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의 대전환과 비건법] ③ 문화적 패러다임의 전환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과 임계점에 다가가는 전 지구적 기후위기는 자연과 동물에 대한 인류의 무례와 학대에서 비롯된다. 이는 먹이사슬의 정점에 인간을 두는 우리의 밥상과 깊게 관련되어 있다. 이미 해외에서는 동물권이나 기후변화를 위한 비건 즉 윤리적 채식주의를 민주사회에서 존중받을 만한 가치 있는 신념으로 보호하며 법이나 제도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포스트 코로나를 위한 채식선택권이나 채식 급식을 포함한 생태전환 문화와 교육을 서두르고 있다. 이러한 전 지구적인 대전환의 의미를 총 6회에 걸쳐 진단해 보고자 한다. [필자 주]

1. 사람 동물 생태계를 통합하는 원헬쓰(One Health)
2. 기후변화와 민주주의
3. 문화적 패러다임의 전환
4. 동물권과 생태전환 교육
5. 비거니즘의 현황 및 확산
6. 포스트코로나와 지속가능한 제주

다큐멘터리 ‘어리석은 자들의 세기’는 2055년 급격히 진행된 기후변화가 지구를 초토화시킨 후 과거 북극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인간의 모든 업적이 보존된 글로벌 아카이브에서 지구상 최후의 인간이 오늘의 자료 화면을 보며 묻는다. 

“기회를 갖고 있으면서도 왜 우리는 스스로를 지키지 못했을까?” 

이 영화를 관통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기후변화를 걱정하면서도 석유를 펑펑 쓰거나 마을에 풍력발전기 설치를 반대하는 사람들, 미국식 삶의 방식은 낭비라고 말하면서 자신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아프리카인 등등 여러 삶의 양상들을 보여준다. 영화는 그 답이 인류가 어리석거나 자기 파괴적인 것과는 별 관계가 없고 모든 것이 문화와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인류는 문화시스템에 배태되어 있고 문화에 의해 형성되고 제약을 받는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삶의 현실 문화 내에서만 행동한다.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대부분은 문화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문화 속에서 태어나 문화 속에서 성장한다. 또한 문화는 우리 안에 존재한다. 델포이 신탁의 경구 ‘너 자신을 알라’처럼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문화를 알아야 하고 문화를 알면 자신을 알 수 있다. 문화는 이야기다. 이야기는 우리 주변에서 보는 것을 해석하는 방법이다. 이야기는 우리 삶을 어린 시절부터 관통하여 흘러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생명체들, 나아가 만물을 바라보는 색안경이 된다. 이런 이야기들이 모인 것이 소위 문화다. 

모든 문화는 밑바탕에 문화를 전제하는 정신이 깔려있다. 인류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음식을 통해 한 사회의 규범 가치 정신이 세대와 세대로 전달된다고 한다. 음식은 친밀함의 은유이자 경제의 토대이고 영적 변화와 인류가 공유하는 내면 문화의 상징이다. 또한 대지의 신비와 인간 그리고 자연 관계를 반영하고 연결한다. 먹는다는 것은 가장 정교한 사회의식일 뿐 아니라 우리는 먹는 것을 통해 근원적이고 무의식적 차원에서 문화적 가치와 패러다임에 참가한다. 한마디로 음식을 돌아보는 것은 자신과 문화의 심장부를 들여다보는 모험이다. 

오늘날 글로벌 문화를 지배하는 패러다임은 소비주의다. 글로벌 생태 발자국 네트워크(GFN)에 따르면 2018년 기준으로 세계 소비를 유지하려면 지구가 1.7개, 전 세계인이 한국인처럼 자원을 소비하면서 살려면 지구가 3.5개 필요하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미국과 호주 다음 순위로 자원을 과도하게 사용 중이다. 소비주의는 이제 그 자체가 일종의 종교가 되었고 일상에서 모든 생명의 상호의존성과 신성을 제거했으며 예전의 신성한 날(holy-day)도 단순한 휴가(holyday)로 바뀌고 말았다. 소비주의는 소비가 행복의 척도이고 무한 성장은 진보이며 자연은 착취와 개발의 대상임을 전제한다. 이 전제를 바꿔야 문화시스템도 변할 수 있다. 

특히 과시적 소비는 현 자본주의 사회의 작동방식과 경제 시스템을 효과적으로 설명한다. 1899년 미국의 경제학자 베블런은 유한계급을 언급하며 타인과 자신을 구별 짓기 위해 자신의 부를 과시하려는 욕망이 생산잉여를 촉발시켜 과시적 소비와 전반적 낭비가 생겨난다고 주장했다. 세계화의 결과, 선진국 부유한 계급의 관습이 사회 전체가 따르는 문화적 모델을 결정하고 이로 인해 모방적 경쟁 현상이 전 세계적으로 퍼졌다. 배블런에 따르면 과시적 소비는 전쟁과 노예화를 정당화하고 약탈한 전리품을 자랑하고 부러워하던 야만 문화의 산물이다. 그는 욕구는 무한하지 않고 어느 수준부터는 사회적 장치들이 그 욕망을 자극한다고 통찰했다. 즉 생산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소비의 이유와 법칙이야말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고기에 대한 열망은 소비지상주의라는 현대 유사종교의 핵심이다. 소비지상주의는 소비행위를 통해 고립감을 해소하고 위안을 찾으려는 왜곡 정서가 만연할 때 기승을 부린다. 매일 신성하고 본질적인 소비행위여야 할 섭식이 육식으로 인해 내면의 연결과 감수성의 억압 및 둔감화를 극대화하면서 사람들을 게걸스러운 탐욕만을 지닌 소비자로 변하게 한다. 동물 상품화가 사람마저 상품화하는 시스템을 낳은 셈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라는 소녀와 소녀의 부모는 우연히 신들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먹음직스러운 음식으로 가득 채워진 찬장이 텅 빈 한가운데 버티고 있다. 굶주린 부모님이 허겁지겁 먹기 시작하는 동안 치히로는 밖을 둘러 보러 나간다. 돌아온 치히로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돼지로 변한 부모님의 모습이다. 이 우화는 음식을 매개로 소비사회에서 작동 중인 비인간화의 과정을 보여준다.<br>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라는 소녀와 소녀의 부모는 우연히 신들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먹음직스러운 음식으로 가득 채워진 찬장이 텅 빈 한가운데 버티고 있다. 굶주린 부모님이 허겁지겁 먹기 시작하는 동안 치히로는 밖을 둘러 보러 나간다. 돌아온 치히로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돼지로 변한 부모님의 모습이다. 이 우화는 음식을 매개로 소비사회에서 작동 중인 비인간화의 과정을 보여준다.

대다수의 인류학자들은 배블런이 주장한 과시적 소비의 근원인 야만 문화에서 더 나아가, 만 년 전에 일어난 인류의 가축화가 가져온 환원주의 혁명 즉 목축혁명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2000~3000년에 걸쳐 동물 착취가 제도화되면서 무자비함 소외 사회적으로 용인된 폭력과 학대가 우리 문화 속으로 자연스레 주입되었다는 것이다. 즉 동물을 가축화하면서 인간주인과 동물노예 사이의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관계가 인간의 잔인함을 강화시켰고 그것이 인간 노예제의 토대가 되었다는 주장이다.  

5000년 전 가장 오래된 모든 역사적 기록물에는 공통으로 억압적 가부장제와 사유재산, 그리고 부와 자본으로 대표되는 지배계급이 등장한다. 자본이란 단어는 소와 양의 머리를 뜻하는 라틴어 ‘카파타’에서 유래한다. 여기서 인류사회에 두 가지 제도가 잇달아 발생하는데 하나는 전쟁이다. 고대 산스크리트어로 전쟁을 가리키는 ‘가비아’는 ‘더 많은 소를 갖고자 하는 욕망’을 의미한다. 다른 하나는 노예화다. 전쟁에 승리한 자는 상대편의 가축을 소유하고 사람들을 노예로 삼는다. 

영어·스페인어·독어·불어·러시아어·힌디어·벵갈어·포루투갈어 등 거의 모든 선진국을 포함해 세계인구의 20% 이상이 쓰는 언어들이 공통의 뿌리를 둔 인도유럽어이며 그 선조들이 목축혁명에 가장 먼저 성공한 유목민들일 뿐 아니라 5000년 전 역사에 등장한 대부분의 중앙집권적 고대국가의 주역들이란 점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근대 자본주의와 현대사회의 토대와 심리적 기틀도 이 목축문화에 있음은 너무도 당연하다. 특히 오늘날 목축문화는 제도와 기술의 허울 속 깊은 곳에 모습을 숨기며 기업, 언론매체, 정부, 교육, 식품업체, 의료, 제약, 영양학계 등등이 총망라되어 광범위한 파괴력을 발휘하고 있다. 게다가 비가시적이고 현대사회의 상징인 효율성과 합리성의 이름으로 제도적으로 자행되므로 그 폭력성을 알아차리기가 더욱 힘들다. 

첫째, 동물을 식용으로 삼아 학대 살해하는 행위는 단연코 우리 문화 최대의 그림자다. 식사마다 살아있는 생명체와 그 고통을 회피 부정함은 인간 본연의 연민과 자각을 축소 마비시킨다. 이러한 회피와 부정의 문화가 우리의 사적 공적 영역에 광범위하게 스며들어 집단적 죄의식을 형성한다. 이 죄의식이 우리가 먹는 폭력을 감추는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도록 조장하는 것이다. 소비지상주의 또한 그림자의 투사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그 밖의 만성적 전쟁·집단학살·기아·질병확산·환경파괴 생물종 멸종·동물학대·약물중독·소외·스트레스·인종차별·여성억압·아동학대·기업의 착취·물질주의·빈곤·불의 ·사회침체 등의 총체적 문화적 곤경과 지속가능성 위기의 뿌리도 이 회피와 부정의 그림자에 기인한다. 음식선택은 개인과 문화 전반의 건강, 지구 생태계. 영성, 인류의 태도와 신념, 사회적 관계의 질 등에 막대한 영향을 미침에도 사람들은 동물을 식용으로 삼는 관행에 대한 집단적 무의식적 죄의식으로 인해 그 인과관계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지속가능성과 환경파괴에 대한 온갖 논의에도 신기하게도 축산업의 파괴적인 영향에 대해서는 다들 침묵하는 이유이다.

둘째, 소피아(Sophia)는 인간 본성의 신성한 여성성을 뜻하는 단어로 양육하고 돌보고 배려하는 사람의 본성을 일컫는다. 고대 농경사회에서는 양육과 풍요의 여신이었고 인간 내면의 여성적 힘 또는 지혜를 상징한다. 철학(Philsophy)이란 단어 는 Philo + Sophia 즉 ‘소피아에 대한 사랑’이란 뜻이다. 이 소피아의 억압은 인간·자연·사회 등 모든 생명체 간의 유의미한 관계를 감지하는 우리의 능력에 심각한 훼손을 가한다. 

예컨대 우리가 한 조각의 핫도그나 햄버거 또는 치즈나 베이컨을 먹을 때 자신이 무엇을 먹고 있는지를 직시하고 알아차리기를 회피한다. 그렇게 해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일부러 스스로를 마비시키고 둔감케 함으로써 내면의 연민으로부터 특정 존재를 부정하는 법을 학습한다. 이렇듯 동물의 식용화에 필요한 본연의 연민과 감수성에 대한 억압은 동물에게 행사하는 고통과 단절에 능숙해진 나머지 굶주린 사람들과 생태계, 피폐해진 공동체와 후손에 가하는 고통과도 노련하게 단절하게 된다. 

셋째. 식재료로 쓰이는 동물의 고통, 그 고기를 먹고 그들로부터 이득을 취하는 인간들의 고통, 그 동물들을 먹이는 곡물이라면 충분히 배부를 수 있는 굶주린 사람들의 고통, 생태계와 다른 피조물, 그리고 다음 세대에 무의식적으로 가해지는 고통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온 우주의 선물이자 축복이 되어야 할 식사가 죽음과 고통의 악순환 연결고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좌측부터 나치의 유태인 대량학살수용소와 닭과 돼지 공장식 사육 및 인수공통 전염병 코로나19로 인한 인도 락다운(봉쇄 및 감금) 현장. 동물들에게는 모든 인간은 나치이고 세상은 영원한 유태인 대량학살수용소와 다름없다. 공장식 축산은 역사상 가장 끔찍한 범죄이자 우리에게 던져진 가장 시급한 윤리적 문제다. 그 고통과 처참함은 역사상 일어난 모든 전쟁이 만들어낸 비극을 다 합한 것보다 크다.  사진제공 = 한국채식문화원.<br>
좌측부터 나치의 유태인 대량학살수용소와 닭과 돼지 공장식 사육 및 인수공통 전염병 코로나19로 인한 인도 락다운(봉쇄 및 감금) 현장. 동물들에게는 모든 인간은 나치이고 세상은 영원한 유태인 대량학살수용소와 다름없다. 공장식 축산은 역사상 가장 끔찍한 범죄이자 우리에게 던져진 가장 시급한 윤리적 문제다. 그 고통과 처참함은 역사상 일어난 모든 전쟁이 만들어낸 비극을 다 합한 것보다 크다.  사진제공 = 한국채식문화원.

문화시스템에서 음식은 장막속에 가려져 있으며 무엇을 먹는가에 대해 알려고 드는 것은 일종의 금기이다. 음식은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지 않고 부모나 가족 문화에 의해 강요되며 ‘주어진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식사를 통해 음식을 둘러싼 복잡계 패턴에 항시 노출된다. 그 패턴에 가담하면서 문화의 보이지 않는 전제들과 가치를 스펀지처럼 흡수하고 길들여진다. 우리가 고기를 먹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당연시되고 있는 사회적 규범 및 질서에 따른 결과이다. 마치 매트릭스처럼 문화의 프로그램에 세뇌되어 스스로 선택했다고 착각한다. 문화적 제약에서 벗어나 질서가 의미하는 공적 담론에 의문을 갖고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역사를 통틀어 채식인이 되기로 결심한 사람들은 언제나 있었다. 그들은 영양가 있는 다른 음식들을 구할 수 있다면 먹기 위해 동물을 죽이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고기를 먹느냐 먹지 않느냐의 문제가 전혀 새로운 의미를 보여주며 상황은 매우 긴급하게 대두되고 있다. 아무리 먹기 위해 기르는 가축들이라고 해도 지금처럼 심하고 무자비하게 조직적으로 수정되고 길러지는 과정에서 대량의 학대가 자행된 적은 역사상 없었으며, 대량 사육으로 인한 지구상의 자원 소모 및 환경오염이 이처럼 막대한 적도 없다, 그리고 코로나19 같은 인수공통 전염병과 인류건강, 기후위기의 주범으로 지목받기 때문이다.

문화는 곧 우리다. 우리가 깨어나면 문화도 깨어난다. 기존문화에 내재한 폭력과 미망에서 깨어나 인류가 장막을 걷어 올려 식습관이 초래하는 고통을 직시할 때 끔찍한 고통을 당하는 무력한 존재의 현실과 접속할 때 얼음장 같은 무관심은 녹아내리고 따뜻한 연민이 솟아오르면서 고통에 신음하는 이들을 위해 행동하게 된다. 

소위 영적 삶이란 자비로운 삶이고 자신의 행위에 책임지는 삶이다. 즉 자신의 일상과 선택이 다른 사람들과 동물들 그리고 다른 생명체에 미치는 연결 관계를 자각하는 삶이다. 이것이 모든 종교와 영적 전통의 위대한 가르침인 뭇 생명체들 간 상호의존성이다. 이러한 생명의 전체적인 상호관련성의 자각은 삶의 전제에 영향을 미치고 현재의 정치 경제의 잘못된 점에 대응하는 우리의 태도와 방식에도 결정적 역할을 한다. 예컨대 삶의 전제가 두려움과 결핍에 있다면 우리의 태도와 행동이 정글에서 자라는 방식으로 표현되기에, 실제 정글을 현실화한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생산하는가에만 집중하며 우리가 얼마만큼 풍요로운 공급원을 줄이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반면에 삶의 전제가 풍요와 상호연결이라면 선택의 여지가 없는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하며 어떻게 잘 협력하며 공정하게 기존의 식량과 토지 자원 등을 낭비 없이 잘 관리하고 분배하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즉 75억의 작은 행성에서도 인간과 동식물 자연이 하나의 공동체로 풍요롭게 사는 태도와 행동이 표현된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현실과 소비주의 강박증 그리고 전 지구적 지속가능성 위기는 삶의 전제가 결핍과 두려움에 있음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풍요 속에서 결핍을 생산하고 있는 셈이다. 음식선택과 문화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하는 이유이다. 

600명의 채식이나 비건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청계광장에서 채식으로 지구와 생명을 구하자는 내용의 율동을 선보이고 있다. 만약 상호의존성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비건은 이 세상과 인류, 다음 세대와 동물, 우리 자신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멋진 선물 중 하나이다. 사진제공 = 한국채식문화원.<br>
600명의 채식이나 비건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청계광장에서 채식으로 지구와 생명을 구하자는 내용의 율동을 선보이고 있다. 만약 상호의존성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비건은 이 세상과 인류, 다음 세대와 동물, 우리 자신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멋진 선물 중 하나이다. 사진제공 = 한국채식문화원.

위기가 곧 기회다. 모두가 이야기의 문제다. 현실에 대한 모든 관념과 우리가 서 있는 상징토대 및 삶의 지표와 방식들은 시간이 지나면 변할 수 있고 또 변하는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인류는 문화 패러다임의 전환 그 한가운데 서 있다. 문화의 밑바탕에 깔린 억압과 배제, 경쟁과 분리 그리고 단절과 결핍이라는 관념에 기초한 낡은 이야기를 협동과 자유, 평화와 풍요 그리고 생명과 상호의존을 긍정하는 새로운 이야기로 대체하는 것이다. 새로운 이야기의 탄생에 음식의 역할이 중요하다. 음식은 인류의 사고방식과 공유하는 내면 문화의 상징이자 문화의 패러다임을 공유, 복제, 재생산하는 근본 체계이기 때문이다. 

먼저 일상 속에서 평범한 의례인 식사를 삶의 활력을 불어넣는 영적 도구로 활용해야 한다. 아직 그 흔적이 남아있는 식전 기도나 모든 생명의 신성함과 상호연결성을 상기하는 의례로 대신하는 것이다. 생명체를 상품이나 음식이 아닌 생명을 생명으로 바라보고 존중하는 데서 시작하자는 것이다. 삶을 바꾸려면 마음을, 마음을 바꾸려면 음식을 바꾸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음식을 통해 내면의 연민이나 신성과 다시 연결하고 이는 세상을 바꾸는 힘의 근원이 된다. 

윤리적 채식 즉 비거니즘은 인간을 먹이사슬의 최상위에 두는 인간 중심의 세계관과 환원적 사고로부터의 전환이다. 음식을 넘어 문화의 전환이자 생태문명 사회로의 대전환을 여는 마중물이다. 차단해온 내면의 본질적 연결성과 연민을 재발견함으로써, 인간 상호 간과 대지 및 동식물과의 관계를 새로이 하고 기존의 문화 규범을 재규정하며 우리가 추구하는 이야기들을 다시 적어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과 세계관을 선도해 나간다. 임계점을 치닫는 기후변화와 전염병 창궐 및 만성질환 증가 그리고 식량 및 자원 부족 등은 물론, 생명과 자연을 바라보는 인류의 자세와 태도에도 결정적 계기가 된다. 

과시적 소비주의의 문화적 모델이자 소비주의가 시작된 미국과 유럽의 경우, 밀레니얼 세대(1980~2000년 출생)의 25% 가량이 생명존중·지구 생태계보호·윤리적 소비를 중요시하며 채식이나 비건을 한다고 한다. 한국에는 채식이나 비건 인구가 150만 명을 넘어서서 200만에 육박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온다. 윤리적 채식 즉 비거니즘이 과연 기존의 문화적 전형들을 해체하고 지속가능하며 인간의 타고난 본성을 표현하는 대대적 문화적 전환을 끌어낼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 한국 채식문화원 공동대표 고용석

※ 고용석

비건채식운동가. 1994년, 환경·시민·종교단체가 총망라된 국내 최초의 국제 채식 심포지엄 ‘채식이 지구를 살립니다’와 미래진단 세미나 '퓨쳐비젼'을 비롯하여 세계를 연결하는 지구온난화 글로벌 컨퍼런스 등 수십 차례의 창의적이고 선구적인 프로그램들을 기획했다. 세계 NGO대회와 유엔 사막화와 생물다양성, 기후변화 총회 등에 참여하며 방한 종교 및 환경 지도자들의 통역 일과 각종 주요 신문의 컬럼리스트와 자유기고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 채식문화원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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