌리가 눈에 띈다. 애정 표현이 서툰 아버지처럼 호통부터 시작하는 시인. ‘어둡고 딱딱한 땅 속’으로 ‘죽도록’ 내려갔으면 그렇게 쉽게 잡히지를 말든지, 아니면 좀 편하게 살든지, 옴짝달짝 못하고 술병에 갇혀 마지막 남은 진액 한 방울까지 탈탈 털리고 있으니... “에잇 미련스러운 놈 같으니.”하는. 참으로 칡의 입장에서는 “내가 뭘 어쨌다고?”할만한 일갈이다. 

그러나 그런 책망의 기저에는 칡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안타까움이 깔려 있다. 칡에 투영되어 있는 이 땅의 ‘제일 아래 계급’에 대한 시인의 시선이다. 우렁우렁한 그의 목소리에 아주 세심하게 구분되는 음절의 결을 따라가다 보면 거기 작고 여린 것들에게 보내는 시인의 마음이 있다. 시인이 펴놓은 우산 아래서 젖은 채로 서있는 것들의 눈망울. 그 눈망울에 있는 물기가 다 마를 때까지 오늘도 시인의 목소리는 더 커져만 가는 것이다.

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 산문집 <비오는 날의 오후>를 펴냈다.

젊은시조문학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현재 오랫동안 하던 일을 그만두고 ‘글만 쓰면서 먹고 살수는 없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제주의소리>에서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연재를 통해 초보 농부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바 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