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연합-제주의소리 공동기획] 제주도 해안사구 이야기(5) 구좌 한동 단지모살

제주의 자연생태계 중에서 무관심과 보전의 사각지대에 오랫동안 놓여있었던 곳이 있다. 바로 해안사구이다. 해양생태계의 시작점이자 끝 지점이면서도 연안 습지로 인정받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육지로도 인정받지 못한 곳. 그야말로 중간지대에 있는 곳이라 할만하다. 그렇다 보니 제주의 해안사구는 전국에서도 가장 많이 훼손되었다. 국립생태원의 2017년도 보고서에 의하면 제주도 해안사구의 82.4%가 사라졌다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이 때문에 제주환경운동연합은 올해부터 도내 해안사구 조사를 시작했다. 조사 결과를 정리해 오는 12월까지 매월 2차례씩 총 16회에 걸쳐 도내 해안사구의 가치와 관리실태에 관한 내용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 공유지 비극을 ‘공유지 희극’으로 바꾼 제주의 공동체 문화

공동 방목장에서는 농부들이 경쟁적으로 더 많은 소를 끌고 나오는 것이 이득이므로 그 결과 방목장은 곧 황폐해지고 만다는 ‘공유지의 비극’은 현대 경제학의 오래된 이론이다. 영국의 공동 방목장에서 실제 있었던 일이기도 하다. 

경제학자가 아닌 생물학자 가렛 하딘이 1968년 [사이언스]에 발표한 논문에서 처음 언급한 공유지의 비극은 공동체 모두가 사용하는 공유 자원은 소유권이 없으므로 과잉 소비되고 고갈된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본성인 이기적 행위(무임승차)가 공동체 토대를 붕괴시킨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초지를 분할 소유하고 각자의 초지에 울타리를 치는 이른바 ‘인클로저 운동’이 성행했다. 이로써 자본주의의 금과옥조인 ‘사적 소유권’의 핵심적인 이론적 토대가 만들어졌다. 그뿐만 아니라 환경문제에서도 공유지의 비극은 많이 회자되는 개념이며 여기에서 환경정책도 여러 개 파생되었다.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개념은 철옹성 같았다. 그런데 2009년에 오스트롬이라는 학자가 이 논리가 유일한 진리가 아님을 증명해냈다. 오스트롬은 세계 각국의 방대한 공유지 사례 분석을 통해 공유지의 비극 문제를 협동의 원칙에 의해 해결할 수 있음을 이론적으로 증명하였다. 

오스트롬은 이 연구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가렛 하딘처럼 오스트롬도 경제학자가 아닌 정치학자였다. 아쉬운 것은 그 사례 중에 제주도가 빠졌다는 점이다.

해안사구
▲ 하도리마을공동목장. 제주의 마을공동목장은 제주에만 남아있는 목축문화유산으로서 공유지를 협동의 방법에 의해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공간이요 시스템이다.

우리나라에서 제주도만큼 공유지를 효율적이고 체계적으로 관리했던 곳이 있을까? 이중 가장 대표적인 곳 중 하나가 바로 마을공동목장이다. 

제주도의 마을공동목장은 한국 사회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공동 목축문화이면서 기능 측면에서 보았을 때, 목축 공유지 공동관리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적 의미로 해석하면 목축 협동조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마을공동목장이 있었기에 전국 초지의 50%에 육박하는 초지를 제주도가 유지할 수 있었다.

내륙에 마을공동목장이 있다면 바다에는 해녀 등 어촌계가 관리하는 마을공동어장이 있었다. 제주도민들은 바닷가를 ‘바당밭’이라고 부르며 해산물을 채취해왔다. 이 바당밭은 주민들의 중요한 공유지였고 이 공유지를 관리하는 철저한 규칙이 있었다. 그리하여 남획 없이 지속적인 어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지금으로 얘기하면 지속가능한 어업을 진행해왔던 것이다.

이처럼 척박한 토양과 거친 바람에 맞서 살기 위한 제주의 공동체 문화가 사라지고 있다. 한때 123개에 달했다던 마을공동목장은 매각되고 개발되어 현재는 51개밖에 남지 않았다. 앞으로도 매각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이러한 마을공동목장은 앞으로 시급하게 보전할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해안사구
▲ 김녕 덩개해안. 제주의 바닷가를 도민들은 바당밭이라 불렀다. 그리고 이곳을 철저한 규칙에 의해 지속가능한 공유지로 활용하여왔다.

마을공동목장 이외에 해안사구에서도 공유지에 대한 역사가 남아있다. 바로 구좌읍 한동리의 ‘단지모살’ 해안사구 이야기다. 단지모살은 규모가 매우 큰 해안사구이지만 환경부의 관리목록에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조사도 없었다. 제주도내 해안사구에 대한 정밀조사가 필요한 이유이다.

#한동 단지모살 해안사구에서의 공동자원 창출 과정

구좌읍의 한동리는 바닷가를 끼고 있지만, 주민들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한다. 모래땅에서 잘 자라는 당근이 중요한 소득원이었다. 그 이유는 한동리가 모래땅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을의 중심에는 ‘단지모살’이라고 하는 오름처럼 거대한 모래언덕(해안사구)이 있다. 

단지모살의 어원은 정확하지 않다. 다만 ‘모살’은 모래를 뜻하는 제주어이고 ‘단지’는 작은 항아리를 의미하는데 단지처럼 생긴 모래언덕이라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아무튼, 마을의 중심에 자리한 모래언덕인 단지모살에서 불어오는 모래는 주민들에게는 크나큰 고역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주민들은 어떤 방법을 택했을까? 한동 주민들은 그 방법으로 단지모살에 숲을 조성키로 한다. 

차롱 사회적협동조합의 김평선 이사장이 쓴 ‘한동 단지모살 숲 조성, 공동자원의 창출과 변화’ 논문에 이 과정이 잘 정리되어 있다. 김평선 이사장의 논문에 의하면 단지모살의 숲 조성 과정은 다음과 같다.

해안사구
▲ 구좌읍 한동단지모살 (해안사구). 해안으로부터 1km 이상 동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사시살철 사구에서 불어오는 모래는 주민들에게는 큰 고역이었다.

한동리는 한라산 북동쪽 해안에 위치한 마을이다. 해안사구에서 불어오는 모래로 인해 주민들은 일상생활에 불편이 컸다. 마을에 있는 단지모살 때문이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 단지모살 해안사구의 모래가 바람에 날려 농사와 생활에 불편을 겪자 주민들은 사방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모래가 날리는 것을 막기 위해 단지모살에 나무를 심기로 한 것이다. 

본격적으로 사방사업을 시작한 것은 일제의 조선사방사업령이 제정되면서다. 사방사업에 대한 재정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하게 된 큰 계기는 우물 개발이었다. 당시 한동리 상동(上洞)에는 용천수가 없어서 불편한 상황이어서 1930년대 초 용천수 개발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우물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우물을 개발하기 위해 자금을 모아야 해서 사방사업을 활용했다. 사방사업을 하게 되면 당시 행정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래땅에 나무를 심는 일이 당시 쉽지 않았지만, 나무뿌리에 흙과 콩 비지를 섞어 심으면서 나무의 생존율을 높일 수 있었다. 단지모살 조림사업에 지원한 노임의 절반을 주민들이 기부해 공사 기술자 3명을 고용해공사 착수 3년인 1935년 우물 공사가 마무리되어 제주도에서 가장 깊은 우물(22m)이 만들어졌다. 현재 이 우물은 매립되어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단지모살의 조림을 통한 공동자원 관리는 해방 이후 위기를 맞게 됐다. 1948년 4·3이 발발하면서 소개령이 내려지고 주민들을 동원해 한동 마을에 큰 규모의 축성이 만들어졌다. 이후 군경은 효과적인 토벌 작전을 이유로 주민들을 동원해 한동 마을의 나무를 벌목했다. 이때 사방사업으로 심겨 있던 단지모살의 나무들이 벌목됐다. 

해안사구
▲ 학생들이 단지모살에서 야외교련을 하는 광경으로 추정되는 사진.
(출처 : 1942년, 제주도 구좌면 중앙학교 제20회 졸업기념 사진첩)

이후, 1950년대 중반 벌목되어 버린 황폐한 단지모살에 숲을 조성하기 위한 움직임이 다시 일어났다. 4·3 이후 황폐해진 단지모살의 숲을 재조성하는데 학교 설립이라는 마을 사회의 공통이익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방사업의 노임 일부를 한동 초등학교 건립 기금으로 조성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단지모살은 한동리의 리유지로 유지되다가 1961년 지방자치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따라 북제주군으로 귀속됐다. 이후 90년대에 단지모살이 다시 마을의 재산으로 반환되었지만, 이전에 구 북제주군과의 계약에 따라 농사를 짓던 농가에 이용 우선권이 주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단지모살 리유지 운영권은 기본적으로 한동 마을이 가지고 있지만, 실제 이용과 관리는 일부 주민에게 위임되고 있다. 

현대에 들어서면서 단지모살 중 일부는 제주 용암 해수 산업단지로 편입되면서 사라졌다. 한동 마을은 리유지 일부 매각으로 얻은 수익금은 소규모 학교로 전락한 한동초등학교를 살리기 위해 공동주택을 건설할 토지 매입에 사용했다. 제주도의 재정 지원을 받아 공동주택이 건설됐다.

위의 글처럼 한동단지모살은 주민들에게는 모래바람을 날리는 고역의 대상이었다. 사시사철 세찬 바람이 부는 제주에서 모래바람을 맞는 일은 눈보라보다 더한 고역이었을 것이다. 마시는 물에도, 밥에도 모래는 떨어졌을 것이고 귓가에 콧구멍에 쌓이는 모래에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마을주민들은 해안사구에 나무를 심기로 결의한다. 그 결의와 실천의 과정이 윗글에 나와 있는 것이다. 단지 나무를 심은 일로 단순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마을공동체를 단단하게 만들어가는 과정이었고 해안사구를 공동자원으로 창출한 역사이기도 하다. 

게다가 1942년, 제주도 구좌면 중앙학교 제20회 졸업기념 사진첩에 나와 있는 위의 사진처럼 단지모살에서 군사훈련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아픈 흔적이 남아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미 한동단지모살은 단순한 해안사구를 넘어서 역사와 연결된 중요한 가치를 갖게 된 것이다.

# 섬처럼 남아있는 단지모살 해안사구

단지모살은 이러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근 바닷가와 최소 거리 1km 이상 떨어져 있는 독특한 사구이기도 하다. 보통 해안사구는 사빈(조간대)-전사구-배후사구로 이어진 형태를 보인다. 그런데 단지모살은 조간대, 전사구와 동떨어진 배후사구만 가진 형태이다. 서론과 본문은 없고 결론만 남아있는 글처럼. 

이는, 해안에서부터 단지모살 사이가 농경지 등으로 개발되면서 전사구의 흔적은 사라지고 배후사구만 남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실제로 옛 문헌에 따르면 이 사구는 행원 바닷가에서부터 이어져 있다고 나와 있다. 이로 미루어보아 행원, 월정 등의 해변에서 바람에 날린 모래가 오랜 시간에 걸쳐 쌓이면서 아주 긴 해안사구를 형성했고 현재의 단지모살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그 이후 농지, 도로, 주택 건설로 인해 전사구와 배후 사구 일부가 사라지고 현재의 단지모살만 남은 것이란 추론이다. 하지만 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해안사구
▲ 하늘에서 바라본 한동 단지모살. 단지모살 일부가 최근 제주 용암 해수 일반산업단지 건설로 인해 사라졌다. (Daum 지도 캡처)

단지모살은 오름처럼 높이가 꽤 높다. 그 이유는 단지모살이 모래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튜물러스(용암이 흐르다가 가스 등 압력에 의해 부풀어 오르면서 마치 빵처럼 만들어진 용암 지형) 위에 덮이면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지반이 바위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단지모살을 농경지나 다른 용도로 개발이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주변의 사구가 사라져도 이곳만 남았을 가능성이 크다. 현재 단지모살은 숲과 함께 모래밭에서 잘 자라는 작물을 심은 농경지로 이뤄져 있다. 

또한 염생식물인 사철쑥, 애기달맞이꽃, 갯메꽃 등의 초본과 바닷가에서 주로 자라는 까마귀쪽나무, 보리밥나무, 돈나무 등의 목본이 자라고 있다. 해안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지만, 해안사구 생태계를 그대로 가진 것이다. 

이처럼 단지모살은 역사적으로도 귀중한 가치와 더불어 지질적, 생태적 가치도 높은 사구라고 할 수 있다. 하여, 단지모살이 한동리 마을의 공유지로서 오래도록 보전돼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