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181. 봄 해에는 아이 데리고 차조 한 말 번다

* 돌앙 : 데리고
* 흐린 조 : 차조
* 버신다 : 번다, 벌어 들인다

1940~1970년대의 농촌 풍경을 떠올리게 된다. 먹을 것만 귀했던 게 아니라 농민들 삶이란 게 이루 말로 하지 못할 지경으로 열악했었다. 동편 하늘이 비지근히(희붐하게) 밝아 올 무렵이면 입에 서속밥 두어 술 떠 맬젓(멸치젓) 한 조각 얹어 등에 붙은 배 달래 가며 먼 밭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농사일을 쉬는 겨울 빼고는 봄·여름·가을 어느 한철 다름이 없었다. 여름철 조밭 검질(김) 매는 것만 해도 여간 힘겨운 게 아니었다. 초불 두 불 세 불까지, 할머니 어머니 누이들이 걸갱이 하나 들고 매고 또 매었다.

요즘같이 농약 한두 번으로 해결하던 시대가 아니다. 농부들이 하나에서 열까지 몸으로 때웠다.

6월 초면 보릿고개, 먹을 양식이 바닥나 궁핍 속에 기다리다 보리를 베었다. ‘보리 베단 애길 낳았져.’ 하는 말이 그냥 해 보는 소리가 아니었다. 산달이 됐지만 집에 누워 있지 못하고 밭에 나가 보리를 베다가 해산했다는 얘기는 실제 적지 않게 있었던 일이다. 보릿짚은 조처럼 거칠지 않고 부드러워 급한 대로 그 위에서 일을 치렀다는 말이다.

실로 끔찍한 일이었지만 그럴 수밖에 없던 그 시대 우리 농촌의 현실은 그렇게 힘들었다. 그 아기, 두어 달 지나면 애기구덕(아기요람)에 눕혀 등에 지고 밭에 나가 솔밭 그늘에 놓아 재우면서 일을 했다.

지금 젊은이들에겐 들려줘도 믿지 않을 것이지만, 자꾸 얘기해 우리 선인들의 옛 삶이 그러했음을 알려 줘야 하리라. 과거 없는 현재, 현재 없는 미래는 없다.

출처=제주학아카이브.
초불 두 불 세 불까지, 할머니 어머니 누이들이 걸갱이 하나 들고 매고 또 매었다. 출처=강만보, 제주학아카이브.

‘봄 해엔 아이 데리고 차조 한 말 번다.’

고달픈 휴식 속에 춥고 어두운 겨울을 나고 맞은 봄은 노루 꼬리만큼 하던 하루해가 제법 길어 있다. 갓 걷기 시작한 아이였든, 걸음을 떼지 못하는 아기이면 등에 업고 남의 밭에 나가 일을 해 흐린 조 한 말을 품삯으로 벌어들인다 함이다. 한 번 상상해 볼 일이다.

어미는 어른이라 그렇다 치고 아이는 무슨 죄인가. 행여 날이라도 좋으면 하거니와 뜨거운 햇볕 아래거나 비바람이라도 치면 어찌했겠는가. 그래도 ‘벌어들인 흐린 조 한 말’ 입에 풀칠할 양식 아닌가.

그야말로 보람이고 위안이었다.

제주 여성들의 근면함과 강한 생활력을 마치 영상으로 보여주듯 구술하고 있지 않은가. 산업화 이전, 특히 우리 제주 농민들은 그렇게 살았다. 오늘의 풍요로운 삶이 그냥 이뤄진 게 아니다.

박한 땅에다 악천후로 농사짓기마저 힘들었던 제주의 옛 어른들에게 고개 숙이지 않을 수 없다. /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자리>, 시집 <텅 빈 부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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