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주년, 한국전쟁과 제주] (5) 강원도 고성 564고지 전투 주역, 제주 故 박평길 용사

한반도가 한국전쟁 폐허로부터 다시 일어선지 70년이 흘렀습니다. 물론 제주는 한반도 최남단이라는 지리적 환경으로 6.25의 직접 피해지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 같은 환경은 6.25 전란 기간 동안 한국전쟁과 연관된 시설·기관들은 물론, 육지부의 피난민과 전쟁 포로들까지 대거 제주로 집중하게 하는 요인이 됐습니다. 4.3이라는 현대사의 비극을 치르고 있던 당시의 제주사회는 한국전쟁으로 유사 이래 정치·군사·외교뿐만 아니라 가장 큰 지역사회 격변까지 경험하게 됩니다. [제주의소리]가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전쟁기 육지에서 제주로 피난이 이뤄지는 과정과, 정부와 군에서 제주도를 적극 활용하면서 남긴 ‘사람과 장소’들을 재조명해보는 [70주년, 한국전쟁과 제주] 기획을 연재합니다. 전쟁의 실상과 전후의 변화상을 살펴보는 이번 기획을 통해 한국전쟁기의 제주역사는 물론 제주인들의 삶을 되돌아봄으로서 ‘항구적 평화’의 중요성을 미래세대에게 전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글] 

“사실, 선정 소식을 듣고 저는 많이 울었습니다. 할머니(박평길 용사 부인 故 신대광 여사)가 살아계셨을 때 할아버지가 전쟁영웅으로 선정되셨으면 더 좋았을텐데...”

올해 1월 국가보훈처가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한 제주출신 박평길 용사의 손자인 박재완(47) 씨는 눈물이 고인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전장에서 산화하신 할아버지 박평길 용사. 그리고 끝내 당신의 남편을 가슴 속에 고이 품은 채 평생을 홀로 지내시다 몇해 전 돌아가신 할머니 신대광 여사가 생각나 목이 멘 까닭이다.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2020년 1월의 전쟁영웅에 선정된 故 박평길(1925~1951) 용사.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그의 손자인 박재완 씨, 박평길 용사의 전우였던 고남화(1931년생, 90세) 대령, 그들을 취재한 정수현 작가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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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된 박평길 용사의 손자 박재완 씨. 할아버지를 많이 닮은 그는 할머니 살아생전에 선정됐다면 좋았을 것 같다며 눈물을 보였다. ⓒ제주의소리

고 박평길 용사의 부인인 신대광 여사가 작고한 시점은 2016년. 신 여사는 남편과의 짧은 신혼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1950년 9월 25일 전장으로 떠난 후 주검으로 돌아온 박 용사를 평생 그리다 눈을 감았다. 그 전까지 신 여사는 손자 재완 씨에게 할아버지 박평길 용사 이야기를 자주 들려줬다.

할아버지는 대쪽같은 성격을 갖고 정의감으로 가득 차 일제강점기 시절 이유 없이 길을 막은 일본 순사의 뺨을 내려치기도 했단다. 집에 들러 종종 안부 인사를 건넸던 할아버지의 지인들은 ‘살아계셨으면 더 큰 일을 하셨을 대단하신 분’이라고 했다.

박평길 용사는 1951년 6월 18일 강원도 고성군 수동면 564고지 전투에서 치열한 전투 끝에 26살의 나이로 장렬히 전사했다. 적군의 총탄에 쓰러지는 와중에도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소대장이던 고남화 대령(당시 소위)은 [제주의소리]와의 통화에서 당시를 절대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전선)제일 앞에서 그 양반이 처음으로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면서 전사했습니다. 지금도 눈물겨운데...그만큼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고 전투에 임한 겁니다. 아직도 인상깊게 머리에 남아 있어요”

당시 분대장이던 박 용사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 적의 토치카(콘크리트와 흙 등으로 만든 진지)를 향해서 스스로 앞장서 뛰어나가다 다리에 총상을 입는다. 그러나 흘러내리는 피에도 아랑곳없이 적의 토치카 안으로 수류탄을 던져 넣어 적군 10여명을 폭사시키고, 다시 도망가는 적군을 쫓아 백병전을 치르다 결국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는 것.

박 용사가 전사하던 상황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고 대령은 현재 경기도 성남시에 살고 있다. 올해 여권을 갱신하기 위해 성남시청 민원실을 방문했을 때 이달의 전쟁영웅으로 걸려있는 박 용사의 포스터를 보고 그 자리에서 울컥 눈물을 쏟아냈다고 했다. 당시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 발걸음을 쉽게 뗄 수 없었단다.

“늦게나마 박 용사의 영웅적인 행동이 알려지게 돼 상당히 기쁘다. 포스터 사진 걸어놓은 것 보고 상당히 감개무량했다. 사람들이 박 용사를 통해 나라 사랑 정신을 기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또 박 용사가 대한민국 전쟁영웅으로 선정될 수 있도록 노력해준 제주도의 정수현 작가께도 정말 감사히 생각한다.”

고 대령은 박 용사에 대해 품행이 단정하고 말을 잘 하며 부하들이 많이 따랐던 사람이라고 회고했다. 분대장이던 박 용사가 전장에서 어떻게 전사했는지의 당시 전투 기록은 전쟁 중 발간됐던 충남일보 1951년 신문기사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신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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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현 작가가 보관 중인 1951년 충남일보에 소개된 박평길 용사 기사 사본. ⓒ제주의소리

십자포화 속에 돌입한 육탄하사의 공훈찬, 화랑사단의 자랑!

지난 6월 18일 중동부의 최강 요새지인 564고지 점령을 명령받은 1372부대 제3대대 9중대의 고남화 소위가 지휘하는 제2소대는 견고한 토치카에 의거하여 완강한 저항을 기도하는 적진 20미 까지 접근하여 육박돌격전을 감행하고 치열한 백병전을 전개하였다. 이때 박평길 하사는 분대장으로서 점차 치열해지는 적의 탄막을 뚫고 분대선두에 서서 적진에 돌입하였다. 적진 10미까지 육박했을 때 그때였다. 1발의 흉탄은 박하사의 대퇴부를 관통하였다. 그러나 흐르는 선혈과 상처를 돌볼 생각도 없이 수류탄을 투척하여 적의 토치카를 분쇄하고 10여명을 살해한 다음 다시 무기를 포기하고 혼비백산하여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고 총검으로 적 10여명을 살해한 다음 다발총 3정, 소식장총 1정을 노획하면서 다시 적을 추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또 한발의 흉탄에 치명상을 입고 그 자리에서 대한민국만세를 소리쳐 부르고 이곳 동부전선의 호국의 신으로 화하고 말았다. 분대장을 잃은 분대원들은 분노와 복수에 불타는 가슴을 안고 속속 적을 물리치며 앞으로 앞으로 전진하였다.

박 용사는 충남일보의 기록과 그 외 전쟁 자료를 바탕으로 전쟁영웅에 선정됐다. 재완 씨는 할아버지가 전쟁영웅으로 선정될 수 있게 기록을 모아 보훈처에 보내준 정수현 작가와 고남화 대령에게 감사하다고 했다. 두 분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할아버지의 희생이 묻혀졌을 것이라며 거듭 고마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더불어 재완 씨와 정 작가는 건강이 안 좋아 몸이 불편한 상태인 고남화 대령이 쾌유해서 직접 만나뵙고 감사를 표하고 싶다고도 했다.

또 고남화 대령과 정수현 작가, 신대광 여사를 만날 수 있게 이어준 강대준 전 제주도감귤조합장에게도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할머니와 고남화 대령이 만날 수 있게 해준 덕분에 할아버지에 대한 옛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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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남화(사진 오른쪽) 퇴역 대령은 6.25 전쟁 당시 분대장으로 용감무쌍하게 적을 쓰러뜨리고 산화한 故 박평길 하사(이등중사 추서)의 미망인 신대광(사진 왼쪽) 여사를 2006년 7월 2일 만날 수 있었다.  ⓒ제주의소리

재완 씨는 할아버지가 전쟁영웅으로 선정된 다음 포스터와 훈장을 들고 할아버지가 잠들어 있는 서귀포시 상효동 충혼묘지에 올라가 소식을 전했다. 끝내 남편의 소식을 듣지 못한 채 잠든 할머니 묘소에도 기쁜 소식을 전했다.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1월 내내 할아버지의 포스터 사진으로 해놨다는 재완 씨. 아들과 딸에게도 자랑스럽게 말해주고 자주 가는 도서관에 게시된 포스터 앞에서 가족사진을 찍기도 했다. 또 나라를 위해 몸 바친 증조할아버지를 친구들에게 자랑하는 자식들을 보며 울컥하기도했단다.

대한민국 육군 병장 박평길 1925.7.28~1951.6.18.

재완 씨는 울컥한 마음을 뒤로 한 채 “그래도 할아버지의 공적을 많은 사람들이 알아줘 감사하다. 할아버지는 충분히 전쟁영웅에 선정될 인물이라 생각했다. 나라에서 인정한 훌륭한 분이 제 할아버지라는 사실이 무척 자랑스럽다. 그 고마움을 대신해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살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안중근 의사의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이란 유묵처럼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군인의 본분을 다한 박평길 용사. 나라가 처한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그와 같은 영웅들의 숨은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일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대한민국 육군 병장 故 박평길 용사뿐만 아니라 나라를 위해 소리 없이 자신의 본분을 다하다가 쓰러져간 수많은 영웅들은 치열한 전장의 어딘가에서 지금도 쓸쓸히 잠들어 있다. 한국전쟁 70주년, 그들을 잊지 않아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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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용사의 손자 재완 씨와 정수현 작가.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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