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주년, 한국전쟁과 제주] (6) 제주도민 해병대 3~4기 기리는 해병혼탑

한반도가 한국전쟁 폐허로부터 다시 일어선지 70년이 흘렀습니다. 물론 제주는 한반도 최남단이라는 지리적 환경으로 6.25의 직접 피해지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 같은 환경은 6.25 전란 기간 동안 한국전쟁과 연관된 시설·기관들은 물론, 육지부의 피난민과 전쟁 포로들까지 대거 제주로 집중하게 하는 요인이 됐습니다. 4.3이라는 현대사의 비극을 치르고 있던 당시의 제주사회는 한국전쟁으로 유사 이래 정치·군사·외교뿐만 아니라 가장 큰 지역사회 격변까지 경험하게 됩니다. [제주의소리]가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전쟁기 육지에서 제주로 피난이 이뤄지는 과정과, 정부와 군에서 제주도를 적극 활용하면서 남긴 ‘사람과 장소’들을 재조명해보는 [70주년, 한국전쟁과 제주] 기획을 연재합니다. 전쟁의 실상과 전후의 변화상을 살펴보는 이번 기획을 통해 한국전쟁기의 제주역사는 물론 제주인들의 삶을 되돌아봄으로서 ‘항구적 평화’의 중요성을 미래세대에게 전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글] 

36척(10.9m) 높이로 우뚝 솟은 백색의 삼각(三角)탑.

제주시 동문로터리 한 가운데 서 있는 해병혼탑(海兵魂塔)은 한국전쟁사의 한 획을 그은 제주도 해병대의 역사를 응집한 상징물이다. 1960년 4월 15일 세워진 해병혼탑에 대해 이해하려면 해병대 병 3·4기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탈환, 북진, 도솔산 전투 등 한국전쟁 당시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귀신잡는 해병’, ‘무적 해병’으로 불리며 피 흘려 나라를 지켜냈던 해병 용사들의 혼이 이 탑에 서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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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혼 탑. 해병대 3·4기 제대 장병 일동이 발기인으로 참여해 1960년 4월15일 현재 위치인 제주시 동문로터리에 세워진후 60년간 제주출신의 해병대 전우들을 중심으로 한 해병대의 역사를 응집한 상징물이다. 60년이 흐른 해병혼탑은 전후세대들에게 전쟁의 아픈 역사와 함께 항구적인 평화의 메시지까지 전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 대한민국 해병대의 근간 ‘제주도’ 

각 기수마다 1500명씩 총 3000명 규모인 해병대 3·4기는 대다수 자원입대한 제주도민들로 구성됐다. 3기는 1950년 8월 5일 입대해 제주주농업중학교와 대정읍 해병 모슬포부대에서 신병 훈련을 받았다. 4기는 같은 달 30일 제주북초등학교에서 입대식을 가졌다. 4기 가운데는 여자 해병 126명을 포함해 중학교 2학년 어린 학생까지 다양한 구성을 보였다. 해병대 4기의 여자 해병은 대한민국 최초의 여군으로 기록된다.

1949년 4월 15일 창설한 대한민국 해병대는 3·4기가 충원되기 전까지 총 병력이 1000여명에 불과했다. 자체적으로 ‘전투 부대로서 완전한 기능을 갖고 있지 못했다’고 평가할 정도였지만 제주도에서만 병력 3000명을 확보하면서 비로소 한국전쟁에서 활약할 수 있었다.

초대 해병대 사령관을 지낸 신현준은 2001년 참전실록을 통해 “제주청년과 학도병 등 해병대 3기와 4기 3000여명을 모병한 것이 해병대가 발전하게 된 원동력이 됐다”면서 “해병대 3~4기생 3000여명은 거의 제주출신으로서 순박·정직했으며 병영이나 전방 전선에서 이탈자가 없었고 용감무쌍한 장병들이었다”고 높이 평가한 바 있다.

젊고 어린 제주도민들의 힘으로 일어선 해병대는 1950년 9월 1일 제주 산지항을 출항한다. 그리고 9월 6일 부산에 도착해 무장한 뒤, 한국전쟁의 흐름을 뒤바꾼 역사적인 전투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기 위해 12일 부산항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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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훈련 목적으로 제주를 방문한 해병대 관계자들의 기념 사진. 뒤로 옛 동양극장 간판 글자가 이채롭다. 출처=제주와 해병대.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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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22일 해병탑과 주변 동문로터리 모습. 해병혼탑 뒤로 보이는 옛 동양극장의 간판은 사라졌지만 건물의 예전 원형은 그대로 남아 있다. ⓒ제주의소리

미군 수송선에 몸을 실은 지 3일 뒤에 벌어진 인천상륙작전을 시작으로, 3·4기를 포함한 해병대는 ▲서울탈환작전(1950.9.20.~28.) ▲북진·철수·재반격 작전(1950.10.20.~1951.1) ▲도솔산지구 전투(1951.6.4.~7.10.) ▲김일성고지(펀치볼) 지구 전투(1951.8.21.~1952.3.16.) ▲전략 도서 확보 작전(1951.2.2.~휴전) ▲장단·사천강지구 전투(1952.3.17.~1953.7.27.) 등 전쟁의 중요한 순간마다 활약하며 ‘무적 해병’의 칭호를 얻는다.

실제로 제주 출신들이 주축이 된 당시 한국 해병대는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미국 해병대가 성공하지 못한 도솔산 공격작전에서 16일 간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1개 연대의 병력으로 2개 사단 병력의 적을 궤멸시켰다. 결국 도솔산을 완전 점령함으로써 전술의 원리원칙을 깨뜨린 전승 기록을 다시 수립했다.

중동부 전선에서도 가장 험준한 산악지대인 924고지와 1026고지(일명 김일성고지, 모택동고지)를 악전고투 끝에 완전 점령했고, 1951년 2월 14일 동해안의 여도를 확보한 이래 원산만 해상에 있는 9개 도서와 서해안의 초도·석도 등 5개 도서를 차례로 확보해 해안선을 통한 적의 보급과 이동을 완전히 봉쇄하기도 했다. 

1952년 2월 29일에는 양도를 탈환할 목적으로 기습적으로 대거 내습해 온 북한군 1개 대대의 병력을 불과 1개 중대의 병력으로 섬멸하기도 했다. 그해 3월 17일 중동부 전선에서 서부 전선으로 이동한 제1연대는 1951년 2월 16일부터 김포반도를 방어하고 있던 제5대대와 함께 수도 방위의 중책을 수행하면서 서부 전선의 장단·사천강·연천·김포 등 각 지구에서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될 때까지 1년 4개월간 적의 침공을 완전히 저지하는 치열한 고지 쟁탈전을 감행했다.

이처럼 1950년 7월 17일 처음으로 북한군과 교전한 이래 휴전이 성립될 때까지 만 3년간 30여 개의 전선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면서 외신기자들이 ‘귀신잡는 해병’ 이라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해병대사령부 기록에 따르면, 한국전쟁 기간 동안 산화한 해병대 병력은 1835명이다. 이 가운데 제주도 출신은 346명으로 경남·부산 266명을 앞서서 가장 많은 수를 기록하고 있다. 전쟁의 포화 속에 탄생한 대한민국 해병대는 제주도민의 희생으로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김성은 전 국방부장관은 2006년 제주해병대의 날에 참석해 “여러분(3·4기)은 해병대 정신이라는 금자탑을 벽돌 한 장 한 장 쌓듯이 쌓아 올렸다. 여러분 참으로 감사하다. 나는 여러분과 같이 싸웠다는 것을 크나큰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고 찬사를 보냈다.

# 3·4기 희생 영원히 기억할 ‘해병혼탑’

참담하고 끔찍했던 동족상잔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1960년 4월 15일. 제주 동문로터리에는 붉은 색 ‘해병혼(海兵魂)’ 글자가 새겨진 탑이 우뚝 솟았다. 해병대 혼탑, 해병대 충혼탑 등 여러 명칭으로 불린 ‘해병혼탑’은 해병대 3·4기 제대 장병 일동이 발기인으로 참여한 건립 추진위원회가, 건설사 대영토건(주)에 맡겨 2월 27일부터 공사에 착수해 완성한 기념 조형물이다.

해병혼탑은 해병대를 포함해 기관·단체가 세운 해병대 전적비 가운데 가장 먼저 건립됐다. 군 창설을 기념하는 경남 진해 ‘해병대 발상탑’ 보다 4년 앞서서 해병혼탑이 세워졌으니 의미가 남다르다. 제주방어사령부(현 해병대 9여단)가 1997년 발간한 《제주와 해병대》에서는 “다른 해병대 전적비는 관·군이 주도가 돼 건립했으나 제주 해병혼 탑은 순수히 예비역 해병대원들이 앞장서서 건립했다. 이는 해병대 정신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서 였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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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8월 30일 문희석 작전 교육국장, 이원경 제주막사장, 해병대 3-4기 예비역들이 해병혼탑 앞에서 촬영한 기념사진. 출처=제주와 해병대.  ⓒ제주의소리

고철수, 김형근, 문상률, 양동익, 강창수, 문창해 등 많은 3·4기 참전 용사들이 십시일반 해병혼탑 건설에 힘을 모았지만, 故 장시영 삼남석유 회장의 공로는 지금도 회자된다. 

해병대에 배속된 해군 군의관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고 전국 명예 해병 1호라는 영예를 지닌 장 전 회장은 해병혼탑 건립 추진위원장을 맡아 물심양면으로 애썼다.

당시 탑 건축비는 총 150만환이 투입됐는데 50만환은 해병대사령부, 50만환은 3·4기 모금, 그리고 나머지 50만환을 장 전 회장이 사재를 털어 출연했다. 

장 전 회장은 《인천상륙·서울수복 작전의 주역》(2010)에서 “나는 (해병혼탑) 건립추진을 책임지고 있어 거의 매일 다른 일을 제쳐놓고 자택에서 또는 제주막사장과 추진 위원들을 만나서 추진 상황을 협의했다”며 “해병혼탑이 건립되고 나서 장면 내각수반도 제주에 와서 참배 행사를 가졌고, 김성은 해병대사령관을 비롯한 많은 해병대 장병들이 참배하는 명소가 됐다”며 뿌듯함을 내비쳤다.

1960년 대영토건(주)에 근무하며 해병혼탑 건설 작업에 투입된 4기 출신 문창해 용사는 지난 22일 [제주의소리]와 만나 “당시만 해도 전쟁이 멈춘 지 얼마 되지 않아 건설사가 장비를 많이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소방차나 사다리도 군대에서 빌려 사용했다”며 “당시 대영토건 사장도 ‘해병혼탑은 절대 재료를 아끼지 말고 완고하게 세우라’고 당부할 정도로 탄탄하게 세워졌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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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9월 8일 해병대 제2상륙 훈련단장의 초도순시 기념 사진. 출처=제주와 해병대.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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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22일 해병탑 모습. ⓒ제주의소리

해병혼탑에는 흥미로운 사연도 얽혀있다.

탑 북쪽 면에 새겨진 해병혼(海兵魂) 글씨는 애초 이승만 대통령 글씨를 받아 새길 계획이었지만, 그해 3.15 부정선거 여파로 제주 서예가 청탄 김광추 선생의 서체로 바꿨다. 더불어 혼(魂) 글자의 우측 변에 위치한 귀신 귀(鬼)는 맨 위 첫 번째 획이 빠져있다. 이는 ‘첫 번째 획을 떼지 않으면 전쟁에서 희생된 영령들이 영원히 죽은 혼이 된다’는 김광추 선생의 생각에 따라 빼고 새겼다. 

당시 해병혼탑 공사 현장에서 근무한 문창해 용사는 가장 어려웠던 작업에 대해 “김광추 선생의 글씨를 확대하는 일”이라고 회고했다.

그는 “탑 넓이보다 글씨 크기가 작아 애를 먹었다. 법원과 행정기관에 발품을 팔면서 도면확대기로 글자 하나를 32등분으로 갈라서 확대했다. 이 과정만 시간이 꽤나 걸렸다”고 기억했다. 더불어 “해병혼 글씨는 김광추 선생이 썼고 나머지 모든 과정은 해병대 손을 거쳐 완성했다. 야자나무는 나중에 3·4기 동지회가 비용을 모아 심었다. 처음 심을 때는 내 키보다 조금 컸는데 지금은 탑 만큼 커졌다”고 말했다.

생전 김광추 선생과 인연을 지녔던 대동호텔의 창립자 박용철 씨는 "생전 김광추 선생의 글씨는 풍채 만큼이나 보통이 아니었다. 해병혼 글씨는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동호텔은 해병혼탑 인근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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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출신 서예가 청탄 김광추 선생이 쓴 '해병혼' 글씨. 혼(魂) 자의 오른쪽 글자 '귀신 귀'에서 첫 번째 획이 빠져있다.  ‘첫 번째 획을 떼지 않으면 전쟁에서 희생된 영령들이 영원히 죽은 혼이 된다’는 의미를 담아 첫 번째 획을 빼고 새겼다. 나라를 구한 해병의 혼이 영원히 살아 있음을 상징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뿐만 아니라, 동문로터리의 도로 구조를 개선하면서 해병혼탑을 제주항 쪽으로 옮길 계획도 있었지만 제주 해병대 예비역들의 반대로 무산된 바 있다.

매해 9월 1일 '제주 해병대의 날'이면 해병혼탑에서 기념 행사가 열린다. 9월 1일은 해병대 3·4기들이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제주 산지항을 떠난 날이다.

단군의 역대를 두고 유례없는 백의민족의 수난 6.25 동란을 상기한다. 국운명멸의 기로에 선 민족의 살상은 금수강산을 혈루로 물드렸고 육골은 산야에 허덕일 때 좌시보다 죽음으로 구국의 대도를 지향하여 민족의 지침이 되겠다고 십대의 젊은 이 고장 학도들이 바로 충무공의 넋을 이은 대한해병이었다.
세기의 전사에 찬란한 인천상륙작전은 세인공지의 사실이며 대한민국의 운명을 반석 위에 안치케 하였다. 생존한 우리 해병제대장병은 이 고장 건아 앞에 호국정신의 계승의 표식을 게시하는 뜻과 대한의 영구한 번영을 기하는 붕지에서 여기에 지난날의 전력을 더듬으며 그 역력한 전공을 추념하고 영구불멸의 상징의 탑을 이 고장 한라록에 세우노라

- 해병혼탑 취지문

4.3의 광풍에서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예고없이 찾아온 한국전쟁에 기꺼이 참전해 본인, 가족, 제주 그리고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해병대 3·4기 용사들. 그들의 헌신으로 대한민국 해병대는 최고의 강군으로 자리매김했고, 그 해병대 정신은 제대 후에도 지역사회 발전에 적극 참여하며 오늘 날의 제주를 만드는데 크게 일조했다. 

막을 수 없는 흐르는 세월, 그리고 참전에 따른 상처로 어느새 육체는 병들고 노쇠해져 하나 둘 눈을 감았다. 하지만 도민과 국민을 지킨 제주도민 해병대 3·4기의 혼은 백색의 해병혼탑이 우뚝 서있는 한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평화 수호의 상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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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소리]와 인터뷰 중인 문창해(88) 해병대 4기 용사.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열정을 담아 세운 해병혼탑...3·4기 활약 기억해달라”
[인터뷰] 해병대 4기 문창해 용사

“내 본래 직업이 토목 기술자입니다. 해병혼탑 공사에 열정을 다했죠.”

해병대 4기 문창해(88) 용사는 해병혼탑을 세우던 60년 전 순간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참전 용사인 그는 군 전역 후 대영토건(주)에 입사했는데 마침 그 회사가 해병혼탑 공사를 맡았다. 측량 하나부터 모든 건립 과정에 참여했던 문 용사는 “당시 대영토건 사장이 장시영 해병혼탑 건립 추진위원장에게 ‘우리 직원이 해병대 4기 출신이니 우리 회사에서 짓겠다’고 이야기하면서 공사를 맡게 됐다. 사장은 ‘해병대를 위해 짓는 탑이니 절대로 재료를 아끼지 말고 완고하게 세우라’고 신신당부했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그렇게 1960년에 완성한 해병혼탑은 제주도와 대한민국을 구한 해병대 3·4기를 알리는 상징이 됐다. 문 용사는 “제주도민 보다는 오히려 다른 지역 사람들이 해병혼탑에 관심을 가진다. 탑을 보고서 ‘제주도가 해병대와 무슨 관계냐’고 궁금해 하는 육지 사람들에게 3·4기 역사를 설명해주곤 했다. 그럴 때 마다 흐뭇하고 뿌듯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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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에 참여했던 현역 시절 문창해 용사. ⓒ제주의소리

많은 동기 선배들처럼 문 용사 역시 4.3으로 인한 제주도민에 대한 '빨갱이'라는 잘못된 낙인을 지우려고 옥쇄의 각오로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다. 인천상륙작전, 서울탈환작전을 비롯해 북한 함경남도까지 진격하면서 숱한 생사의 고비를 넘겼다. 1956년 7월 전역하면서 화랑무공훈장도 받았다.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지만 아버지의 죽음은 잊혀지지 않는다. 문 용사는 4.3 당시 토벌대에 의해 희생된 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주며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그는 “전장 상황이 조금 한가해질 때 민가에서 물건을 강탈한 어느 장교를 보면서 4.3 때 일본 물건만 골라 훔쳐간 토벌대가 떠올랐다”면서 “무수한 전투를 치렀지만 전쟁 일선에서도 4.3 만큼 그렇게 사람을 죽이진 않았다”고 4.3 당시의 끔찍한 양민 학살을 기억했다. 

그는 북한 개마고원 감산령에서 경험한 추위를 뼛속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매 순간 ‘이 추위에 내가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 속에서 버텼다. M1 소총도 얼어서 총알이 나가지 않았다. 빙판 급경사를 몇 번이나 올라가다가 넘어지면서 허리를 다쳤는데 그 때문인지 이후 허리가 불편하다. 손톱·발톱도 전부 빠지고 기형적으로 변했다”면서 "여기서 죽어도 내년 봄까지는 안썩겠다고 전우들과 농담을 던졌던 기억이 난다"면서 웃음을 짓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당시 혹한의 기온이 영하 35도였다. 그 때 살아 돌아온게 기적이지..."라며 순간 울음을 터트렸다. 몸서리치게 하는 기억은 70년이 지난 지금도 전장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 것인지 짐작케 한다. "더 강해져야 한다"는 문 용사의 마지막 말은 평화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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