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과 미디어 토론문](상) 김종민 전 국무총리 소속 4.3위원회 전문위원

지난 7월 31일 제주4.3 72주년을 맞아 사단법인 제주언론학회(회장 최낙진)와 제주4.3평화재단(이사장 양조훈)이 ‘4.3과 미디어’를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공동 개최했다. 그 중 3부는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허구인가? 제주신보 김호진 편집국장과 불온삐라 인쇄사건 기록을 중심으로’라는 주제의 발표(고영철 제주대 명예교수)와 토론이 이어졌다. 이날 발표 내용 중 제주4.3에 대한 일부 오류가 있어 이를 바로잡기 위해 김종민 전 국무총리 소속 4.3위원회 전문위원의 요청으로 토론문 전문을 2회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 주]

# 발제문의 주요 논지
우선 발제문에서 밝힌 ‘연구문제’는 아래와 같다.

▲김호진 편집국장(이하 김호진) 등이 인쇄해 주었다는 유인물은 무엇인가?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적시되어 있는가? ▲이 유인물 또는 삐라들은 언제 인쇄되고 언제 살포되었는가? ▲10월 24일에 살포되었다고 한다면, 그날을 택한 특별한 이유나 배경은 무엇인가? ▲김호진 등이 이를 인쇄해 주었다고 입증할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는 무엇인가? ▲김호진 등은 언제 어디서 처형당했는가? ▲ 삐라의 인쇄 사건이 신문사에는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발제문은 위와 같은 의문과 관련해 몇 가지 문제 제기를 하고 있는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여러 책자에 소개된 무장대의 유인물 제목이 ‘선전포고문’, ‘호소문’, ‘포고문’ 등 제각각이며, 삐라의 내용도 일치하지 않는다.

둘째, 이덕구가 ‘선전포고문’과 ‘호소문’을 살포했다고 하는데, 김봉현‧김민주의 저서 등 대부분 책자에는 ‘선전포고문’은 빠진 채 ‘호소문’만 실려 있다. 선전포고문이 소개된 책자는 문국주의 저서가 유일한 것인 듯하다.

셋째, 존 메릴과 문국주는 김봉현 등이 “선전포고문과 함께 뿌려졌다”라고 주장하는 호소문에 대해서는 거론조차 하지 않고 있다. 알지 못한 것인지 일부러 뺀 것인지 알 수 없다. 국내 책자 중에 포고문과 호소문이 함께 소개된 것은 신상준의 책이 유일하다. 즉 신상준의 저서 ‘제주도 4·3사건’ 하권에만 선전포고문(註, 문국주의 포고문)과 호소문의 내용이 모두 수록되어 있다.

넷째, 이덕구 명의의 삐라가 살포된 시점을 일부 책자엔 ‘1948년 10월 24일’이라고 기록돼 있는데 이 역시 명확하지 않다.

다섯째, 여순 사건 직후 이덕구 명의로 살포된 삐라를 인쇄한 사람은 ‘제주신보’ 김호진 편집국장 등인데, 김호진 외에 삐라 인쇄를 도운 사람들의 직책과 이름이 책자마다 다르다.

여섯째, 김호진이 언제 어디서 처형됐는지 불확실하며 책자마다 그 내용이 제각각이다.

일곱째, 김봉현‧김민주 등은 자신들의 저서 서문에서 4·3 당시 현장을 직접 체험했던 여러 관계자로부터 수합한 자료를 토대로 기록했음을 밝히고 있지만, 나머지 저술가들은 무엇을 근거로 이러저러한 주장을 펴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또한 역사소설 같은 이런 방식의 역사 서술은 이 사건을 이해하는데 적지 않은 방해 요소가 된다.

여덟째, 강순현이 개인적인 인쇄를 부탁을 하러 제주신보사 인쇄실에 갔다가 우연히 김호진 등이 ‘삐라’를 인쇄했다는데, 신문사에 과연 ‘개인적인 인쇄’를 부탁할 수 있는 건지 의문이다.

옛 제주신문사.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옛 제주신문사.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 주요 토론 내용 
발제문은 ‘역사에 관한 글’은 사료에 대한 철저한 검증을 거쳐야 하고 용어 하나도 엄격히 사용해야 한다는 점을 환기시키는 논문이며, 발제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역사 서술의 엄밀성은 언제나 강조돼야 마땅하다. 

발제문에는 더 많은 문제 제기가 있지만, 토론자는 위와 같이 대략 여덟 가지로 발제문의 내용을 요약했다. 그런데 발제자가 제기한 여러 의문에 대한 토론자의 생각은 비교적 간단한 것이다. 

첫째, 발제자는 여순사건 직후에 이덕구 명의로 발표됐다는 유인물(이하 ‘삐라’로 칭함)의 제목과 내용이 왜 책자마다 제각각이며, 일부 책자에는 ‘선전포고문’과 ‘호소문’이 살포됐다고 하는데 왜 ‘호소문’만 소개된 것인지, 삐라 제작 및 살포 시점이 일부 책자에 ‘10월 24일’이라고 쓰여 있는데 이 역시 명확하지 않다는 등 여러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런 혼선이 빚어진 가장 큰 이유는 지금까지 나온 4‧3관련 책자의 저자 중에서 아무도 그 삐라를 실제로 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삐라를 처음으로 소개한 책자는 1963년에 일본에서 발행된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자료집(김봉현‧김민주 공저)’이다. 토론자는 두 공저자를 직접 만나 인터뷰를 했는데, 인터뷰 결과 알게 된 사실은 김민주는 출판비를 대고 자신의 체험담을 증언했을 뿐 실제 저자는 김봉현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아래 소개한 것처럼, 김봉현은 신변에 위험을 느껴 1948년 4‧3무장봉기 전에 일본으로 피신해 직접 4‧3을 체험하지는 않았다. 나중에 피신해 온 사람들의 증언을 채록하여 책을 쓴 것이다.

아무튼 김봉현의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자료집’에는 시기를 달리하는 두 차례의 삐라 내용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첫 번째는 4‧3무장봉기 직후에 살포됐다는 삐라인데, ‘호소문’이라며 △경찰관에게 보내는 호소문과 △시민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구별해 소개하고 있다. 두 번째가 여순사건 직후인 10월 24일에 살포됐다는 삐라로서, 바로 발제자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인데, △선전포고문과 △호소문을 광포했다면서 선전포고문의 내용은 생략된 채 ‘국방군, 경찰원들에게의 호소문’의 내용만을 소개하고 있다.

김봉현은 자신이 삐라를 직접 본 것이 아니므로 단정적인 표현 대신에 ‘다음과 같은 요지의 호소문’ 또는 “‘호소문’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그리고 글의 문맥상으로는 분명 두 개의 삐라(선전포고문과 호소문)를 말하면서도 이중 ‘선전포고문’을 빠뜨렸는데, 이게 빠뜨린 것인지 아니면 ‘선전포고문 형식의 호소문’이라는 뜻으로 뭉뚱그려 말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한편 김봉현의 글을 곰곰이 살펴보면, 김봉현은 ‘선전포고문’, ‘호소문’ 등 삐라의 이름이 마치 삐라 앞부분에 적시된 것인 양 고유명사로써 사용한 것이 아니라 일반명사로 쓴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는 다른 책자도 마찬가지인데, 만일 이 점이 엄밀한 역사 서술에 있어 문제가 된다면 ‘선전포고하는 내용의 삐라’ 또는 ‘호소하는 삐라’로 쓰면 될 것이다.

둘째, 발제자는 △존 메릴의 논문(논문 발표는 1975년이지만, 학술저널을 통해 알려진 때는 1980년이며,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진 때는 1988년이다) △‘4‧3은 말한다-제4권(1997년)’ 등의 책자에도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자료집(1963년)’과 마찬가지로 삐라의 이름과 내용에 대해 혼선을 빚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이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존 메릴이든 ‘4‧3은 말한다’ 저자든 삐라를 직접 보지 못했기에 앞서 출판된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자료집’을 인용한 것이며 각주를 통해 인용했음을 밝혀 놓았기 때문이다.

셋째, 발제자는 “인민군사령관 이덕구 명의의 포고문의 내용을 맨 처음 문자화시켜 세상에 공개한 사람은 문국주(文國柱)라고 생각한다.”면서 문국주의 저서 ‘조선사회주의운동사 사전(1981, 동경: 평론사)’를 소개하고 있는데, 문국주가 쓴 내용을 잘 살펴보면, 아래에 정리한 바와 같이, 삐라의 실제 내용이라기보다는 김봉현의 글을 버무려놓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넷째, 발제자는 “국내 책자 중에 유일하게 포고문과 호소문이 함께 소개된 것은 신상준의 책(신상준의 저서 ‘제주도 4‧3사건’ 하권)이 유일하다”고 했는데, 이는 발제자가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신상준의 책에는 포고문이든 호소문이든 발제자가 문제 삼고 있는 ‘1948년 10월 24일 이덕구 명의의 삐라’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고, ‘1948년 4‧3무장봉기 당시에 살포된 경찰과 시민들을 향한 두 개의 호소문’만 기재돼 있는데, 신상준은 김봉현‧김민주의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자료집’ 인용임을 밝히며 그 내용을 그대로 옮겨놓았을 뿐이다. 

다섯째, 발제자는 김호진과 함께 삐라를 제작한 사람들의 이름과 직책이 책자마다 다르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토론자가 아는 바 없다.

여섯째, 발제자는 이덕구 명의의 삐라가 살포된 시점(1948년 10월 24일)과 관련, 그 날짜가 명확하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다. 토론자 역시 삐라를 직접 보지 못했기에 이에 관한 단정적인 발언을 하기 어려운데, 다만 ‘4‧3은 말한다’ 제4권에 실린 삐라 관련 내용은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 인용이며 인용 사실을 각주를 통해 밝혀 놓았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일곱째, 발제자는 김호진이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붙잡혀 처형됐는지 책자마다 다르게 서술돼 있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이에 관해 명확히 밝혀주는 자료는 토론자도 아직 보지 못했다. 토론자는 직접 구술 채록한 강순현과 최길두의 증언을 통해 김호진의 최후 행방에 대해 글을 쓴 바 있는데(‘4‧3은 말한다’ 제4권), 강순현과 최길두의 증언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이어서 사실성이 높다고 판단을 했으며, 특히 두 사람 모두 토론자의 질문을 받고 나서 김호진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라, ‘제주읍 성내 상황’에 대한 여러 내용을 증언하던 중에 먼저 김호진의 대해 말했음을 밝혀둔다. 아마도 두 사람은 ‘김호진 사건’을 중요 사건이라 여겨서 그리한 듯하다.

여덟째, 발제자는 강순현이 ‘개인적인 인쇄물’을 부탁하러 제주신보사를 찾았다가 김호진이 삐라를 제작하는 장면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는 토론자의 글에 대해 ‘개인적인 인쇄물을 신문사에서 인쇄한다는 것은 매우 특이한 사례’라며 의문을 제기했다. 토론자는 강순현과 제주신보사의 간부인 신두방이나 편집국장 김호진이 제주읍 중에서도 좁은 ‘성내’에서 함께 어울려 살고 있으며, 특히 강순현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해 중학교 교사와 미군정 재산관리처에 근무한 사람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개인적인 인쇄물’을 부탁하는 게 개연성 있는 일이며 그리 특이한 사례라고 보지 않는다. 아울러 토론자가 ‘4‧3은 말한다’ 제4권에서는 ‘개인적인 인쇄물’이라고 썼는데, 이 토론문 작성을 위해 ‘증언 파일’을 찾아보니, 강순현은 그 개인적인 인쇄물과 김호진이 작성했다는 삐라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했음을 밝힌다.

“1948년 가을경의 일이다. 나는 당시 제주문화협회 회장이었다. 협회의 잡지 ‘한국청년의 장래’를 인쇄하려고 하니 인쇄할 곳과 종이가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신문사의 협조를 얻어 인쇄하려고 오전 11시경 제주신보사 윤전실로 갔다. 갔더니 김호진 편집국장(서귀포 출신. 안경 쓰고 키가 작음)이 있었다. 그는 직원 두어 명과 같이 무언가를 인쇄하고 있었는데 보니 삐라를 인쇄하는 것이었다. 하나는 ‘인민군사령관 이덕구’, 또 하나는 ‘혁명군사령관 이덕구’의 명의의 경고문이었다. 당시 신문사 사장은 박경훈, 전무는 신두방이었다. 나는 김호진에게 “자네 목숨이 몇개나 있나?”라며 만류했다. 그러나 김호진은 “산군들의 부탁이다”라며 계속 인쇄를 했다. 나는 급히 신두방 전무를 수배해 그에게 사실을 말했다. 신두방은 “그 자식, 쓸떼기 없는 짓을 하고 있구먼”이라면서 “내게 잘 연락해 줬다”고 말했다. 나는 이 일에 연루되기 싫어서 “난 안 본 걸로 할 테니 내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신두방이 그 삐라를 처리했는지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그 삐라가 시내에 뿌려졌다.”

<1996년 1월 11일 강순현 자택에서 증언 채록>

한편, 발제자는 남로당 조직체계 및 간부 이름, 무장대가 제작해 살포했다는 다양한 이름의 ‘삐라’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발제자가 의문을 제기한 주요 논지가 아니라고 여겨지기에 토론문에서 이에 관한 언급은 생략한다.

또한, 발제자는 “이러한 껍데기 역사기술로 인해 통일조국건설과 미제국주의 타도를 위해 ‘독립신보’에서 필봉을 휘두르던 김호진 기자는 존재하지도 않고, 이 사건의 조연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서 ‘제주신보 김호진 기자(편집국장)’가 이전에 ‘독립신보 기자’였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제주4‧3위원회가 펴낸 ‘제주4‧3사건 자료집-신문편’에 소개돼 있는 여러 기사 중에서 ‘독립신보 김호진(金虎振) 기자’가 쓴 제주 관련 기사를 볼 수 있다. 기사 내용이 매우 상세하고 제주도에 우호적인 내용이라 발제자가 동일인일 것이라고 착각한 듯하다. 독립신보 김호진 기자는 제주에 특파돼 1946년 12월 18일자와 19일자 등 이틀 연속 제주 소식을 전하고 있다. 

이때 독립신보가 기자를 제주에 특파한 까닭은 ‘제주도가 장차 미국의 군사기지화 되어 지브롤터化 할 가능성이 있다’는 미국 AP통신 발 기사 때문이다(한성일보 1946년 10월 22일). ‘지브롤터(Gibraltar)’는 본래 스페인 영토였으나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빠져나가는 좁은 해협에 위치해 있는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인 까닭에 18세기 초 영국이 점령해 군사기지화함으로써 300년이 넘도록 스페인과 영국 간의 갈등을 빚는 지역이다. 

그런데 제주도가 중요한 지정학적 요충지라서 장차 지브롤터처럼 분쟁지역이 될 수도 있다는 AP통신 발 기사가 나오자 중앙 여론이 들끓었다. 그래서 중앙 언론사들이 기자단을 꾸려 함께 제주도에 와서 집중 취재를 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 무렵 독립신보 뿐만 아니라 동아일보, 서울신문, 자유신문 등이 기자를 특파해 제주 상황을 상세히 보도한 내용을 볼 수 있다. ‘독립신보 기자 김호진(金虎振)’과 ‘제주신보 기자 김호진(金昊辰)’은 한자도 다른 동명이인인 것이다. 

제주4.3 초토화작전. ⓒ제주의소리
제주4.3 초토화작전.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 토론문 보완 
이상 발제문에 대한 토론자의 의견을 밝혔는데, 토론문의 내용을 뒷받침하기 위해 발제자가 언급한 자료와 그 자료에 대한 토론자의 의견을 아래와 같이 적는다.

“무장대는 행동을 개시하자 곧 다음과 같은 요지의 호소문을 탄압기관 행정기관과 시민들에게 널리 광포하였다. ‘친애하는 경찰관들이여!…’ (중략), ‘시민 동포들에게!’ (후략)” (84~85쪽)

김봉현‧김민주,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자료집’, 문우사, 1963.

즉 ‘다음과 같은 호소문’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요지의 호소문’임. 즉 자신이 직접 본 것이 아니라 전언을 통해 알게 된 것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한편, 위 책에는 ‘여순사건’(1948년 10월 19일 발발) 직후인 10월 24일 이덕구 명의의 선전포고문과 호소문을 광포했다고 쓰여 있는데, 두 개의 문서가 아니라 하나의 문서만 아래와 같이 소개하고 있다. ‘선전포고문’과 ‘호소문’이 각각 다른 문서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그 대상이 ‘시민’이 아니라 ‘국방군과 경찰원’이라는 점에 주목한다면 하나의 문서를 놓고 저자가 동어반복했을 수도 있다. 즉 ‘선전포고문’과 ‘호소문’이 문서에 적시돼 있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명사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에 따라 濟州島 人民遊擊隊는 총책임자 李德九 명의로써 동년 10월 24일 괴뢰정부에 대한 宣戰布告文과 일체의 토벌군과 통치기관들에게 ‘호소문’을 광포하였다. (중략) 《국방군과 경찰원》’들에게의 ‘호소문’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친애하는 장병, 경찰원들이여! 총부리를 잘 살피라! 그 총이 어디서 나왔느냐? (후략)” (166쪽)

저자는 위의 호소문을 소개하면서 “‘호소문’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라고 서술함으로써 무장봉기 초기에 뿌려졌다는 호소문과 마찬가지로 직접 문서를 본 것이 아니라 들은 이야기를 옮겨 적었다는 점을 알리고 있다.

토론자는 1990년 6월 제민일보 4‧3취재반 기자로서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의 내용을 검증하기 위해 일본으로 가서 열흘 동안 공저자인 김봉현과 김민주를 장시간 인터뷰했고 이에 관한 내용을 글로 쓰기도 했기에 참고로 아래에 소개한다.

“기타 자료로는 1963년 일본에서 출판된 김봉현․김민주의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가 처음이다. 김봉현은 1978년에 일본어 자료집 ‘濟州島血の歷史’를 출판하기도 했다. 한림중학원(한림중 전신)과 제주제일중학교(오현중 전신)에서 역사를 가르쳤던 김봉현은 좌익활동을 하다 일본으로 피신했다. 김봉현(작고)은 취재반이 1990년 오사카에서 만났을 때, 거듭된 질문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일본으로 간 시점을 밝히길 거부했다. 책의 신뢰도가 떨어질까 우려하는 태도가 역력했다. 그런데 김민주 등 몇몇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김봉현이 일본으로 건너간 시점은 1947년 여름경이나 늦어야 1948년 2․7사건 즈음으로, 4․3발발 전에 제주를 떠났다. 김민주는 조천중학원 학생으로서 4․3발발 후 입산했다가 1949년 4월경 붙잡혀 인천소년형무소에 수감됐는데,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 의해 옥문이 열리자 일본으로 피신했다. 두 사람의 약력을 거론하는 까닭은 4․3연구에 워낙 큰 영향을 끼친 이들의 책에 대해 설명하기 위함이다. 살펴본 바와 같이 책을 주도적으로 쓴 김봉현은 4․3 발발 전에 일본으로 떠났기 때문에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는 뒤이어 일본으로 도피해 온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쓰여진 것이다. 김봉현은 증언자를 만나기 위해 북해도까지 갈 정도로 집필에 공을 들였다고 말했다. 김봉현은 제주에서는 당대 최고의 역사학자였다. 그는 일제 때 일본 관서대학과 명치대학에서 역사학과 지리학을 공부했노라고 말했다. 그는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를 쓰기 3년 전인 1960년에 제주도 개국설화부터 일제 말기까지를 꿰뚫는 ‘제주도역사지(濟州島歷史誌)’라는 통사를 출판해 향토사 연구에 선구적인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아무튼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는 좌익적 시각에 편향돼 있고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 ‘팩트’만을 놓고 볼 때는 매우 사실에 가깝다. 일례로 “○○지역에서 적 수백 명을 섬멸했다”는 식으로 표현한 부분을 4․3취재반이 추적해 보면, 날짜에 약간 혼선이 있고 숫자에 과장이 있을지언정 해당지역에서 그러한 사건이 있었음을 대부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책은 4․3의 참혹상을 처음으로 알렸을 뿐아니라, 단지 증언을 나열하는데 그치지 않고 사건의 거의 모든 전개과정을 짚어 갔다. 지금까지도 무장대 활동상이나 사건 전개과정을 파악하는데 여전히 유효한 책이다.”

(김종민, ‘4‧3이후 50년’, ‘제주4‧3연구’, 역사비평사, 1999, 362~363쪽)

John Merrill(1980). The Cheju-do Rebellion, Journal of Korean Studies, No. 2,

“Four days after its outbreak, Yi Tok-ku, a member of the SKLP’s military committee on the island, issued a declaration of war on the government. The statement, which appeared in a clandestine issue of the Cheju Press put out by the SKLP, appealed to the island’s soldiers to follow the example of the Fourteenth Regiment and join the guerrillas: Dear soldiers and policemen, look at your rifles and see where they come from.… Kim, Cheju-do, p. 166. (이는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를 지칭하며 인용한 것이며 쪽수도 같다.), (pp. 182-183.)

The only full-length treatment of the rebellion is a privately printed book, published by Kim Pong-hyŏn and Kim Min-ju, two Korean residents in Japan who appear to have originally come from Cheju-do (Kim Pong-hyŏn, and Kim Min-ju, eds., Cheju-do imnindŭl ŭi 4.3 mujang t'ujaeng sa—Charyo-jip [Materials on the history of the April 3 armed uprising of the Cheju-do people] [Osaka, 1963]).(pp. 140-141.)

위와 같이 존 메릴은 이덕구의 선전포고문(a declaration of war)과 관련해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자료집(문우사, 1963)’을 인용하고 있으며 이를 각주에서 밝혀 놓았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